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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3장은 옛적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관계입니다.
옛적에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아들로 말씀하시는 오늘날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던 이스라엘처럼
마음이 완고하여 우리 안에서 들리는 오늘 날의 주의 음성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십니다.
히4장은 안식에 들어가는 말씀입니다. 어떤 교수가 말씀을 좀 많이 안다고
당신들은 왜 안식일이라고 한 날을 정하여 지키며 십일조를 내느냐 따지며
당신들이 율법주의자냐 하고 물어요. 그래서 지금은 안식일은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 안식은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가 안식은 천당이나 가야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완성된 안식이야 몸이 죽은 다음에 얻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의 안식일은
없어져도 오늘이라 하는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안식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몸이 안식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 1절 이후에 있는 일곱째 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 날이 바로 안식이라는 겁니다. 그 날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은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도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어둠에서 빛으로 옮겼고,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영원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항상 그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하길 나는 할례나 무 할례나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라(갈6:14-15)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내가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안식도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안에서 얻는 안식이 중요한 겁니다.
신약에서 다른 성경도 많이 보아야 하지만 특별히
네 권(마태, 요한, 로마서, 히브리서)을 공부 많이 하시되
공관복음 중에서 마태복음 그 다음 요한복음이 중요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다 들었습니다.
육성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 말씀이므로 성령이 아니면 들리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바 되었다고 했습니다(요일1:1)
이 말씀은 택한 백성에게만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은 예수님의 기적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너무 어렵다고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이까(요6:68)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택한 백성만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듣기만 하여도 이해가 되는데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읽으면
재미가 있는데 로마서만 읽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읽으면 재미가 있는데 에베소서를 읽으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진정한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요한복음이 영원한
복음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요한복음부터 열립니다. 영접하는 사건이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생명을 얻는 사건이 요한복음부터 일어납니다.
만약 요한복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굉장한 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4장,15장,16장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유언인 다락방강화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증거가 바로 그 이름으로 보내신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영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은 없고 상태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이 가난하단 말입니다.
영혼이 가난하다 이 말은 성령에 대해 배고프다 이 말입니다.(poor in the Spirit)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영의 배고픔을 느끼고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므로 영의 배가
항상 불러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영의 배가 고프면 힘을 못 씁니다.
영의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의 배가
고픈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주기도의 내용은 생활비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영의 배가 고프고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상태가 되면 그 다음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서히 되어갑니다.
영의 배가 고픈 줄 모르고 무엇을 할까 하고 덤비니 온전함이 이뤄지지 못합니다.
영의 배가 갈급하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노래합니다. 목자는 먹이시고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나를 생명의 떡과 생수로
먹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함은 그 분이 나의 영혼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롬8:9)
마지막 때가 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요한 1서 4장 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in the flesh) 임하시는 걸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그 아들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
성령 받는 비결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갈3:2)
인간들이 성령 운동한다고 설치는 건 잘 못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침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이 임하여 우리 안에 역사를 하십니다.
'말씀이 가까워 내 마음에 있고 내 입에 있으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8-9) 바로 그대롭니다.
성령을 찾아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고 땅 속을 파헤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믿으면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만 아니라 아담 안에 죽었던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죄로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구원받은 사실을 듣고 그대로 믿으면 구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겁니다.
다만 성령 충만은 거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진리의 복음을
듣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고백하고 시인하며 우리가 그분에게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찬송이시여 라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을
성령이 보증해주시면 우리 안에 확신과 담대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부지런히 성전의 도구를 만들었지만 기름을 발라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듯이 우리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집을 지어서
반드시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겁니다.
로마서는 개인구원에 대한 확실함이며 나와 다른 나의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 중에 하나란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옛사람은 언제나 버림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입니다.
번데기가 나방이 될 때에 알맹이만으로
나방이 되고 껍데기는 허물 벗듯이 버립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고 먼저 우리 자신이 이중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으로 살면 겉사람은 그냥 따라 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더불어 교제하는 가운데 살면 육체는 따라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죄가
없습니다. 마음의 전쟁에서 육체의 오감으로 그대로 살 것이냐?
우리의 영이 주님의 뜻을 받아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을
다스려서 우리의 육체까지 다스리느냐? 싸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은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또 하기 싫으면서도
악을 행하고 마는 존재입니다(롬7장) 이것을 로마서 8장에 들어와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이겨야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이기는
방법은 그 안에 있는 영의 생각입니다. 신앙의 가장 좋은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어서 차근차근 차 올라오면 어느덧 자신을 정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주변을 사랑으로 섬기며 다스리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여기서 뛰어난 평강이란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각이 내 생각을 열납 하시는 것이 바로 기도 응답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성경 전체를 집약 축소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히4장에선 말씀과 안식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아멘~아멘~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함께 주를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