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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4:1-25
찬송가 187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악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1-17)
23장에서 욥이 탄식했던 까닭은, 하나님을 만나 호소하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날 방법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그간의 자초지종을 말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자신의 무죄를 확인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욥이 처음에는 세 친구와의 논쟁에 격렬하게 참여했지만 대화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비난과 충고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대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성찰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당장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는 중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모르지 않으시며, 이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연단의 과정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인 24장은 23장에 이어진 욥의 답변으로,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인과응보의 원리가 필연적으로, 반드시, 도식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한 데 대한 욥의 생각을 밝히는 부분입니다. 욥은 악인이 반드시, 언젠가 벌을 받겠지만 그 벌을 받게 되는 시점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1-4)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여기에서의 “때”와 “날”은 악인들이 심판 받는 날을 말합니다. 반드시 도래하겠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엘리바스가 15장 23절에서 말했던 “흑암의 날”과 소발이 20장 28절에서 말했던 “진노의 날”이 바로 그날, 악인들이 심판 받는 날입니다. 욥은 악인들이 심판 받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악인들은 전능자를 의식하지 않은 채, 악의 실현에 골몰한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반드시 피해자를 양산합니다. 그들이 윤택하게 살기 위해 어렵고 가난한 이들이 힘겹게 생산한 재화를 힘과 권력으로 빼앗는 여러 양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 약자는 얼마 가지지도 못한 것조차 빼앗기기 때문에 더더욱 빈궁한 처지로 내몰리게 됩니다.
악인은 2절에서 자기 힘을 무기로 땅의 경계표를 임의로 옮겨 다른 이들의 땅을 편취합니다. 양 떼를 빼앗습니다. 3절에서 보호자 없는 고아의 나귀를 빼앗고,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과부의 소를 저당 잡아 사사로운 이득을 취합니다. 4절에서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자를 길에서조차 몰아냅니다. 누가 하나 중재하거나 막는 이가 없습니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없는 사람들은 강한 자를 피해 숨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5-8)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어려운 형편을 고스란히 그 한 몸으로 감내해야 합니다. 들나귀처럼 거칠어진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 들에서 먹을 것을 구하며 악인이 남겨둔 상품 가치가 없고 먹을 것들이 없는 포도를 딴다고 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밑바닥 인생들의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그 어려움의 양상만 다를 뿐, 본질은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없는 중에 일하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먹을 것을 구하는 끔찍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은 가진 자들의 이기적 탐욕 때문입니다. 이러한 범죄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범죄가 다음에 소개됩니다.
(9-12)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가난한 사람이 도저히 빚을 변제할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그 자녀를 부모로부터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적당히 효용이 있는 곳에 그 자녀를 돈을 받고 넘기거나 일을 시킵니다. 멀쩡한 가정을 파괴하여 부모와 자식 사이를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노예처럼 입을 옷이 없고, 먹을 물이 없음에도 곡식 이삭을 나르고,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 곡식을 타작할 때 이용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신명기 25장 4절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수확할 때 동원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것입니다만 그렇게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예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주변에 모든 것이 풍족한데도 가난한 이들은 정작 주리고 목마른 상황이 계속됩니다.
만약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주장대로 도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삶에 적용된다면, 이러한 악이 심화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그들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날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없는 악인들이 버젓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빛이 비추어주는 바른 길을 13절처럼 가려고도 하지 않고, 머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비추어주시고, 바른 길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기대어 악행을 저지릅니다. 14절에, “밝을 때에 일어나서”라는 말은 해가 밝아오려는 새벽 아침을 뜻합니다. 새벽 여명이 비추이고, 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여 정신이 가장 몽롱해 있을 때에 일어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또 밤처럼 어두운 때에 도둑 같이 되어 약탈한다고 말합니다. 15절처럼 어두워지면 자신의 성적 범죄를 은폐할 수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어둠을 틈타서 악한 일을 꾸미는 사람은 빛이 있는 낮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문을 잠그고 있으므로, 빛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긴긴 밤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부터 돋는 아침 해는 누군가에는 희망의 상징이고, 여전히 자신을 돌보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지만 악인들에게는 그저 존재를 은폐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그 삶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맞이하게 될 삶의 결말이 이어서 소개됩니다.
악인들의 심판(18-25)
(18-20)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빛을 싫어하는 악인들이 맞이하게 될 삶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물 위를 흐르는 부유물처럼 빨리 사라질 것이고, 그들의 소유가 세상에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포도원이 버려질 것이고, 가뭄과 뜨거운 더위가 눈 녹은 물을 증발시키듯이 악인들도 오늘 건재하는 듯하지만 이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누렸던 삶이 기억되지 않을 만큼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산고를 감수하며 자식을 낳은 어머니는 절대로 자식을 잊을 수 없지만 그 악인을 품었던 어머니가 그 존재를 잊을 만큼 비참한 삶의 귀결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악인이 반드시 심판 받는다는 말은 성경에서 거듭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 진리를 오용했습니다. 이렇게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 욥을 보니, 욥이 이런 심판을 받을 만한 과오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며, 하루 속히 회개하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했습니다. 빌닷이 8장 12절부터 15절까지 언급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의 길은 새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안 된 풀이 일찍 마르는 것처럼 속히 망한다고 했고, 여기에 대항해서 욥은 21장 7절에서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라고 반문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끝까지 악인이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신속하게 멸망하게 되겠지만 1절에서 말한 대로 악인이 망하는 날과 때는 모른다는 것이 욥의 생각입니다. 욥이 하고 싶었던 말이 제일 마지막에 소개됩니다.
(22-24)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악인들이 악행을 아무리 저질러도 당장은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지해주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살피십니다. 그들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하지 않고, 천대 받을 때가 도래하며, 뿌린 악을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악인들이 곡식 이삭처럼 잘릴 때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마13:25-30)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당장에 악인이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손을 놓고 지켜보시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이든 악인들은 자신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들의 죄악이 그 땅에 가득하기까지 40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추수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두어 자라게 두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추수의 낫을 휘두르게 되면, 신속하고 정확하게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계14장).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 속에서, 친구들의 강경한 권유를 받아들여, 짓지도 않은 죄를 거짓 자백하지도 않았고, 비록 고난 중에 있다고는 하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성급하게 수정하려고 들지도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께 집중하고 묵상하면서, 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알아가고 있으며, 아직 다 깨닫지 못하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두 손 들어 고난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인생 가운데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살아가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런 염려 없이 태평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남이 모르는 내 구두 속 발을 아프게 하는 돌맹이 한두 개쯤은 갖고 있는 법입니다.
굴곡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굴곡을 통해서 욥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인생의 주름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남모를 상처로 고통 받지만 그 쓰라린 상처를 통해 자기 아들을 아낌 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조금씩 눈을 떠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 기업이 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에 대해 고백하게 됩니다.
원인 모를 고통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욥에게는 38장이 되어서야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은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욥과 함께하시면서 지켜주셨고, 완전히 낙심하여 자신을 죽음 가운데 던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고통받는 그 현장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건 자기 백성을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바로잡으신다는 믿음으로, 오늘 나를 통해 예수의 생명을 가득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넉넉히 상황을 이기는 믿음 주시기를, 환경에 함몰되지 않는 믿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욥의 때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나 여전히 부조리가 가득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언젠가 도래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이 정글과 같은 세상 질서를 절대화하며, 이것이 전부인 양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걸음을 내딛는 하루와 인생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우리의 기업이 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만을 목적 삼아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악인들의 악행으로 소개된 예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2-9)
2. 악인들의 악행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어떻게 소개되어 있습니까? (10-12)
3. 악인들이 맞이할 최후가 어떠하다고 말합니까? (18-22)
4. 결국 욥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1, 23-24)
(작성: 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