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는 우리의 낙원이었어
이학주
묵호사람들은 모두 과거를 먹고 산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옛날이 좋았어.”라고 한다.
“여기가 서울의 명동이었어.”
길거리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했다. 어깨를 부딪쳐야 길을 갈 수 있었다. 먼지가 푹푹 날리는 거리에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은 신사가 다녔고, 삼단양산을 쓴 아가씨들이 가득했다.
“뭔 장사를 해도 다 잘 됐어.”
“그러니 묵호는 우리의 낙원이었지.”
보석상이 여느 도시 못지않게 많았다. 이는 그만큼 돈이 잘 돌아 살만한 곳이었다는 증거다. 극장이 몇 개나 되고, 백화점이 들어섰다. 밤이면 카바레와 고급술집이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골목마다 술집 아가씨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사창가는 즐비해서 호객행위로 남자들은 밤길을 갈 수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퇴폐적이라 하겠지만, 이런 현상은 돈이 돌기 때문에 주어진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묵호삼거리 적산가옥에 사는 최 씨 할아버지도 그렇게 얘기했다. 묵호에서 3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이다.
“여긴 명동이었어.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지.”
그 할아버지는 아직도 적산가옥에 산다. 호황을 누리던 그때의 추억 때문이다. 최 씨 할아버지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해 본다.
묵호항에서 시내로 접어드는 묵호삼거리 길목에는 오래된 집이 한 채 있다. 일제 때 지은 2층으로 된 적산가옥이다. 동해에는 의외로 적산가옥이 많다. 일제가 묵호항을 이용해서 우리나라의 물자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묵호에 항구와 철도가 발달한 원인이기도 했다. 항구와 철도를 관리하던 고위 직책은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점령지 묵호에 그들 식의 주거를 짓고 살면서 호사를 누렸다. 당시 일본에서 들어오는 최고의 호화 생활 물품과 우리나라에서 약탈해 가는 물자가 이곳 묵호에는 즐비하였다.
벌써 일제강점기 때부터 묵호는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묵호항을 무역항으로 키우려 했다. 무연탄은 묵호의 경기를 호황으로 이끈 주 품목이었다. 무엇보다 묵호는 고기가 많이 잡혔다. 쌍용시멘트도 묵호항을 통해 나갔다. 외항선박이 묵호항에 정박하면 외국의 물건도 묵호에 풀렸다. 그들이 따로 챙기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묵호가 돈이 풀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최 씨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은 그의 아버지가 구입하였다. 그 후 이 집은 여러 가지로 용도가 바뀌었다. 그렇게 용도가 바뀐 원인은 묵호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최 씨 할아버지는 멀리 바다를 자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그렇게 남들처럼 얘기했다.
“묵호는 우리의 낙원이었어.”
묵호중앙시장에 사람들이 들끓고, 많은 사람들이 밤이면 즐겨먹던 선술집도 묵호의 옛 추억이다. 노가리 안주에 맥주를 먹던 추억은 또 하나의 묵호 낙원이다. 그런 추억은 이제 묵호사람들이 누리는 간식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옛 추억을 씹으며 다시 그 시절의 낙원을 꿈꾼다.
(이 내용은 동해시 묵호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작성하였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의 사업으로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