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별,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벌써 김홍량·도인권·이상진·양성진·박도병·한필호·장명선 등 양산학교 직원들이 하나씩하나씩 나모양으로 불려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구류하였다가 2,3일 후에 재령으로 이수하였다. 재령에서 또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는 해서에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이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그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올라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가,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갔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드러볼 양으로 우리나라의 애국자인 지식 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칸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놓고 우리들을 잡아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박만준·신백서·이학구·유원봉·유문형·이승조·박제윤·배경진·최중호, 재령에서 정달하·민영룡·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김용제·양성진·김구·박도병·이상진·장명선·한필호·박형병·고봉수·한정교·최익형·고정화·도인권·이태주·장응선·원행섭·김용진 등이요, 장연에서 장의택·장원용·최상륜·김재형, 운률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장홍범·권태선·이종록·감익룡, 해주에서 이승준·이재림·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 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유동열·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전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