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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약(懦弱) : 의지가 약함.
낙담상혼(落膽喪魂) : 쓸개가 떨어지고 혼을 잃음. 몹시 놀라 정신이 없음을 일컫는다.
낙백(落魄) : 뜻을 얻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하는 뜻. 곧 저서가 호평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됨을 이르는 말.
【동의어】낙양지가(洛陽紙價), 낙양지가고(洛陽紙價高).
[출전] ‘진서(晉書)’의 ‘문전(文傳)’.
진(晉)나라 시대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 출신의 시인(詩人)에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남에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일단 붓을 잡으면 장려한 시를 썼다. 그는 임치에서 집필 1년 만에 ‘제도부(齊都賦)’를 탈고하고, 도읍 낙양(洛陽)으로 이사한 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도읍 성도(成都)와 오(吳)나라의 도읍 건업(建業), 위(魏)나라의 도읍의 풍물을 읊은 ‘삼도부(三都賦)’를 10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라는 유명한 시인이 ‘삼도부(三都賦)’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과 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 ‘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저술), ‘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大詩人)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 ‘삼도부(三都賦)’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과 환관, 문인, 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올랐다(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고 한다.
낙이불음(樂而不淫) :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 즐거움이 도(道)를 지나치지 않음을 뜻함.
낙이사촉(樂而思蜀) : 타향(他鄕)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낙정하석(落穽下石) : 함정에 빠진데다가 돌까지 던진다. 남의 환란(患亂)에 다시 위해(危害)를 준다는 말이다.
낙화유수(落花流水) :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남녀 간의 그리운 심정을 뜻하기도 한다.
난사필적이(難事必作易) : 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일어난다. 쉬운 일을 신중히 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난상공론(爛商公論) : 여러 사람들이 잘 의논 함.
난상지목불가앙(難上之木不可仰) :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
난상토의(爛商討議) : 낱낱이 들어 잘 토의함.
난신적자(亂臣賊子) : 임금을 죽이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하는 자식. 극악무도한 자.
난의포식(暖依飽食) :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음. 생활에 부자유스러움이 없다.
난형난제(難兄難弟) : 누구를 형이라 하고 누구를 동생이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유사어】막상막하(莫上莫下).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덕행편(德行篇)’.
백중지세(伯仲之勢), 양상군자(梁上君子)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진태구(陳太丘)가 낭능후(郎陵候)를 지낸 순숙(筍淑)의 집을 아들 진기(陳紀)와 진심(陳諶), 진군(陳群)을 데리고 찾아갔다. 순숙은 빈약하고 검소하여 노복도 없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순숙은 어린 막내만 방에 두고 나머지 일곱 명은 전부 심부름을 시켰다.
이 때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덕성(德星)이 동쪽 순숙의 집에 다 모여 있다.”라고 했다. 한번은, 진식(진태구(陳太丘))이 친구와 어디를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렸으나 워낙 늦어 먼저 출발했는데 늦게 온 친구가 진식을 욕하자 그 때 진기(陳紀)는 이렇게 말했다. “손님께서 아버지와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하시고는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이제 오셨으니 손님과 제 아버지 중 누가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까? 그리고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욕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진식(陳太丘)을 찾아왔던 사람은 친구의 어린 아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내 사과하려 했으나 어린 진기(陳紀)는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또 한 번은 사촌간인 진기(陳紀)의 아들과 진심(陳諶)의 아들 사이에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결말이 나지 않자, 할아버지인 진식(陳太丘)에게 와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진식(陳太丘)은, "원방(元方)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季方)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원방난위형 계방난위제(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말했다고 한다.
날조(捏造) : 근거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듦.
남가일몽(南柯一夢) : 덧없이 지나간 한 때의 헛된 부귀나 행복. 【동의어】괴몽(槐夢), 남가몽(南柯夢), 남가지몽(南柯之夢). 【유사어】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단지몽(邯鄲之夢).
[출전] ‘남가기(南柯記)’의 ‘이문집(異聞集)’.
당(唐)나라 9대 황제인 덕종(德宗)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南柯) 태수를 제수(除授)받고 부임했다.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宰相)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槐安國)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남가(南柯))’에 나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구멍을 원상태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남곽남취(南郭濫吹) : 학문과 기예에 전문적 지식과 체계나 조리도 없이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남귤북지(南橘北枳) : 강남의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함. 곧, 사람은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됨을 비유.
【동의어】귤화위지(橘化爲枳).
[출전] ‘안자춘추(晏子春秋)’.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 해,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그를 초청했다. 안영이 너무 유명하니까 만나보고 싶은 욕망과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심술이 작용한 것이다.
수인사가 끝난 후 영왕(靈王)이 입을 열었다. “제(齊)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경과 같은 사람밖에 사신으로 보낼 수 없소?” 안영의 키가 너무 작은 것을 비웃는 영왕(靈王)의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예, 저의 나라에선 사신을 보낼 때 상대방 나라에 맞게 사람을 골라 보내는 관례(慣例)가 있습니다.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신(臣)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뽑혀서 초(楚)나라로 왔습니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격의 대답이었다. 그때 마침 포리가 죄인을 끌고 지나갔다. “여봐라! 그 죄인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예, 제(齊)나라 사람이온데, 절도 죄인입니다.”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다시 물었다. “제(齊)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하오?”하고 안영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안영은 초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강남에 귤(橘)이 있는데 그것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지(枳))가 되고 마는 것은 토질(土質) 때문입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있을 때는 원래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그가 초(楚)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역시 초(楚)나라의 풍토(風土) 때문인 줄 압니다.” 그 기지(機智)와 태연함에 초왕(楚王)은 안영에게 사과를 했다. “애당초 선생을 욕보일 생각이었는데 결과는 과인이 욕을 당하게 되었구려.” 하고는 크게 잔치를 벌여 안영을 환대하는 한편 다시는 제(齊)나라를 넘볼 생각을 못했다.
남대문입납(南大門入納) : 주소도 모르는 채 집을 찾거나, 또는 주소 불명의 편지.
남부여대(南負女戴) : 가난한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는 형상을 가리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있는 모습.
남상(濫觴) : 양자강과 같이 큰 강물도 그 원천은 술잔을 띄울 만한 여윈 물이었다는 뜻으로, 사물을 시초, 출발을 말함. 【유사어】권여(權與), 효시(嚆矢).
[출전] ‘순자(筍子)’의 ‘공자가어(孔子家語)’.
공자(孔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孔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은 사천(泗川)땅 깊숙이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根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남상(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孔子)는 모든 일은 시초(始初)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子路)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남선북마(南船北馬) : 남쪽은 배로 북쪽은 말로.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님.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 두보(杜甫)가 한 말로,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
남취(濫吹) :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체하다.
남풍불경(南風不競) 힘이나 기세를 떨치지 못하다.
낭자야심(狼子野心) : 이리 새끼는 아무리 길들여 기르려 해도 야수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성질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끝내는 배반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곧,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것을 감추려 해도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란 뜻. 【동의어】추처낭중(錐處囊中).
[출전] ‘사기(史記)’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낼 구원군(救援軍)으로 청하기로 하였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대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平原君)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낭중치추(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것은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병(柄))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毛遂)를 20번째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 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낭중취물(囊中取物) :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얻음. 곧, 손쉽게 얻을 수가 있다는 뜻.
내성불구(內省不疚) : 마음속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음. 즉, 마음이 결백함을 뜻한다.
내우외환(內憂外患) : 나라 안의 걱정과 외적의 침입에 대한 근심.
내윤외랑(內潤外朗) : 옥의 광택이 안에 함축된 것을 ‘내윤(內潤)’이라 하고, 밖으로 나타난 것을 ‘외랑(外朗)’이라 함. 재주와 덕망을 겸비한 것을 비유한다.
내조지공(內助之功) : 아내가 집안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다.
내청외탁(內淸外濁) : 마음은 깨끗하나 행동은 흐린 것처럼 함. 군자(君子)가 난세(亂世)를 당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 하는 처세술.
노갑이을(怒甲移乙) : 어떤 사람에게서 당한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 한다는 뜻.
노당익장(老當益壯) : 사람은 늙을수록 더욱 기운을 내어야 하고 뜻을 굳게 해야 한다.
【준말】노익장(老益壯).
노래지희(老萊之戱) : 주(周)나라의 노래자(老萊子)가 칠십의 나이에 무늬 있는 옷을 입고 동자(童子)의 모습으로 재롱을 부려 부모에게 자식의 늙음을 잊게 해드린 일.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은 똑같으니 변함없이 효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 기생(妓生)을 의미한다.
노마십가(駑馬十駕) : 둔한 말도 열 대의 수레를 끌 수 있음.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하고 태만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한다.
노마지지(老馬之智) :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
[출전] ‘한비자(韓非子)’의 ‘설림편(說林篇)’.
춘추시대 오패(五敗)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대부 습붕(柝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管仲)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노마지지(老馬之智))’가 필요하다.”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 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食水)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柝朋)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는 그의 저서 ‘한비자(韓非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管仲)의 총명과 습붕(柝朋)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노승발검(怒蠅拔劍) : 파리 때문에 성질이 난다고 칼을 뽑아 듦. 작은 일을 가지고 수선스럽게 화내는 것을 비유한다.
노심초사(勞心焦思) : 몹시 초조하게 생각하고 속을 태움.
노이무공(勞而無功) : 애만 쓰고 애쓴 보람이 없다.
녹림(綠林) : 세상을 피한 호걸들이 모인 도적의 소굴. 【동의어】녹림호객(綠林豪客). 【유사어】백랑(白浪), 백파(白波), 야객(夜客).
[출전] ‘한서(漢書)’의 ‘왕망전(王莽傳)’, ‘후한서(後漢書)’의 ‘유전(劉傳)’.
전한(前漢) 말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 일컬었다. 왕망(王莽)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 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여의 한 무리는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관고(官庫)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림지병(綠林之兵)은 5만을 헤아리는 대세력(大勢力)로 부상했는데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新)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녹사불택음(鹿死不擇音) : 사슴은 소리를 아름답게 내지만, 죽을 때를 당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가려서 낼 여유가 없다. 사람도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나쁜 소리 즉, 좋지 않은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녹음방초(綠陰芳草) : 푸른 나무 그늘과 꽃다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녹의홍상(綠衣紅裳) : 연두색 저고리와 다홍치마. 곧, 젊은 여자의 곱게 차린 복색.
논공행상(論功行賞) : 공로의 크고 작음을 조사하여 상을 줌.
삼국시대의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조예(曹叡)를 황태자로 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문제(文帝)는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조진(曹眞)과 조휴(曹休), 유교와 법에 정통한 진군(陳群), 원로인 사마의(司馬懿) 등 네 사람에게 뒷일을 간곡히 부탁했다.
문제(文帝)의 죽음은 오(吳)나라와 촉(蜀)나라에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기회를 주었다.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등극한 지 3개월 뒤 오나라의 손권(孫權)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강하군(江夏郡)을 공격했다. 태수인 문빙이 공격을 막았다. 조정에서는 응원군을 보내 문빙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명제(明帝)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를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吳)나라는 전통적으로 수전(水戰)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의 싸움에 도전한 것은 우리쪽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공수(功守)의 세력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과연 얼마 뒤 손권은 후퇴했다.
이후 오(吳)나라 장군 제갈근과 장패도 위(魏)나라를 공격해 왔지만 대장군 사마의가 선전(善戰)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장패의 목을 베었다. 용장 조휴도 오나라의 별동대(別動隊)를 격파했다.
삼국지(三國志)는 싸움이 끝난 뒤 위(魏)나라 장병들의 ‘공에 따라 나누어준 포상은 그 공에 합당하게 각각에 주어졌다(논공행상각유차(論功行賞各有差).’라고 적고 있다.
농가성진(弄假成眞) : 장난삼아 한 것이 참으로 한 것같이 됨.
농단(壟斷) : 권력을 독점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하다. 【원말】농단(籠斷).
[출전] ‘맹자(孟子)’의 ‘공손추편(公孫丑篇)’.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孟子)는 제(齊)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테니 제(齊)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농단(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壟斷)’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단(壟斷)’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농단(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 장사를 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농와지경(弄瓦之慶) : 질그릇을 갖고 노는 경사, 딸을 낳은 경사.
농장지경(弄璋之慶) : 장(璋)으로 만든 기구를 갖고 노는 경사, 아들을 낳은 경사.
농조연운(籠鳥戀雲) : 새장 속에 있는 새는 구름을 그리워한다. 곧, 몸이 속박당한 사람은 자유를 갈망한다는 뜻이다.
누란지세(累卵之勢) : 알을 쌓아 놓은 듯한 형세. 곧, 매우 위태로운 형세.
【동의어】위여누란(危如累卵).
[출전] ‘사기(史記)’의 ‘범저열전(范雎列傳)’.
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遊說)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모두 책사(策士)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찾아올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齊)나라에서 수가(須賈)보다 범저(范雎)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須賈)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范雎)는 제(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范雎)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謀士)답게 옥졸을 설득하여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張祿)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秦)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張祿)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위어누란(危於累卵))’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범저(范雎)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눌언민행(訥言敏行) : 말은 둔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
능소능대(能小能大) : 작은 일도 큰일도 능히 해낼 수 있음.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 글씨에 능한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출전] ‘당서(唐書)’의 ‘구양순전(歐陽詢傳)’.
당(唐)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 중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과 저수량,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歐陽詢)이 특히 유명했는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불택필지(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능서(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은 ‘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와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에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니취(泥醉) : 술에 몹시 취해 진흙과 같이 흐느적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