브룩 쉴즈, 올리비아 핫세, 강수지. 그러니까 이 시절의 책받침 스타 면면이란게 대개 그랬다. 좌청순 우가련의, 교복쟁이들 볼에 발그래 꽃샘을 터뜨리던 어떤 표준적 어여쁨. 요즘도 가끔 ‘라붐’이나 ‘유콜잇러브’의 옛 신디사이저 음색을 우연처럼 들을 때면, 뱅상 랭동 품에 안기던 소피 마르소 누나의 영화 속 깊은 눈매가 선하다. 아. 근데 생각해보니, 요새 아내께서 월간고신 열심히 찾아 읽으시던데, 이거 내가 괜한 얘기를..
기왕 말문 튼 김에, 수다 몇 마디만 더 이어보련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순백의 스테레오타입한 여성 연예인들 틈에서도 꽤나 돋보이는 개성파들은 몇 있었다. 가령 김완선 누나의 얼핏 졸린 듯 나른한 표정과 춤사위는 독특했다. 우아와 도도, 항시 반쯤 눈감은 듯한 나른함이 은유하는 성적 매력. 그건 당대 여드름쟁이들에게 생애 최초의 리비도적 설레임이기도 했다.
경건성을 신조로 하는 우리 교계 매거진에, 실없는 연예계 넋두리나 하려는 건 아니니, 조금만 인내해주시길. 굳이 완선이 누나 얘기를 꺼낸건, 이 왕년의 책받침스타께서 요새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신다는 걸 뒤늦게 알아서다. 그것도 토크쇼부터, 꽤 트랜디한 케이블방송까지. 종횡무진 그 노익장도 대단했지만, 사실 내가 정말 놀랐던건, 그녀의 믿기지 않을만치 말끔하고 청초한 외모였다.
무슨 ‘관리’를 받으면 그리 되는지, 80년대의 아이돌 김완선을 2016년에 그대로 재현해낸 모습이라니. 국민학생 필자가 이제 낼모레 마흔줄을 바라보는 배불뚝이 중년을 향해 과속 패달을 밟는데, TV 속 완선 누나는 여전히 80년대적 예쁨 그대로다. 대단하다. 그리고 실은 더 솔직히 좀 쓸쓸하다. 그녀만이 20대의 정류장에 계속 머무르는데 관한 시샘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까지 세월을 지우고 싶었던 애절함이 안쓰럽다. 하루 손님마냥 잠시 머무는 '젊음'도 '미모'도 붙잡고 싶었을.
연예인. 매력이 상업적 경쟁력의 근간인 그네들만 그렇겠나. 컴퓨터 게임으로 잘 나가던 2000년대초의 프로게이머들은 서른줄 요즘 줄줄이 전업 중이다. 은퇴 이유는 간단했다. 마우스 클릭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더라는 것. 여의도 투자은행에서 딜러로 맹활약하던 내 또래 녀석은 요새 더는 필드에서 뛸 자신이 없단다. 삼십대 초의 ‘총기’를 잃어가는게 괴롭다나 뭐래나.
예전 시인 최영미가 그랬던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철학자 홉스는 인생을 가리켜 ‘짧고 가난하고 고단하며 비루하다’며 쓸쓸히 노래했지만, 사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짧은 인생 중에도 아주 잠깐인 청춘이란, 그 얼마나 깨고 싶지 않은 꿈결이겠나. 단꿈은 그렇게 열망이 되고, 함께 품는 열의는 기어코 산업이 되게 마련이다. 압구정에서 신사거리로 상징되는, 고도화된 성형수술 시장과, 안티에이징 산업이 떠받치는 이른바 ‘동안’ 신드룸. 우리 사회가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의 본질을 그대로 웅변하는 듯하다. 이걸 일종의 사회문제이자 영과 정신의 집단적 왜곡이라고 본다면 과격인건가.
나이듦을 마치 큰 일 나는 것인마냥 자조하고 비하하는 풍토. TV만 켜면 나오는 ‘놓치지 않을거에요’라는 화장품 광고 문구까지. 젊음의 스테미너를 동경하는 이면에는, 삶의 장기적이고 영속적 ‘의미’ 대신, 촌각의 ‘매력’에만 골몰하는 눅눅한 B급 정서가 묻어있다. 인정하자. 우리 한국인의 고민은 전반적으로 너무 현세적이고, 저차원이다. 여드름 스트레스가 엠자 탈모 고민으로 옮는게 자연스런 나이듦이라지만, 그래도 젊음의 유실 따위가 시대적 고민이요 불안이라는건, 여러모로 개인이나 사회 전체에 창피스러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본질적으로 하루하루 죽어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나이듦은 이런 생의 짧음을 실존적으로 체감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경건한 이는 현세의 짤막함을 대면하며, 종교적 영원으로 제 삶을 승화시킨다. 반대로 어떤 이는 저무는 삶을 붙잡으려 현세의 희열과 활력에 광적으로 몰두하기도 한다. 전자를 로고스 지향이라면, 후자는 리비도 충동이다. 사도 바울의 자기부인이 전자라면,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후자다.
안타깝지만, 나이 들어가는 프로세스. 죽음에 내접해며 얻어지는, 이 비밀하고 경이로운 풍성함은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젊음의 빛남이 자동으로 얻어지는데 비해, 나이듦으로 얻어지는 성찰과 지혜는 인생 투쟁의 결과이니까. 나이듦의 가치로움이, 살아온 삶의 이력서로 결정된다는 면에서, 이건 한편으로 참 정직한 아웃풋 (out-put)이다. 평생 여흥을 좇다 거울 앞에 선 자와, 고매함과 정결로 밫어온 이의 삶의 귀결이, 같은 톤과 무게일 수는 없는 것.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나이듦은 숙제다.
인간은 사소한 개념이라도, 그것을 구성하려 지식 이외에 ‘삶’이라는 축적된 무형의 자산이 필요하다. 요컨대 요리 레시피로 풀어낼 수 없는, 엄마의 ‘손맛’같은. 책을 백날 읽어도 가늠 안되는 삶의 진면목. 이건 직접 부딪혀 살아야만 체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연장자의 ‘현명’을 경외하고 공경한다. 노인이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연상자에 대한 이런 ‘공경’이, ‘공격’으로 대체된건 20세기부터였다. 젊음에 관한 강박적 예찬이 만개한 시기와 딱 겹친다. 1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 캄보디아 킬링필드 때, 젊은 혁명주의자들은 노인들더러 소녀들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했다. 자본주의 때가 안묻은 청춘을 공경하고, 낡음에 찌든 노인들을 축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청춘 숭배라는, 이런 광신의 특징은, 나이듦을 부패요 타락으로 본다는 거다. 존 로크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어린이가 백지 상태의 완전무결한 상태라는 ‘백지설’까지 주장했었다. 킬링필드 주역들이 죄다 이들 프랑스 유학파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여러모로 젊음에 관한 병적 집착은 20세기적 보편 특질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그대여. 젊음과 유능을, 당신 자존의 근거로 삼지 마시길. 그대께서 신앙하는 젊음이 반드시 그대를 배반할 것이니. 하나님이 야멸찰 정도로 째깍째깍 나이 들게 하시는 건, 어디까지나 그게 옳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숙이라는 존재양식은 대개, 청춘이라는 눈부시지만 유독한 허상을 탈피할 때 얻어진다. 나이듦은 박수칠 일이요, 만세를 부를 일이다.
인생을 서울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가는 여행길로 보자면, 우리는 어디쯤 왔을까? 대전? 전주? 아. 모르겠다. 그나마 주께서, 죽전 톨게이트 갓 지날 때의 서투름과 안쓰러움에서 진전시켜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벗 여러분. 나이듦을 두려워 마시길. 바울 선생께서는 '겉모습은 낡고 후패하지만 속의 사람은 날이 갈수록 새롭다’는 근사한 고백을 하시었다. 20대는 30대의 날을, 30대는 4,50대의 날을 기대하고 꿈꿀 일이다. 빛나는 삶의 해답들이, 아주 조금씩 수줍은 새색시 낯처럼 표정을 드러낼거다.
그나저나, 엠자형 탈모에는 서리태를 우유에 갈아먹으면 좋다던데. 같이 길 걸을 때 괜히 아내에게 미안해지는건 어쩔 수가 없다. 외모강박에 자유롭겠다며, 이리 자기 관리 못하고 사는게 여간 미안하다. 언제나 귀찮음이 늘상 문제다. 여보. 3센티만 더 넓어지면 그때부터 관리 들어갈게. /
첫댓글 ㅋㅋ
멋있게 나이들어 가시고 계셔요..^^
막강 동안 미모의 슬기자매님 옆이라 좀 두드러질 뿐..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