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6.
명당
가을 하늘이 새파랗다. 드문드문 보이는 양털 구름인지 양떼구름인지 모를 하얀 구름 때문에 하늘은 더 높고 더 파랗다. 송정마을에서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17구간은 걷기 좋은 고갯길 3개를 넘으면 숲길이 끝나고 구례동중학교 북편의 동평뜰을 만난다. 남쪽으로는 멀리 백운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아래 간전면 마을이 올망졸망 모여있다. 시야가 멀리까지 트이니 속이 시원하다.
가을은 풍성하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봉감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동평뜰에는 감밭이 줄을 잇는다. 대충 훑어봐도 알만하다. 관리가 잘 된 감밭과 먹음직한 감에서 농부의 땀과 정성이 보인다. 정갈한 전원주택 세 채를 지나는 중에 걸음을 따라 은목서 향이 짙었다 연하기를 반복한다. 하늘이나 땅에서 부족함이 없으니 가을은 참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다. 그래서 가을인가 보다. 3시간 정도를 걸었으니 넉넉히 쉴 장소가 필요하다.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내리는 두 개 골짜기 사이에 너른 들판이 동평뜰이다. 남쪽으로 약간의 경사가 있는 언덕배기 들판은 볕도 좋고 바람도 고마운데다 전망까지 좋다. 여기가 쉬어갈 곳이다.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단감 몇 조각을 씹는다. 물도 달고 감도 달다.
여기가 명당이다. 생전 처음 온 곳이지만 퍼질러 앉은 이 자리 주변이 낯설지 않다. 마음이 편하다. 남들이 말하는 조건에 하나를 더했으니 최고의 터다. 내가 작은 오두막 하나 짓고 말년을 살아도 될 법한 명당이다.
산천재에 가본 적이 있다. 산청 덕산에 가면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의 유적이 있다. 회갑의 나이에 지리산 천왕봉 아래 터를 잡고 산천재를 지어 후진을 양성한 곳이다. 남서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 2개와 가운데 마루가 있다. 툇마루에 앉아 고개만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면 어머니의 산 지리의 최고봉 천왕봉이 떡하니 버티고 섰다. 남명에게는 최고의 명당이었을 것이다.
지리산은 큰 산이다. 전라남도 구례, 전라북도 남원, 경상남도 함양, 산청, 하동 등 다섯 개 시도에 걸친 1억 3천 3백만 평이 넘는 엄청나게 큰 산이다. 1,915m 천왕봉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1,732m의 반야봉과 1,507m 노고단 등이, 동쪽으로는 1,875m의 중봉과 1,640m의 싸리봉 등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이다. 이리 높고 넓은 산에 명당이 몇이나 될까?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테니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을까?
공기가 달다. 턱을 내밀어 들고 눈을 감는다. 이 땅을 사거나 여기에 나의 산천재 하나 지을 정도의 여력도 없다. 그러나 꿈도 꾸지 않으면 희망조차 없을 테니 이왕이면 크게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