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천왕사 주지 일로 스님
“홍경사 범종 소리, 성환 일대 훑고 서방정토로 뻗는 ‘그날’ 올 것!”
유년시절 사지 옆서 살아 선친, 갈기비 ‘애지중지’
경산 스님 사지복원 희망에 “땅 한평도 없다” 반문만
박완주 의원 “창건 999년”에 “이제껏 뭐 하며 살았나.”성찰
‘갈비문’에 상세 정보 담겨 “완벽하진 않지만 복원가능”
작은 공간 하나만 조성돼도 목탁소리 끊이지 않을 것
“나는 주춧돌 놓는 사람 후학이 대작불사 이을 것”
봉선홍경사 복원 원력을 세운 일로 스님은
“종각에서 울린 범종 소리가 성환 일대를 훑고
서방정토로 뻗어 나가는 환희 차오르는 날을 상상해 본다”며
“그 풍광의 해질녘을 본 시인들의 시어 선택은
‘시름’이 아니라 ‘장관’일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가을 풀숲에는 지난 왕조의 절(秋草前朝寺)/
남은 비석에는 한림학사의 글(殘碑學士文)/
천 년 동안 물은 흘러가고(千年有流水)/
해질녘 돌아가는 구름을 보네(落日見歸雲)’
(백광훈(1537∼1582)의 시 ‘홍경사’)
고려의 왕자 안종(安宗·?∼996)은 불법의 대의를 전하고자
큰 절 하나를 세우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다했다.
그 꿈, 아들 현종이 실현시켰다.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으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 불사를 일으킨 고려의 8대 왕인
그 현종(顯宗·재위 1009∼1031)이다.
충남 직산에서 가까운 지금의 성환읍 대홍리에 터를 정하고
1016년 불사를 시작하여 200여 칸 규모의 절인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와 80칸의 객관(客館)인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을 1021년 완공시켰다.
절 이름 앞에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킨다’는
봉선(奉先)이 나오는 건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공주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일어난
망이·망소의 난(1174) 때 화염에 휩싸이며 사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폐사됐다.
1000년의 역사를 증명하는 봉선홍경사갈기비(奉先弘慶寺碣記碑·국보).
현재는 대찰의 흥망성쇠를 지켜 본 봉선홍경사갈기비(奉先弘慶寺碣記碑·국보)가
무너져 내린 작은 탑과 함께 외로이 서 있다.
비문은 고려시대의 ‘해동공자’로 칭송받던 당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지었고, 국자감승을 지낸 서예가 백현례가
해서체로 써 내려갔다. 안종의 원력과 현종의 의지,
창건 배경과 객관을 부속 건물로 둔 이유,
사찰의 성격과 규모와 위치, 불사 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갈기비(碣記碑)는 봉선홍경사 불사 회향 5년 후인
1026년 세워졌는데 그 양식 또한 매우 독특하다.
석비(石碑)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갈비라 하는데
대부분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얹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거북형 받침돌의 머리는 어용이고,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했다.
묘하게도 어용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고 싶은 듯,
옛 고려를 기억해 내고 싶은 듯,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곳을 지나던 옛 묵객들이 시를 짓곤 했는데
조선의 시인 백광훈의 시가 유명하다.
아울러 조선 후기의 문신 신익상(1634∼1697)의 ‘홍경사’ 또한 절창이다.
‘폐허 된 사찰엔 이름만 공허하게 있고(廢寺名空在)/
황폐한 비석엔 글자만 남아 있네(荒碑字獨留)/
배회하여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徘徊人不見)/
요락한 저물녘 구름에 시름겹다(寥落暮雲愁)’
천안 천왕사 주지이자 충남불교전통문화보존협회장인
일로(一蘆) 스님도 해질녘이면 이 사지를 자주 찾는데
가슴이 미어지곤 한다. 그것은 유생의 백광훈·신익상과는
다른 감정 선에서 일어나는, 허무와 아쉬움이 동반된 미묘한 감정이다.
어렸을 때, 갈비가 남아있는 사지 옆 20미터 부근에서
작은 집 하나 얻어 살았더랬다.
선친인 경산(鏡山) 스님은 갈기비를 애지중지 보듬으며
주변을 말끔하게 청소했다.
천안에 자리한 천왕사에 주석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갈기비 서 있는 사지로 가서는 떨어진 휴지 조각 하나라도 주웠다.
경산 스님은 혼잣말처럼 “봉선홍경사를 복원해야 하는데!”라고
읊조리곤 했는데, 마치 일로 스님 자신 들으라고 하신 말씀인 듯싶어
“땅 한 평 없는데 어떻게 복원할 수 있습니까?”라며 반문했다.
애써 외면하는 일로 스님의 기억에서 갈기비는 서서히 지워져 갔다.
2020년 12월, 일로 스님은 망이·망소이 난 때
몰살당한 스님들과 백성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와 함께
봉선홍경사 창건 999년 기념식을 봉행했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일으킨 원력도 대중에게 전했다.
작은 숲의 규모로 남아 있는 봉선홍경사 사지.
“지금 봉선홍경사는 흔적마저 사라졌지만 999년 전
이곳에 도량이 섰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우리는 또 다른 1000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봉선 홍경사가 복원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사부대중의 원력을 모아낼 것입니다.”
2021년 10월에도 ‘천안 봉선홍경사 창건 1000주년 기념
천도문화제’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꽃이 활짝 피기를 축원한다”며
복원의지를 더욱 굳게 다졌다.
무엇이 일로 스님을 통째로 흔들었던 것일까?
“박완주 국회의원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2020년이
봉선홍경사 창건 999주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박 의원이 불교계에서 작은 기념법회라도 열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권하더군요. 의정활동 만으로도 여념 없으실 분도
기억해 내는 불교사를 사지(寺地)에 살고 있던
저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니! 한 방 크게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절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껏 뭐 하며 살았나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갈기비에 새겨진 글과 관련 연구 자료들을 탐독해 갔다.
목종의 모후로서 섭정에 나섰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후사로 삼기 위해 사생아로 태어난 현종을 핍박했고
끝내 강제로 삭발염의 시켜 절로 보냈다.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新穴寺)에 머무를 때도
그의 제거를 위한 암살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스님들의 보호로 위기를 모면했고 급기야 왕위에 올랐다.
불교계의 비호를 잊지 않은 현종은 즉위 직후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황룡사 탑을 수리하는 등 친 불교정책을 유감없이 펼쳐보였다.
왕위에 오른 후 제일 먼저 창건한 절이 봉선홍경사인데
그의 대표 왕실원당으로 손꼽히는 개성의 현화사(玄化寺)보다
2년이나 앞서 문을 열었다. 왜 성환인가?
서경(西京·개성)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지방세력을 흡수하기 위한 방편 즉 왕권강화 차원에서
직산현의 성환에 원당을 지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설득력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전란과 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민심을 달래는 동시에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천안부를 설치하고
성거산 아래에 천흥사를 창건했다. 현종의 뜻과도 맥이 닿는다.
이후 옛 천안과 성환, 직산, 광덕 등을 포함한
지금의 천안시 일대에는 사찰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다수의 고려 유적유물이 이곳에서 발견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일로 스님은 갈비문에 새겨진 안종과 현종의 불심에 초점을 맞춰가며
봉선홍경사의 자취를 그려나갔다.
“부처님께서는 중생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7개의 비유를 들어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셨습니다.
화성유품(化城喩品)의 ‘화성(化城)의 비유’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전에서는 성불하는 곳을 보소(寶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보소를 향해 가던 사람들이 잠시 멈췄습니다.
머물고 있는 곳은 너무도 험하고 삭막한 곳입니다.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고 후퇴할 것을
염려한 인도자가 한 성곽을 순식간에 변화시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습니다.
이렇게 변한 곳이 화성(化城)입니다.
여기서 휴식하며 힘을 길러 보소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성보로 가는 길목의 중간 기착지인 셈입니다.
따라서 화성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두 해석이 가능합니다.
결코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화성입니다.
성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곳,
의욕 충만한 화성입니다. 성불의 힘을 응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 상으로는 전자에 무게가 실리지만
현실세계에서는 후자에 방점이 찍힙니다.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피안에 이르는
중간적 역할을 담당하는 곳은 사찰입니다.
신라의 심묘사와 숭복사, 고려의 보원사를 화성이라 한 것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안종이 꿈꾼 화성을 현종이 실현시킨 겁니다.”
사찰과는 별도로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을 함께 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사찰재정을 위한 숙박사업 하라고
80칸의 객관을 지은 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도 갈비문의 행간에 배어있습니다.
‘짐(효종)은 곧 그 뜻(안종)을 잘 계승해 영원히
그 성공을 보아야 할 터인데,
한 가지는 길 가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 있으니
험난한 땅보다 걱정스러운 곳이 없으며,
또 한 가지는 곧 스님을 모아들여서 불법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니…’
고려시대의 사찰은 종교기능만 수행한 게 아닙니다.
재해가 발생하면 지역민들에게 곡물이나 종자를 전하는 등
위기극복을 위한 구휼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사찰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편의시설 제공과 기도를 올리며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봉선홍경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로 스님은 봉선홍경사의 대민·구휼 역할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불교의 존재 이유가 성불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입니다.
성불한 후에나 우리 이웃의 삶을 살펴야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 살펴야 하고 여기서 자비행을 펼쳐야 합니다.”
무너진 탑이 사지의 쓸쓸함을 더한다.
사지복원은 예삿일이 아니다. 충청권의 사지만 해도 374개소다.
재정문제만 아니라 고증이 어려워 시도조차 못하는 사지가 수두룩하다.
“절의 성격과 규모, 위치 등을 명확히 모르기 때문에 첫 삽조차 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갈비문은 이 모든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법당, 불전, 대문, 행랑 등 200여 칸을 세웠고’ ‘불상을 모신 불전,
불경을 봉안한 경루는 화려하고 기이해 도솔궁인 듯 하고,
종과 탑은 장엄해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객관은 절의 서쪽에 마주해 세웠는데, 한 구역이 80칸쯤’ 되었고
‘겨울에 사용될 따뜻한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널찍하고 시원한 방’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상세 설계도는 아니지만 청사진 정도는 나와 있으니
시도해 볼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일로 스님이다. 그러나 뚫어야 할 난관은 부지기수다.
국가지정문화재 특히 국보가 존재하는 사지복원은 여느 사지복원보다 훨씬 어렵다.
더욱이 사지로 추정되는 갈비문 주변 일대는 모두 절대농지이기에 발굴 작업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맞습니다. 대부분의 학계 전문가들과 관계부처 사람들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손사래부터 치고 봅니다. 그러나 옛 선지식이 말씀 하셨습니다.
‘원력을 세우면 이뤄진다!’ 저는 ‘땅 한 평’이라도 살 겁니다.
작은 임시 법당이라도 세울 수 있으면 염불·목탁소리 끊이지 않게 할 겁니다.
대웅전이 서면 사지복원의 반은 이룬 것입니다. 주춧돌 하나라도 놓으렵니다.
제 목숨 다할 때까지도 못하면 후학들이 이어가리라 믿습니다.
봉선홍경사의 종각에서 울린 범종 소리가 성환 일대를 훑고
서방정토로 뻗어 나가는 환희 차오르는 날을 상상해 봅니다.
그 풍광의 해질녘을 본 시인들의 시어 선택은 ‘시름’이 아니라 ‘장관’일 겁니다.”
“고난의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니 “
고통을 이겨낸 가슴에 즐거움이 깃든다”며 미소를 보였다.
안종과 현종의 봉선에 이어
경산 스님과 일로 스님의 봉선의 새로운 홍경사가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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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 스님은
1972년 천왕사에서 출가한 일로 스님은 태고종 충남종무원장,
중앙종회 의원, 천안사암연합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태고종 교육부원장이자 충남불교전통문화보존협회장이다.
2021년 11월 17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