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에워싸고 있는 키가 큰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거실과 안방 그리고 부엌 창으로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가을의 푸르름 세상이다. 그런 삶의 한가운데서 오늘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더없이 감사를 느끼게 한다. 뒤뜰에는 수컷과 암꿩이 날아들어 한가로이 노닐고 있고, 나뭇가지에는 단골손님인 새들이 재잘재잘 가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생을 마감하게 되면 이 아름다운 풍경 또한 볼 수 없으리라. 그러기에 숨을 쉬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게 주어진 삶을 마음의 천국이라 여기며 자연과 벗하며 살고 싶어진다.
사실 지난 여름날 우리 집안에는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건강하시던 큰형님이 갑작스럽게 응급실에 실려 가 검사를 받고 수술까지 하게 되었고, 병명은 소장암이었다. 그 후 열흘이 지나자 세 번째 아즈버님이 그동안 동네병원만 다녔는데 큰형님의 병명에 놀라 이참에 자신도 종합병원에서 정확한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등과 배 주변으로 통증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검사결과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미 암세포가 간과 임파선으로 퍼져 있는 상태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가족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커다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큰형님은 수술을 끝내고 항암치료만 잘 받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즈버님은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과 맞서 싸워야만 했고, 그 운명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연이어 집안에 우환이 닥치게 되자 삶에 대한 허무도 함께 찾아왔다. 그동안 그토록 건강했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왔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병상에 눕다니…. 결국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은 아즈버님은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20일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족들의 슬픔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 너무나 부지런했고 집안 대소사의 모든 일에도 솔선수범을 보였기 때문에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큰 것이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일구어놓은 재산도 꽤 많은데 그거 한 푼 써보지도 못하고 69세에 영면에 드셨으니 그 인생이 오죽이나 허망한가 말이다.
고인의 장례식을 끝내고 다음 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는 전화였다. 우리 부부와 아들과 며느리도 모두 확진을 받았다. 그러니까 가족들 대부분은 코로나 확진을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사람마다 그 증상도 달랐다. 내게 찾아온 코로나 증상은 그리 고통이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후유증이 꽤 오랜 시간 날 괴롭혔다. 무기력증과 미각을 잃은 것이다. 무엇을 먹어봐도 통 입맛이 없었고 음식 맛도 쓰게만 느껴졌다.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서 일상이라는 삶 자체까지도 귀찮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인을 만나는 것도,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일도, 밖에 외출하는 일도 모두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하루하루 소파에 눕거나 앉아서 앞마당과 뒷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거의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런 시간이 더 길어지면 그게 바로 우울증 증세라는 것을. 이대로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코로나 후유증과 맞서 싸운 것이다. 때마침 남편이 애써 농사를 지은 고추가 밭에서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일부러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음식만을 찾아 먹어 보았다. 그러자 차츰차츰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부지런히 빨간 고추도 따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활기찬 에너지가 다시 몸 안으로 채워지면서 차츰차츰 예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자연에서 삶과 죽음은 순환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더 절실히 깨달았기에 뒤늦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게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문득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소포클레스의 말이 뇌리에 스친다.
잠시 단상을 하다가 이내 안방 창문을 활짝 열자, 인기척에 놀랐는지 꿩들과 새들이 금세 저편으로 날아 가버린다. 어느새 열린 문틈으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들어와 있다.
출처 : 뉴스라인제주(http://www.newslinejej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