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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32) : 마지막 권면 - 이렇게 살라!”
+ 본 문 : 요한계시록 22장 1절 - 12절 (신약성경 421쪽)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 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아멘!
오늘 본문 22장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마무리 짓는 결론 부분에 해당되기도 하고,
좀 더 넓게 보면, 신구약 성경 전체를 정리해놓은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다음 주 수요예배시간에 결론을 맺겠습니다만, 계시록 22장 20절, 21절은 성경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1절과 22절 말씀을 미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신구약 성경 66권은 이 말씀으로 모두 다 끝이 납니다.
예수님 편에서 보면 “내가 다시 오겠다.” 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성경을 끝맺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 편에서 보면,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멘!” 으로 화답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간구로 성경은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종말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신앙으로, 긴장감 속에 기대하며 살아야 하지만,
사탄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단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종말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며, 다미선교회 사람들은,
휴거한다고, 우리나라를 발각 뒤집어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지금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단들은 이름만 달리 했지, 그 내용은 똑같은 방법으로 14만 4천 –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고,
아예 이미 예수님이 재림했는데, 그 재림 예수가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선생님이라고 떠들어대고,
안상홍 증인회인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으로 재림한 안상홍과 장말자라고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천지는 이만희가 보혜사 성령으로 재림한 예수라 하고, 기독교복음선교회는 정명석이라 하고,
이런 거짓 이단들을 들라면 끝도 없습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잘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두고,
회사도 그만 두고, 퇴직금과 재산을 몽땅 정리해서 갖다 바칩니다. 소위 천국표 사는 값입니다.
우리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신앙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학교 때려치우고, 회사 때려치우고, 퇴직금에 집 팔고 전세 빼서 몽땅 바치고,
흰옷 준비하고, 그들이 말하는 시한부 종말론에 맞추어 그렇게 막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독일에 가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생가가 있는데, 그 마당에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비석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루터의 생가를 지키며 해설하는 사람에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루터가 먼저 한 말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루터가 한 말을 스피노자가,
인용한 것이랍니다. 스피노자는 1632년생이고, 루터는 1483년생으로 먼저 태어난 것이 증거랍니다.
그분의 설명대로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교개혁자다운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타락한 종교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내게 맡겨진 사명,
잘못된 교리와 신앙을 바로 잡는 일에,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가져야 자세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며 큰소리로 선포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아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후에, 곧이어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고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저주의 말씀으로 분명히 경고도 하셨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주의 재림을 잘못 인용하여 말하면 재앙을 당한다는 경고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름답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아멘!
이 신앙고백 안에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마리아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처럼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귀하게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비결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요란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저녁,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찬양을 듣기 의해 볼륨을 알맞게 조절해 놓았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에 가려고 차에 시동을 걸었더니, 자동적으로 찬양이 나오는데 소리가 너무 큽니다.
전날 밤에 내 귀에 딱 맞던 찬양소리가, 다음날 새벽에는 왜 그렇게 찬양소리가 크게 들렸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전날 밤에는 주변에 소음이 많았기 때문이고, 새벽은 고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4시간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도 본방에 종방까지, 인터넷 –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를 통한 정보들,
그래서 온갖 잡소리가 우리의 영혼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설교를 들어도 잡소리에 묻히고, 설교소리가 안 들리니 순종도 못합니다.
왜 바쁘고 분주합니까? 세상소리 따라 살다보니까 바쁩니다. 세상소리에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그렇게 바쁘게 끌려다니며 살다보니, 내 믿음에 말씀으로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없어 죽은 믿음이 되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예배시간과 기도시간과 찬송시간이 멀어지니, 삶의 기적도 변화도 없고,
그렇게 바쁘게 끌려다니며 살다보니, 새벽기도회에 나와 고요히 주님과 대화의 시간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가 되고 제일 좋은 것이 새벽기도입니다. 제게 가장 유익이 되는 시간입니다.
제가 외국에 가도 와이파이만 터지면, 새벽의 말씀을 까페에 올리는 이유도, 나를 위해서입니다.
가능하면 어디를 가든 새벽의 말씀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힘들지만 말씀을 준비하고 올립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 탈진에 빠지지 않고 나를 지탱해 나갑니다.
매일매일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사람들을 보면 영적 심장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하나님께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 붙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신앙을 가지고,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들에게 압도되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천사들이 요한에게 “우리에게 경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 천사인 우리들은 경배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경배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가 되어,
루스드라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태어날 때부터 아예 일어서지 못하던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렇게 고침 받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며 좋아합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고 경배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가 격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천사들이나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두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는 경배 받을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목사도,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 누구도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받으려 하고, 칭찬과 박수를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없이 낮아지고, 섬기는 종의 자리에서 헌신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꾸만 칭찬할 때, 처신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열심히 하는데, 목사님과 다른 성도님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칭찬 안 해 준다고,
박수 안 쳐 준다고, 항존직분자 안 시켜 준다고, 감사패 안 준다고 섭섭증 시험에 들어 있다면,
그 사람, 영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급히 깨닫고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요즘은 잘 안 부릅니다만, 옛날에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사명 찬송가가 있습니다. 323장 3절입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 믿음, 이 사명을 가지고,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 믿음, 이 사명을 일으켜 세운 한국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칭찬과 박수를 내가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모두 다 하나님께만 올려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므로 주님이 주실 상을 기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아멘!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격 없는 우리에게 공짜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믿는다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상 주심으로 갚아주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요즘 자녀들을 바로 교육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며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 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잘 되고 갈수록 더 잘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들을 잘 양육한 일로, 반드시 상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수고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 행하는 모든 수고에는 반드시 주님의 축복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헌신은, 주님 앞에서 상 주심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도 그 누구도 박수쳐 주지 않는 자리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수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헌신과 수고가 있기에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몰라주어도, 목사는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상주십니다.
리처드 펼립스라는 분이 쓴 “남자의 소명”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의 카네기 홀에서 첫 연주를하였습니다.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였기에 연주가 끝나자, 객석의 관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연주자에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빨리 나가서 앙코르 연주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는 앙코르 공연을 안 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당황한 그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그 젊은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기 왼쪽 발코니 쪽에 계신, 노인이 보이십니까?
나는 저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알코르를 외치기 전에는 앙코르 연주를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지금 저 한 분외에는 다 일어났는데, 저 한 분 때문에 앙코르 연주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자 젊은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분은 제 스승이십니다. 저분이 제 연주를 듣고,
일어서지 않았다는 것은 제 연주가 성공적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 목회, 제 설교의 성공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뭐라 해도 주님이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지 않으면, 제 목회, 제 설교는 실패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일어서서 저를 향해 웃으시며 박수를 쳐주시면, 제 목회, 제 설교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잘 했다. 수고했다.” 라며 박수 쳐주시는 목회와 설교라면, 성공한 것이 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의 사역, 여러분의 살아온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잘 했다. 수고했다.” 라며 박수 쳐주시는 신앙과 삶이라면, 성공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주님이 인정한 신앙과 삶을 살아온 우리가 기쁨으로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을 주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하고 있을 때 “잘 했다. 수고했다.” 라며 박수 쳐주시며 더 잘 하라고 힘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에,
내 인생이 끝나는 날, 영광의 내 주님께서 나를 맞아주시고, 여러분을 맞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나를 맞아주실 그 주님을 생각하며, 오늘도 내게 맡겨진 일상의 일에서, 가정을 지키는 일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겪을지라도, 참고 견디는 주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반드시 이기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천국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