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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대총동문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바람의 여신' 에베레스트
2015년 12월 16일 개봉을 앞둔., 황정민, 정우 주연
영화 '히말라야'는 해외 63 개국에 선(先) 판매되었다.
영화 ‘히말라야’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아메리칸 필름 마켓에서 프랑스 등 63 개국에 선(先) 판매.
'흥행 성적표’와 관계 없이 해외 필림 마켓 시장에서
바이어들로부터 관심을 끈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
해외 영화를 관람한 바이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 그리고 위대한 도전이
품고있는 따뜻한 이야기에서 국적을 넘어선 감동을 느꼈다”
'히말라야'는 히말라야 등반 중 생을 마감한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목숨 건 여정을 떠나는
엄홍길 대장(황정민 분)과 휴먼원정대 도전 이야기.
2015.12.16일 국내 개봉 후 미국,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 베트남, 홍콩 등에서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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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6일에 엄홍길 대장을 필두로 하는 휴먼원정대는
지난 두 달간 준비를 마치고 시신 수습을 위해 발걸음을 뗐다.
이후 엄홍길 대장과 대원들은 여러차례 시도 끝에 출발 13일 만인
5월 29일 해발 8,750m 지점에 도착해 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발견.
'그곳은 에베레스트(8848m) 정상 아래.,dead zone.
그가 숨진 에베레스트 북릉 상단 '세컨드스텝' 데드존.
데드존에서 수많은 산악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피로에 지쳐 수면을 취하다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때문.'
에베레스트 데드존에 있는 200여구가 넘는 시신들.
산악인들에게는 지리나 방향을 읽는., 이정표 역활.
이를 본 엄홍길 대장은 1년 동안 차가운 눈 속에 묻혀 있었던
박무택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곳은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는 길목인 힐러리스텝 아래 북벽.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오르는 등정자는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서 잠이 든 시신.
2004년 5월 이곳에서 숨진.,고 박무택 대원의 시신.
세컨드스텝은 중국 등반가들이 설치한 사다리 구간.
등반가들은 먼저 바위 슬랩 약 10 '(3m)를 올라야하며,
수직에 가까운 30 피트'(10m)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이 구간은 '萬 피트(3000m) 수직 절벽에 노출된다.
사다리 가로대에서 발의 위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하강할때 어려움을 겪어 오랜 정체현상을 겪는 구간.
그로 인해, 동상 또는 고혈압(AMS)
가능성을 높이는 악명높은.,짧은 구간.
세컨드 스텝
써드스텝은 또다른 암벽 등반이지만 도전적인 구간
등반가들은 이제 정상 피라미트 설벽을 올라야 한다.
강풍이 몰아치고, 극도로 추우며, 매우 큰 위험에 노출.
정상 능선(Summit Ridge)은.,500 피트(150m) 거리.
상당한(quite) 위험에 노출된 슬로프 각도 30 ~ 60도.
에베레스트 정상능선 양쪽으로 1만 피트(3000m) 직벽.
여기에서 C3로 돌아가려면, 4-6시간이 더 필요.
정상 능선(Summit Ridge) 상단부.,써드 스텝.
2005년 5월, 에베레스트 dead zone.,해발 8750m 지점.
그곳 세컨드스텝 등반을 앞둔 한 무리의 원정대가 있었다.
세계 최초로 시신 운구를 위해 그곳에 오른 18명 휴먼원정대.
1년 전 정상 등정 후 조난, 끝내 시신으로 발견된 박무택.
그리고, 백준호,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
엄홍길 등반대장과 그의 동료들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목숨을 걸고,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데드존' 해발 8750m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그들이 찾아 나선 것은 얼음덩어리로 변한., 한구 시신이지만
어쩌면 모두가 잃어버린 가장 순수한 인간성이었을지도 모른다.
.
에베레스트로 출발에 앞서 엄홍길 대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무택 대원의 시신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대한민국 산악인들과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 말했다.
"김무택 대원이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밧줄에 매달린채 세계 각국에서 온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 산악인의 한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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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2.'엘리자베스 홀리'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2016 년 6 월까지 4,669명이 등정, 모든 루트에서.,7646회 등정.
셀파 (Sherpa) 1,015 명이 3,861 회 (총 7,646 회 포함) 등정했다.
네팔 측(4,863 회)은 티베트 측(2,783 회)보다 많다.
197 명의 등반가가 무산소 등정(약 2.5 %)하였으며,
14 명의 등반가가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이동해 등반.
'1924~2016. 6' 282 명 사망(168 서양인, 114 셰르파).
109 명이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등정하려다가 사망했다.
가장 큰 사망의 원인은 낙상, 눈사태, 고산병 때문이었다.
.
2015.9.29 네팔 정부 대변인은 18세 이하, 75세 이상은
새 조치에 따라 에베레스트 등반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에베레스트 등정 최연소 기록은 13세, 최고령 기록은 80세.
네팔은 에베레스트 등반산업을 통해
매년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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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등반을 위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비난을 사고 있다.
2014년 에베레스트는 셀파 15명이 숨진 후 폐쇄된 적이 있으며,
2015년 초 18명 등반가가 산사태로 숨진후 등반 시즌이 취소됐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사람은 바로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 출신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
1920년 첫도전 이래 33년 만에 정상을 드러낸.,히말라야.
그들은 영국 원정대의 일원 이었으므로 그들의 업적과 영광은
대영제국에 귀속되어 에드먼드 힐러리는 영광의 주인공이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와 헌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였던 것.
그리고, 영국정부는 텐징에게 영국 제국의 메달을 수여.
힐러리는 원정대의 고산 등반대원 10명중 한명이었으며
텐징은 21세이던 1935년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기 위해
최초등정이후 각국 원정대와 여섯 번이나 동행한 바 있다.
1952년에는 스위스 원정대와 함께
8,610m까지 올랐던.,베테랑 셰르파.
그당시 인간이 오른 에베레스트 최고도 등정기록.
텐징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셰르파 역할뿐 아니라,
완전한 등반 능력을 갖춘 산악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힐러리는 등반 중 크레바스에 빠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힐러리를 지켜주던 생명줄이 있었다.
그 생명줄을 움켜쥔 사람이 바로 텐징 노르가이.
그순간마다 텐징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지만
로프을 놓지 않았고 힐러리의 목숨을 구했다.
이런 일로 힐러리와 텐징은 등반 파트너로서
상호 신뢰와 우정을 쌓으며 힘겨운 사투 끝에
힐러리와 텐징은 최종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1953. 5. 26. 06 : 30., 2차 공격조로 정상을 향해 출발.
산소통을 메고 최종 베이스캠프 출발 2 시간 30분 후인
오전 9시에 8,760m 남봉을 지나 마주하게 된 마지막 고비.
힐러리 스텝.
12m 가파른 바위, 그 마지막 고비.,'힐러리 계단'
정상 등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
인도와 네팔에서는 '텐징의 등' 으로 불리는 곳이다.
'힐러리와 톈징'이 정상에 머문 시간은., 약 15분 가량.
1953. 5. 29. 11시 30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두 사람.
에베레스트 정상이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낸 날이기도 하다.
.
실제로 등반 성공 후 힐러리는
온갖 위험을 함께 극복한 동반자
텐징에게 공을 돌리며 그를 영웅으로
대우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힐러리는
"텐징과 나의 공동등반"이라고 말했으며
결코 자신 만의 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동료들보다 앞서려고 하거나, 경쟁을 해서는
결코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을 오를 수가 없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팀워크를 발휘하여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움직여야만 한다." -텐징 -
" 물론 나도 혼자 힘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늘 꿈꿔 왔던 일이었긴 하지만
누구인가 다른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로 결정했다면
난 불평하기보다 남자로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산의 법칙이니까“ - 텐징 노르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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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대한산악연맹 40년사>>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상돈 산악인.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 고상돈.1977년 9월 15일 낮 12시50분.
그당시 고상돈 대원이 남봉에 이른 것은 오전 9시 30분.
바로 눈앞에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였으며 고상돈 대원은
베이스캠프 본부와 교신을 하고 산소통을 새것으로 바꿨다.
남봉 출발 3시간, 나이프 리지와 힐라리 스텝을 넘어선 후
고상돈 대원이 앞장서고 그뒤를 펨바노르부(셀파)가 따랐다.
갑자기 셀파 펨바노르부가 "거기가 정상인 것 같다"며 소리쳤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高相敦).
지금으로부터 40년전인 1977년 9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보다 6일이 앞선 9월 9일, 에베레스트 1차공격 기록.
................1977년 9월 9일., 1차 공격 기록...................
9월 9일, 에베레스트 정상을 50여 m 남겨놓고 8,790m 지점.
힐러리 스텝에서 발길을 되돌린 불운의 산사나이 박상열(73세).
당시 대한산악연맹(KAF)과 한국일보사가 공동주관한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金永棹) 대원들.
부(副)대장 박상열(당시 33세)씨는 9월 9일 1차 공격조였고
셰르파 앙 푸르바(Ang Phurba)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 공략.
그러나, 1차 공격조 2명은 눈보라 치는 악천후 속에
산소통 산소마저 떨어져 정상을 50m 남긴 지점에서
더 오르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
제2캠프(C2, 해발 6,450m)에 있던 김영도 대장은
무전을 통해 이들의 상황을 파악한 즉시 철수 지시.
박상열 부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을 눈앞에 둔채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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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8,751m)에 도착, ABC와 교신한 박(상열)부대장은
두 시간이면 정상에 다녀올 수 있다는게 박 부대장의 판단.
나이프리지 통과 후 힐러리스텝(8,800m)에 서자 산소가 떨어졌다.
오후 4시 40분. "노 옥시젼.. 헝그리.. 베리 타이어드.."
김(영도)대장의 무선 교신에 대한 '앙푸르바'의 보고.
(앙푸르바는 박 부대장과 힐러리스텝을 등반 중인 셀파)
즉시 5캠프로 내려오지 않으면 죽는다는
베이스캠프 김(영도) 대장의 외침도 허사.
힐러리스텝 통과후 10 - 20 분 가량이면 정상에 도달한다.
1차 공격때 박 부대장은.,10m 전진에 30분 걸릴 만큼 고전.
당시 마지막 힘을 내서 힐러리 스텝을 올라선 1차 공격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이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앞서가던 앙푸르바는 "여기가 정상이다" 소리쳤지만
박(상열) 부대장은 그 순간 여기서 돌아가지 않는다면
앙푸르바가 죽을지 모른다는 판단해 미련없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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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박상열 부대장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해발 8,700m 설릉에서 비박한 박상열씨가
셰르파의 부축을 받으며 제2캠프로 내려설 무렵엔
스스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발 8700m에서 셀파 부축을 받는.,박상열씨.
<눈속에 피는 에델바이스>(2000년, 수문출판사)
당시, 박상열씨의 에베레스트 데드존에서 생환기.
“9월 9일 오전 6시 앙푸르바와 제5캠프(8,500m)를 출발.
눈보라와 싸우며 오르느라, 진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낮 1시 50분 남봉(南峯, South Summit, 8,750m)에 이르렀다.
거기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는 고도 차이가 100m가 안되고
지도상 직선거리 130m, 실제로는 100m 완경사를 내려갔다가
그곳에서부터 다시 200m 가까이 올라가야 에베레스트 정상이다.
올라가는 길에 칼날 능선(Knife Ridge: South East ridge)을 지나
중간에 힐러리 스텝(8,790m)을 넘어서면 정상까지는 약100m 거리.
그런데 칼날 능선을 타기 직전에 두 사람 모두 산소통의 산소가 바닥.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생각하고 정상공격 강행.
산소가 떨어지고나자 찾아온 고통은,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지는 것이었다.
바지를 벗어 내리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몰아치는 바람과 추위가 걱정.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만큼 다급.
결국, 칼날 능선에 쪼그리고 앉아 대변을 보았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 대변을 본듯.
칼날 능선 오른쪽은 중국 티베트이고 왼쪽이 네팔인데,
네팔 쪽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티베트 쪽은 절벽.
피켈을 눈에 박고 로프를 맨뒤 티베트 쪽으로 대변을 본 것.
산소가 떨어지니 숨이 가빠지고, 기운은 빠지고,
정신도 흐릿해지고…. 50m 전진하는데 20∼30분.
가까스로 힐러리스텝에 올라섰지만 더 걷기 불가.
그때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정상까지 50m 높이를 남겨두고서 포기.
제2캠프에 있던 김영도 대장은 철수 명령.
그게 오후 4시 40분쯤이었는데, 눈보라는 계속 몰아쳤다.
나는 앙 푸르바와 자일을 묶은채 앞장서서 내려오기 시작.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자일 끝에 카라비너만 매달려오는 것.
뒤돌아보니 앙 푸르바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컴 다운!!’ "내려와~" 소리쳤지만,
앙푸르바는 괴로운 표정으로 묵묵부답.
자기 몸을 연결한 카라비너를 스스로 풀어버린 것.
‘당신은 외국에서 왔으니 살아서 돌아가라’ 말하는듯.
그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나는 30m쯤 다시 올라갔다.
쓰러진 앙푸르바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같이 비박.
랜턴도 없었기에 어두운 길을 내려올 수도 없었으므로
죽더라도 그렇게 같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사타구니 사이에 피켈을 박아 밑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고,
자일로 피켈에 몸을 묶고 비박을 시작한게 오후 6시쯤 됐을듯.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배낭과 입은 옷,
그때 앙푸르바는 자기 윈드재킷을 벗어서 내 얼굴을 감싸 주었다.
남봉 바로 아래였으니까 해발 8,700m 고도일듯.
무전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만큼.,정신 혼미.
악몽인지, 환상인지 온갖 꿈을 다 꾸며 자다 깨기를 반복.
“무당이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춤추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이원영 대원이 나타나 ‘형님, 텐트 쳐 드리겠습니다’라는 환청.
중국 사람이 나타나 ‘만두 사 주겠다’고 하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종일 먹지 못해 그랬는지 하여간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설면(雪面)을 스치는 눈가루와 바람소리 뿐.
밤새 눈보라가 잦아들고 발아래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별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고 날씨가 맑아지니
별이 손에 닿을듯 크게 보이자 별처럼 살아야겠다는 의욕.
10일 새벽 5시 발밑으로 라스트 캠프(제5캠프)가 보이기 시작.
죽지 않고 밤을 넘겼다 싶으니 다시 용기가 솟아났다.
앙푸르바와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1∼2m 간격을 유지.
라스트 캠프에 도착한 뒤 둘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우리 둘이 비박으로 밤새우고 라스트 캠프로 내려오는 장면을,
제4캠프(7,980m)에 있던 셰르파 펨바 라마가 망원경으로 발견하고
김영도 대장에게 보고해 라마와 또 다른 셰르파 1명이 산소통을 가지고
제5캠프까지 우리를 구하러 올라와 우리를 발견한 것은 10일 오전 9시쯤.
‘겟 업, 겟 업(Get up! Get up!, 일어나! 일어나!)’
그제야 잠깬 나는 산소부족 탓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펨바 라마가 가져온 산소통으로 호흡하니, 다시 보이기 시작.
이렇게 죽음의 지대에서 살아 돌아온 박상열 부대장은 귀국 후
발뒤꿈치 동상 치료를 위해 하복부 피부를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
“정상을 딛지 못한 패자의 고통에서 참된 등산의 의미를 깨달았다.”
1977년 박상열 부대장의 해발 8,700m에서 무산소 비박 기록은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의 밑바탕.
메스너는 제5캠프를 하산길에 이용해 큰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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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산악연맹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박상열씨는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의 초창기를 장식한 산악인.
1971년 로체샤르(8,400m) 해발 7,700m까지 등반.
1989년 초오유(8,201m), 1999년 캉첸중가(8,586m),
2000년과 2001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단장 & 부단장.
2017.3.14 박상열씨에게 이번 네팔 방문은 1971년 이후 16번째.
“정말 많이 변했어요. 1971년 카트만두공항은 시골역사 분위기.
이번엔 4년 만의 방문인데 차도 많아지고 공기도 더 나빠졌고요. "
"그렇지만 40년전 죽음의 지대에서 생사를 함께한
山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어요.”
박상열씨는 “죽지 않으려고 밤새 부둥켜안은 채 발버둥친
앙푸르바, 야크 몰듯했지만 나를 제2캠프까지 데리고 내려온
펨바 라마 모둔 셰르파들과도 앞으로도 옛이야기를 나누길 바램”.
고상돈의 2차 공격때 남봉까지의 눈밭은 깊지 않았다.
고상돈이 정상에 오를때 1차 공격조의 길이 남아있었고
며칠 사이 강풍에 눈이 날려 그곳의 깊은 눈밭은 얕아진 것.
"순간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정말 사실인가? 언뜻 믿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더 오를 곳도 없어 보였다." - 고상돈 -
..."해발 8,750미터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데드존!"
당시 고상돈은 정상(8848m)을 눈앞에 두고 그곳에서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을 포기하려고 할만큼 지쳐있었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고상돈 대원.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곳곳에는 소금 동굴이 있다.
3억5천만년전~ 6억년전 형성된 핑크 솔트(돌소금)
해저였던 히말라야는 지각변동으로 높은 산이 된 곳.
그래서, 해마다 조금씩 치솟는 히말라야 14좌.
한편, 히말라야 일대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
2015년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정상은
1974년 이후 41년 만에 처음 그 누구도 맞이하지 않았다.
2015년 4월 눈사태가 훓고 지나간.,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네팔 대지진으로 에베레스트의 해발 고도가 2.5㎝ 낮아졌다.
미국 GPS 연구 대학연합(UNAVCO) 과학자들은 네팔 지진으로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이동한 뒤 지각이 느슨해지면서 고도 변화.
2015년 5월 4일에 과학자들은 유럽우주국의 항공위성이
지난달 29일 에베레스트 상공에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이와 같이 설명. 에베레스트 고도는 해발 8,848m.- YTN -
2015.4.27
네팔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인한 사망사고의 영향이 컸다.
카트만두 인근 7.8 강진으로.,에베레스트에서 24명이 사망.
당시 카트만두 일대에서는 8천명이 죽고 2만1천 명이 다쳤다.
2015.5.12
지진 당시 에베레스트에 있었던.,'산악 전문 언론인' 앨런 아넷.
"네팔 정부가 공식적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위험성이 커지면서 쿰부 지역을 통과하는 등반로가 실질적으로 막혔다"
"중국 정부는 여진의 위험성 때문에 지진 다음 날부터
2015년 말까지 티베트를 통과하는 모든 등반로를 폐쇄."
2014년 쿰부 지역 베이스캠프로 눈사태가 닥쳐 셰르파 16명이 사망.
이어 2년 연속 대형 인명사고 발생으로 발길이 뜸해진 것으로 보인다.
히말라야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013년 658명이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
2015년 10월에는 일본인 등반가 구리키 노부카즈(34)가
지진 후, 최초로 도전했다가 강풍과 폭설 때문에 돌아섰다.
지구온난화로 에베레스트 기후가 불안정해지면서 발생한 일.
'아메리칸 알파인 클럽'의 필 파워스 회장.
"앞으로는 빙하 건너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
그러나, 에베레스트를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산악 언론인 아넷 "대형 인명사고가 난 1996년, 2006년,
2012년의 이듬해 에베레스트 등산객이 기록적으로 늘어나고
2014년 티벳에서 에베레스트로 들어온 외국인만 200명이 넘었다"
"등반가들은 위험을 받아들이므로 사고가 났다고 해서
에베레스트 같은 고산을 오르려는 욕망이 줄지는 않을 것.
위험성 때문에 가이드를 그만두려는 셰르파들이 더러 있지만
경제적 이익이 위험을 능가할 것" 이라고 아넷은 전망하고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에베레스트 산
2015년 등반자는 0(제로)였다고 12일(현지시간) 전했다.
'에베레스트 데드존(dead zone)' & 휴먼원정대 비화.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 중 생을 마감한.,박무택.
2005년 그 시신 수습을 위한 휴먼원정대에 앞장섰던.,엄홍길.
전세계 산악 역사 상에서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대는 최초였다.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이 등정 목표가 아닌
에베레스트 데드존(8,750m) 지점이 최종 목적지.
故 박무택 산악인 외 2人의 시신수습을 위한 원정대.
'계명대학교 창립 5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3인은 모두 다 계명대학교 산악부 선후배 사이이고
'백준호 부대장, 장민 대원' 시신 2구는., 실종된 상태.
‘엄홍길’ 대장과 후배 산악인 ‘박무택’은 2000년 칸첸중가,
K2, 2001년 시샤팡마, 2002년 에베레스트까지 히말라야 4좌를
함께 등반한 동료이자 친형제와 다름없는 우애를 나눈 관계였다.
박무택 산악인(1969.6.22~2004.5.20 : 향년 34세)
서울 출생, 계명대학교 졸업, 2005 체육훈장 맹호장.
백준호(1967년생)산악인은 국내 최초 의사자(義死者).
........백준호 의사자(義死者).........
"만약,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무택이도 나와 같이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그곳으로 갈겁니다. 그러니 나도 가야 합니다."
.
후배 박무택을 구하려 죽음을 무릎쓴.,의사자.
결국 그 곁으로 가서 그 외로운 죽음을 지켜주었고
하산길에 실종되어 죽음을 맞이한.,의리의 산사나이.
.
1968년 계양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후.,산악부원.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동아제약에 입사.
2000년 개인사업을 하면서.,히말라야 등반에 매진.
평소, 그의 별명은 호쾌한 술꾼이어서.,"백카스"
우직하고 요령피울 줄 모른다고 하여.,"미련곰탱이"
.
후배들에게 물려줘도 될 온갖 허드렛 일을 앞장서서
해치워버리고는 힘에 겨워 헉헉댈 만큼., 답답한 사내.
특히, 그는 후배 박무택과 친형제 같은 정을 나눈 사이.
........................................................................
'에베레스트 데드존(dead zone)은
티베트계 셰르파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
신이 받아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성지.
히말라야 14좌 등정은 원정대의 등반력도 중요하지만
'등반 파트너'인 셰르파 조언이 등정의 성공을 좌우한다.
그들과는 상호 존경과 신뢰의 교감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히말라야 등정 루트 곳곳마다
어디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직감으로
감지하고 조언할 수 있는., 동반자이기 때문.
단순한 짐꾼 취급을 하거나
고용인 취급을 하며 경시할 경우
자칫, 위기에서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
간혹,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에
행방불명 실종사고 또는 조난사.
네팔 히말라야 트레커 여행자들은
대부분 전문 산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트래킹 중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라마스떼(Namaste)"...............
내 안의 신이.,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
당신은 이 우주를 담고 있으므로., 존중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마음과 사랑을 다하여 예배드립니다
나는 빛의 존재인 당신을 존중합니다.
.................................................
'타인의 존재에 대한., 경외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사말로
당신 내면의 신을 경배한다'.,라마스떼
.
합장하고
티베트계 셰르파들의 일상 용어로서.,"
인도 셰르파들의 생활용어.,"안녕하세요."
...............................셰르파...............................
동부 네팔의 높은 계곡 지역에 사는 티베트 계열 사람들.
산지 생활에 익숙해 히말라야 관광객들의 안내자로 유명.
약 500년전 에베레스트 빙하계곡으로 이주해 온 유목민들.
셰르파(동쪽 사람)는 고대 티베트와 인도를 잇는 대상(隊商).
티베트에서는 소금, 양털, 보석을, 중국에서는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와서 겨울에만 네팔에서 살다가 1830년대 정착 생활을 시작.
1949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셰르파족의 무역이 쇠퇴
인도와 중국의 국경 분쟁으로 국경이 폐쇄되어 생계에 타격.
서구 등반가들과 히말라야 트레커들이 네팔로 몰려들자 가이드.
셰르파 상인들은 쌀을 지고 산을 넘어
티베트로 가서 소금과 바꾸어오며 농사,
가축 기르기와 함께 모직물을 짜서 생활.
히말라야를 넘나들던 장기를 관광 산업에 이용하게 된 것.
안내자나 포터로 '히말라야의 등반 안내자'로 인식되기 시작.
현재, 산악 안내자나 포터, 등반전문 여행사 등 관광산업 종사.
대부분의 셰르파가 대도시로 이주하여
셰르파 인구는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
네팔과 인도의 시킴 주에 사는 산악부족.
인구는 약 8만 명이며 히말라야 산맥의 짐꾼으로 유명.
1953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바로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
...............................................................................
'히말라야 산악등반 셰르파'는 단순 가이드가 아니다.
전반적인 준비상황, 등정루트 선정, 정상공격시간 결정.
이들은 설붕(雪崩)이 일어날 장소를 직감적으로 알 정도,
셰르파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드존.
그곳에 얼어붙은 100kg 무게의 시신 운구는 불가.
데드존 절벽 눈빙판에 시신이 꽁꽁 얼어붙어있는 때문.
그곳 시신의 운구는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보다도 어려운 일.
전세계 산악 역사 상, 누구도 해낸 적이 없는 일.
그러나, 대한한국의 휴먼원정대가 그 일을 해낸 것.
2005년 5월 에베레스트 데드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네팔 정부에서 받는., 1인당 입장료 2만5천불.
2005년 5월에 떠난., 휴먼원정대 대원은 총18명.
5개월간 시신수습 훈련을 거쳐.,그곳으로 떠난 것.
심장도 얼어붙게 하는., 영하 30/40도 혹한지대.
지상 위의 산소에 비해 1/3.,산소가 희박한 지대.
걸음마다 5~6번 숨쉬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곳.
'인간의 육체가 생존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
언제 어느 순간에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곳.
에베레스트 '大地의 女神' 만 존재하는.,데드존.
에베레스트 여신 '초모랑마' 안식처., 데드존.
2017년 현재, 그로부터 1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뭇 세인들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다.
2016년 히말라야 영화( 휴먼원정대 다큐멘터리).
2016년 영화관 입장권 전산망 누적관객 7,759,761 명
................히말라야 영화의.,감동적인 순간............
계명대 원정대 박무택과 장민이 정상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길에 설맹에 걸린 박무택이 장민을 먼저 내려 보내고
해발 8750m 데드존에서 홀로 구조를 기다리지만 악천후로
그 누구도 선뜻 구조에 나서지 못할 때 이미 날이 저문 상황.
백준호는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구조에 나선다.
1% 구조 가능성도 없는 자살행위 같은 상황이었다.
그후 교신이 울린 건.,다음날 동틀 무렵.,새벽 6시 경.
.
조난당한 박무택을 찾아간., 백준호(영화:박정복).
동상이 심해 죽기 직전에 처해있는 후배인 박무택 곁에서
히말라야를 함께 내려다 보며 후배의 죽음을 지켜보는 장면.
박무택은 후배 장민을 살리기 위해 먼저 하산시키고
8750m 고지 악천후 속에서 설맹에 걸려 혼자 비박 중.
베이스캠프에서는 박무택을 구하려 여기저기 도움 요청.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악천후 속에서 다들 외면한다.
이때 헬기 구조 불능지역 제3캠프(7315m)에 있던 선배 백준호.
박무택과 장민 두 대원의 정상 공격조를 지원하기 위한 제3캠프.
그곳에서부터 11시간 사투 끝에 간신히 '쎄컨드캠프를 지나
해발 8750m고지 데드존에 고립되어 있던 후배 박무택을 상봉.
그후, 그가 그곳에서 베이스 캠프와 무전으로 주고 받았던 교신.
그의 무전 교신이 베이스캠프와는.,마지막 교신.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구조가 어렵습니다." - 백준호-
백준호 대원의 포스터 사진을 타이틀로 올린 것은 바로 그것 때문.
히말라야 영화에서의 감동적인 주제는 휴먼원정대가 아닌,
후배 장민를 살리려 내려 보내고 홀로 죽음을 맞는.,박무택.
백준호는 자신이 죽을줄 알면서도 후배 박무택을 구하려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 올라간.,의리와 우정이 아닐까?
결국, 박무택의 죽음을 확인하고 내려서던 백준호는 실종된다.
일년 후, 휴먼원정대는 3명의 시신수습에 나섰으나
에베레스트 데드존에서 고 박무택의 시신 만., 발견.
하산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얼어붙은 무게가 엄청나서
티벳고원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돌무덤 안장.
세컨드스텝(8,700m)’ 바로 위에
돌과 바위로 무덤을 만들었던 것.
박무택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히말라야와 초모랑마의 신이 된 것.
...............................................
에베레스트.
티베트인들 '지구 상에서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대지의 여신"이라는 뜻으로 "초모랑마"라 부른다.
초모랑마 여신의 품에 영원히 안긴.,박무택 산악인.
'에베레스트 데드존' 초모랑마 女神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
하여,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한다는.,데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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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12월 16일 개봉된.,영화 <히말라야>
'2005년 휴먼원정대 실화'가.,영화의 줄거리.
2015년 '히말라야 영화' 5개월 촬영기간 동안
황정민과 정우 또한 ‘의리 콤비’로., 끈끈한 호흡.
이석훈 감독은 “카메라 밖에서도 친형제 같은 우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히말라야> 속
산악인의 동료애와 의리를 진정성 있게 담아낼 수 있었다”
이석훈 감독은 두 배우 연기 호흡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히말라야>의 배우들은 실제 원정대를 방불케 하는
촬영 과정을 함께 겪으며 특별한 유대감을 갖게 되었다.
촬영장소까지 걸어서 4일이 걸렸고 고산병으로 고생했다.
네팔 히말라야의 힘겨운 여정과 프랑스 몽블랑 빙하지대
그 위험을 감수한 촬영의 모든 순간들을 함께 이겨낸 배우들.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며 영화 속 원정대 같은 결속력을 다졌다.
<히말라야>의 주역들은 작년 가을 도봉산 등산 학교에서
안전벨트 착용법, 하강, 암벽, 빙벽훈련, 백두대간 산악 등반,
훈련 등 실제 원정대를 방불케 하는 사전 훈련을 거친 후.,촬영.
히말라야 영화는 제작비 100억을 투입.
2016년 한국 영화들 중에서 흥행한 영화.
영화 ‘히말라야’는 생을 마감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해발 8,750m 에베레스트 데드존으로 떠난 엄홍길 대장과
휴먼원정대 실화를 담은 영화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히말라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해발 7,300m 이상의 고봉이 30여 개나 분포한다
지구 상 8천m급 14 봉우리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인도아대륙과 티베트 고원 사이.
'아시아산맥' 지명이 곧.,히말라야.
산지 정상 부분은 만년설로 덮여 있어,
이 설원을 신성시하는 성지순례 등산가들이
이 산맥을 '히말라야'(산스크리트로 hima는 '눈',
ālaya는 '보금자리' 또는 '집')라고 부르게 되었다.
.....히말라야 14좌....
1. 에베레스산 (8,848m)
2. K2 (8,611m)
3. 칸첸중가 (8,586m)
4. 로체 (8,516m)
5. 칸첸중가 중앙봉 (8,482m)
6. 칸첸중가 남봉 (8,474m)
7. 마칼루 1봉 (8,463m)
8. 칸첸중가 서봉 (8,420m)
9. 로체 중앙봉 (8,410m)
10. 로체 샬 (8,400m)
11. 초 오유 (8,201m)
12 다울라기리 (8,167m)
13 마나슬루 (8,163m)
14 낭가 파르밧 (8,126m)
..................................
에베레스트 해발 8,000m 고도 이상은 인간의 육체가
생존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데드 존(dead zone)'.
심장도 얼어붙는 영하 30/40도, 지상의 1/3 산소 희박 지대.
비행기 안전 순항고도.,8848m 정상.
인간의 뇌를 조여오는., 극한의 기압.
한걸음마다 6번을 숨쉬게 하는.,8,749m
'신은 죽었다.' 신이 죽은 빈 자리를 '허무'가 채운다.
영원한 진리라고 믿었던 신이 죽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는 이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예고 없는 눈폭풍이 정상부를 뒤덮고
목숨 위협하는., 예측불허 극한재난 지점.
'버티칼 리미트(생명체가 살 수 없는 한계선)'
'버티칼 리미트는 어떤 곳일까?'
생물자생 불능 제4캠프.,7,925m
'헬기' 구조 불능 제3캠프.,7315m
고산병 '摩의 관문'.,제2캠프 6492m
극한 도전의 첫 관문.,제1캠프 5,944m.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사망자는.,매년 10명에서 13명.
눈사태, 고산병, 체력의 한계 등으로 죽음에 이르기 때문.
또한 사망한 산악인 시신을 수색하는 비용도 많이 소요된다.
시신을 산 아래로 이송하는 비용이.,1600만원 소요.
다시 화장장 이동 및 화장비, 마무리 비용 등이 1500만원.
그래서, 망자 가족의 형편 상, 영구히 눈속 설장으로 남는다.
얼마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에베레스트 시신들.
200여구 시신들에게는 이름이 주어졌으며, 이 시신들의 역활은
등반자들에게 지리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역활을 한다.
"녹색 장화"
위 사진 속 시신 이름은.,'녹색 장화.'
200여구 시신들이 죽음을 맞이한 까닭은
대부분 수면을 취하다가 깨어나지 못한 탓.
죽은자의 육신은 초모랑마 여신과 한몸이 되어
영원히 에베레스트 일부인 신이 되는 곳.,데드존.
세르파들은 이곳 시신 하나마다 이름을 지어 부른다.
에베레스트에서 50년전 사망한 등반가.
마치, 며칠 전에 운명한듯한 시신의 모습.
이 시신들로부터 등산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산의 방향과 위치, 지리, 사망원인 등을 파악한다.
그 원인 중에 대부분은.,수면 중 무호흡중 또는 동사.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가까울수록
동상으로 사망할 확률이 매우 높다,
시신을 통해 감지되는 그곳의 위험성.
원정대에게 사고를 사전예방케 할 만큼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드존 시신들.
셰르파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 위험요소 상황을 대변해주는.,시신.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오르는데 필요한 비용은
약 25만달러(2억5천만원)에서 60만달러(6억원 ),
극한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지불해야 한다.
에베레스트 등반자들에게 제일 힘든 경우는
죽은 시체의 주변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극한 기후의 영향으로 인해 죽은지 50년이 지난
시신들도 부패되지 않고, 화석화 되어 보존된.,데드 죤.
아래 사진은 1924년에 잠든.,조지 말로리 (George Mallory).
1924년에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
그후, 75년 만에 정상 가까운.,북면에서 발견된다
2017년 현재 93년 지났지만 거의 원형을 갖춘 시신.
바람이 워낙 거센 곳이라 살점은 거의 날아간 모습.
그를 추모하는 작은 비석 하나가.,길안내 표지판 역활.
....................조지 말로리...............................
1886년 6월 18일 ~ 1924년 6월 8일?)는 영국의 산악인.
1920년대 3번 에베레스트 산 등반 원정대에 참가하였다.
1924년 6월 제3차 원정에서 파트너 앤드루 어빈과 함께
정상을 목표로 했지만 북동쪽 산등성이 부근에서 실종.
맬러리의 최후는 사후 75년간 신비에 싸여 있었지만,
1999년 5월 1일 국제 탐색대에 의해 시신이 발견된 것.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세계 최초 등정자인지는 논란 중.
“왜 에베레스트를 목표로 하느냐?” 질문에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
1924년에 '에베레스트 정상부' 세컨드 스텝
밑에서 어빈과 함께 실종되었던 조지 말로리.
마침내 조지 말로리 시신은 세컨드 스텝 밑 북면 루트에서
오랜 세월 햇빛에 삭아 건조된 뼈만 남은채 찾는데 성공한다.
그의 삭아버린 자켓 안쪽 포켓에서 부인에게 쓴 편지.
그의 서명이 확인되었기에 그의 시신 임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의 정상 등반을 입증할 유품이 발견되진 않았다.
그래서, 그의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여부는
오늘날까지, 미궁 속에 빠져서 논란 중에 있다.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 아닐까?'
...............................
...............................
에베레스트를 단체로 오르는 도중에
동반자가 생명의 위험에 처한 경우에는
대부분 제자리에 놔두고 가는 수 밖에 없다.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에베레스트 데드존(dead zone)
'에베레스트를 단체로 오르는 중
동반자가 생명의 위험에 처한 경우에
낙오자를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표지판 역활' 시신.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계절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에베레스트 등반 중에 사망한 시신들이 종종 발견되어
에베레스트 중턱은 세계 각국 산악인들의 공동묘지로 변모.
알피니즘을 추구하다가 숨진.,산악인들의 안식처.
그 시신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에베레스트' 중턱.
에베레스트 산악인들은 그곳을 데드 존이라 부른다.
미이라가 된., 등산가.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소요되는 비용은
1인당.,약 2천5백만원에서 6천만원 정도 들기에
누구인가 도우려고 정상 등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같은 원정대 일행에게 버려졌거나
다른 원정대의 외면 속에서 죽어간 시신들.
그곳에서 그대로 에베레스트의 일부가 된 것.
동상에 걸려 죽은., 등산가.
한번은 두 산악인이 하산길에 만난.,여인.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들도 목숨이 위태로워 지나쳤다는 여인의 주검.
현재, 에베레스트에는
북면과 동남면 쪽으로
약 200여구 시신이 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산가들에게
가장 두렵고 힘든 경우를 뽑으라면
줄에 매달린 이 시신을 지나치는 것.
'에베레스트' 중턱은
산악인들., 공동묘지化.
시신 한구 한구 이름을 가지고 있고
길잡이 역활을 하는 표지판으로.,사용.
대지의 여신 '초모랑마' 품에 안긴.,
데드존(dead zone)., 200구 시신들.
하여,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하는 이곳.
고정 로프에 고정되어 있는.,고 박무택.
당시 캠프3에서 구조차 올라온.,백준호 대원
그리고, 셀파(니마/누리)들이 떠나기 전에 한듯..
에베레스트 북면 8700m 지점.
오은선 산악인이 촬영한.,사진.
당시, 오은선 산악인이
촬영한 사진이 없었다면
휴면원정대는., 없었을 것.
아울러, 故 박무택의 시신은
고정 로프에 고정되어 있는채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었을듯.
2004년 5월에 에베레스트를 등반 중인 계명대 원정대(단장 김상홍)
박무택 등반대장(37세), 백준호 원정부대장(38세)· 장민 대원(27세).
등 3명 대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해, 국내 산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 조난 상황은 베이스캠프에서
위성전화로 국내에 수시로 전달이 되면서
긴박감을 더했던., 에베레스트 최악의 산악사고.
그날 에베레스트에서는 8팀의 원정대가
짙은 눈보라에 갇히는 조난사고를 겪었다.
계명대 원정대 조난사고도 그중 하나였던 것.
5월 18일 한국시각 오후 1시 15분 정상 등정에
성공한 박무택 대장과 장민 대원은 8300m 지점.
캠프5로 하산하다가 3시께부터 긴박한 상황에 직면.
박 대장은 산소 부족으로 생기는 설맹 비슷한 증세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장민 대원은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단둘 만이 그곳에 함께 있으면, 둘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박 대장 : 살려면, 지금 너 혼자라도 내려 가."
장 대원 : 형을 두고 나 혼자 내려 갈 수는 없어.
박 대장 : "네가 얼른 내려가서 구조대를 올려보내야 할꺼 아니야.
장 대원 : "형 혼자서 어떻게 견디려구? 형을 두고 나 혼자는 못가."
박 대장 : " 대장으로서 명령이야! 어서 가. 임마."
장 대원 : "알았어. 내려가서 구조대와 함께 올께.
박 대장은 자신이 혼자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선배로서 사랑하는 후배만이라도 살리고 싶었고
장 대원은 박 대장의 그러한 속마음을 알고 있기에
그곳에서 머물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
오후 6시 무렵에야 박 대장은 장 대원을 먼저 내려 보내고
자신은 비박하겠다는 무전을 날렸는데 혼자 하산하던 장민은
‘세컨드 스텝’ 아래에 있다는 교신을 보낸 후, 연락이 두절된 것.
에베레스트 쎄컨드스탭 위.,데드존
'세컨드 스텝'은 에베레스트 데드존 아래 급경사 지역.
장민 대원이 그곳을 무사하게 통과했기에 캠프 3에 있던
백준호 부대장은 그들을 구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일단 판단.
이날 캠프3 출발해 캠프5에 19시께 도착한 백준호 부대장은
셰르파 두 명과 함께 이들을 구조하려고 현장으로 출발했지만
셰르파들은 불가능하다면서 밤 22시 경에 3캠프로 되돌아간 것.
캠프5에 혼자 남은 백 부대장은 이튿날 19일 15시께
박 무택 대장과 합류해 하산 중이란 교신이 마지막이었다.
백 부대장은 장민을 못만난채 데드존 박대장 곁까지 올라간 것.
.
그후로 백준호 부대장으로부터는 소식이 끊어졌다.
한편 캠프3에 대기 중이던 셰르파 두 명이 이날 16시에
두 대원을 구조하러 올라갔으나 자정 무렵에 되돌아왔다.
그러다가 20일 한국 시각으로 12시 30분께 에베레스트
단독 등반 중이던 오은선(영원무역)씨가 ‘세컨드 스텝’
바로 위인 8750m 지점에서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발견.
계명대 원정대본부 베이스캠프로 이 사실을 알려왔던 것.
2003년 5월에 이미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박종관(서울시 연맹 등반기술 위원)씨.,말.
“높이 약 25m에 이르는 ‘세컨드 스텝’은
상단은 거의 직벽이고 하단도 경사가 70~80°
날씨가 안 좋으면 하강하기가 무척 어려운 곳.”
한편 학교 측은 실종된
백준호 부대장과 장민 대원이
21일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계명대 - “중국 서장 자치구 등산협회가
이날 현지 시각인 오전 8시 30분께 백씨와
장씨가 8450m 지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고 주중 한국대사관이 전했다”
중국이 한국대사관을 통해 계명대에 팩스로 보내온 자료
21일 현지시각 오전 2시께 에베레스트를 오르던 한 등반대가
백준호 부대장과 장민 대원의 시신을 발견해 중국에 통보한 것.
계명대는 사고수습본부를 구성하고
19일 저녁 하찬수씨를 현지로 급파하는 한편,
자세한 시신의 위치 등을 파악, 현지 구조대와 협조해
조속한 시일 내 3인 시신 수습과 운구에 나설 계획이었다.
또 대구 동산의료원에 합동분향소 설치.
원정대가 도착할 때까지 운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어느덧 1년의 세월이 지났다.
에베레스트 원정 역사 상에서
데드존에서 시신을 수습하거나
시신 운구 사례가 전혀 없었던 탓.
에베레스트 정상을 목표로
목숨을 걸고 올랐던 원정대들은
세계 산악 역사 상, 수없이 많았지만
동료 시신수습을 위한 원정대는 없었다.
정상 등정도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살아서 내려오기도 힘든.,에베레스트.
'그곳에서의 시신 수습이 가능할까?'
정상까지 오르는데 필요한 비용은 대략 25만~60만 달러.
2억5천만~ 6억원 외 극한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지불.
이곳 등정자들에게 가장 힘든 경우는 데드존을 통과하는 것.
'죽음의 지대' 데드존에는 여기저기
산악인 시신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산 중 이곳은., '생사의 갈림길'.
데드존 바로 아래에는 하산길을 가로막는
에베레스트 최난 구간.,‘세컨드 스텝’(8,600m).
악천후에서는 데드존에서 하산 루트가 막히는 탓.
해수면보다 1/3 정도., 희박한 산소지대.
심장도 얼어 붙는., 영하 30~40도 혹한지대.
가만히 앉아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운.,사각지대.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5~6번 숨을 몰아 쉬다보면
심장이 얼어붙게 되는.,데드 존.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
에베레스트를 단체로 등반하는 도중에
동반자가 생명의 위험에 처한 경우에는
그냥 데드존에 버리고 가는 수 밖에 없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절 이곳에 버리지 마세요."
조난자의 절규를 듣게 되더라도
다른 팀의 등정자들은 그들 목숨 또한
위험해질 가능성이 커 외면하는.,데드존.
에베레스트 해발 8,750m.
'데드 존'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신의 영역'.
정상 공격에 실패했거나
하산길 악천후에 고립되어
그곳에서 죽어간 산악인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있는.,데드죤.
2004년 사고로 그곳에
우리 동료가 묻혀있다.
산 아래에서는 하나였고,
또 다른 가족이었던 동료들.
에베레스트 정상 아래.,데드 존(dead zone)
그곳에 방치되어 있는.,故 '박무택, 백준호, 장민.'
3인의 시신 수습을 위해., 2005년 출정한 휴먼원정대
"히말라야를 반드시 찾아가
시신을 수습할 거다"- 엄홍길.
세계 각국 수많은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정상 등정 직전에 반드시 거쳐가는.,길목.
그곳 절벽 위에서 자일에 매달려 있는 상태.
고 박무택 대원의 부인은 "남편 머리카락도 손톱도
다 필요 없으니 그곳 눈에라도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
2004년 조난당한 고 박무택 시신이 있는 곳은 데드존.
고 '백준호, 장민.' 시신은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히말라야 원정대는 엄홍길 대장 아래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한라산 등지에서 실전에 대비한 시신수습 훈련.
.......................
2005 휴먼원정대
.......................
2005. 5.29. 09 :15., 고 박무택 시신.,곁.
휴먼원정대 대원 선발대가., 그곳에 도착.
고 박무택 산악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에베레스트 해발 8,750m.
고 박무택 산악인., 시신.
초모랑마 정상부 절벽 로프에 매달린채
일년을 보내야 했던.,고 박무택 산악인.
이미, 초모랑마와 하나가 된.,그의 몸.
그는 초모랑마와 하나가 되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듯 했다.
대원들: "여기는 해발 8,750m.,박무택 시신 곁."
"시신이 바위벽의 얼음에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아요."
박무택은 1년 전 바위벽에 로프에 매달린채 그대로였다.
무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았다.
초모랑마 산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
"지금 여기 인원 만으로는 시신 해체작업이 불가능."
"여기는 엄홍길 대장. 지원조 인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
지원조가 속속 도착해 해체작업을 함께해도 꼼짝 않는 시신.
숨이 턱에 차는 고도에서 목숨을 건.,
얼음 절벽에서 시신을 해체하는 작업.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시신.
지원조가 투입되어, 시신을 발견한지 3시간 만에 해체.
일년만에 박무택 산악인의 시신은 비로서 자유로워졌다.
대원들이 미리 준비해 갖고간 시신 운구가방은 소용없었다.
시신 한쪽 다리가 구부러져
운구 가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운구가방에 넣지말고 자일에 묶어 하산하라." -엄홍길.
그리고, 100kg 시신을 100m 하산 시키는데만., 또 3시간.
시신 운구 중 데드존에서 얼어붙은 시신 한구를 지나쳤다.
죽음의 공포를 얼굴에 고스란히 간직한채
데드존에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는.,시신들.
쎄컨드 구간에서 시간이 한없이 지체되었다.
에베레스트 데드죤에는 그곳에서 운명한 수많은 시신들이
세켄드스텝에서 써드 스텝까지 도처에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엄홍길 산악인은 고 박무택 산악인 시신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
.
그리고, 엄홍길 대장은
시신이 된., 박무택 후배를
드디어, 처음 만날 수 있었다.
2005년 3월 14일에 휴먼원정대를 꾸려 떠난뒤
기상악화 등 문제로 일정이 계속 지연되었기에
히말라야에 온지 77일째인 5월 29일에야 만난 것.
그러나, 장민 백준호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고
박무택 시신의 근처에서 백준호 배낭만 발견했을뿐.
.
엄홍길은 박무택 시신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했다.
"아!~무택아. 아!~ 무택아~."
그러나, 그곳에서 더 이상은
슬퍼하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곳에서부터의 하산길은 머나먼 길.
초모랑마의 여신은 고 박무택의 하산길을
도와주지 않으려는듯 발목을 잡았다.,(중략)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시신을 수습해 내려오려 사투.
끝내 성공 못하고 양지바른 곳에 돌무덤을 만들어 안장.
세컨드 스텝(암벽 구간) 위에 티벳고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
그곳에 박무택의 아내가 쓴 편지도 함께 묻었다.
원래 계획은 박무택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이동하여
근처의 티베트 사원에서 제사를 지낸뒤 화장한뒤 유골을
수습할 예정이었으니 기상이 악화되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택아, 내가 언제 너한테 다시 오겠나.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네 갈길 가라. 네 손이 차구나. 이 장갑을 껴라."
자신의 장갑을 벗어 껴주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눈물 만.'
^ 고 박무택 부인을 방문한.,엄홍길 산악인.
고 박무택 산악인 부인이 쓴 편지가
누리꾼들 사이에 알려져 감동을 준다.
찬민 아빠!
당신이 떠난지도 벌써 일년이 지나 버렸습니다.
문기둥에 그려놓은 찬민이 키 높이가 함뼘 커지도록
당신은 그곳에서 오시질 않는군요. 그곳에서 지켜보고 계시겠죠.
-고 박무택 산악인 부인이 쓴 편지 -
휴먼원정대가 직접 돌을 쪼아 만든
추모비이기에 그 의미가 각별하다.
베이스캠프 라마제
'히말라야!~~ 때론 생명을 거는 무모함이 아름답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자신의 손끝에 흐르는 피보다 큰 우주는 없다'고 썼다.
'인간은 본래 이기심으로 뭉친 나약한 존재.'
.
2004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에 에베레스트를
오르기로 약속했던 산악부 아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고 백준호 '의사자(義死者).
그의 이타심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히말라야 만큼 울림이 크고도 깊다.
그런 까닭에 한국 등반사(登攀史)는 2004년 5월 20일
백준호, 박무택, 장민의 사망일이 최악의 참사인 동시에,
한국 산악인의 기상과 우애를 전 세계에 보여준 날로 기록.
고 백준호는 대한민국 산악인 최초의 '의사자'.
2004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원
후배 박무택과 장민이 조난 당하자 구조에 나섰던 백준호.
당시 에베레스트 원정대 모든 산악인들이 구조 출정을 만류.
그날, 베이스캠프를 떠나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을 위해
출정한 각국 원정 8팀이 갑작스러운 눈보라로 중도 하산.
악천후는 점점 극심해지고 있어 모두 철수하기 급급한 상황.
언제 어디에서 예측할 수 없는
눈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는.,상황.
구조대가 출정하면 조난자와 함께
더 큰 조난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
그러면, 모두 다 함께 스러질지도 모를 일.
그러나, 백준호 부대장는 조난을 당한 박무택 대원과 함께
조난을 당해 스러질줄.,알면서도.,그곳 '데드 존'을 향해 출발한다.
"만약 내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무택이도 나를 구하러 갔을 겁니다."
본부와 무전을 끝낸 사내가 베이스캠프를 나선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기온. 단시간만 노출돼도 코와
발가락이 새까맣게 변색되는 동상의 위험, 한치 앞도
가늠할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눈보라 속 캄캄절벽 어둠.
청춘의 한때를 형제처럼 보냈던 후배 동료들을 위해
백준호(1967~2004)는 데드존(Dead Zone)으로 갔다.
지구에서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도 가장 위험한 북벽.
정상 등정 후 조난당한 계명대학교 산악회
박무택(1969~2004), 장민(사망 당시 26세)과
마지막일지 모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곳 오은선도 백준호의 구조 출정을 만류,
당시 오은선은 지구 상에서 '7 서미트' 플랜 등반 중.
하여, 계명대 산악부와 합류하여.,에베레스트 원정등반.
오은선은 2인 셀파와 에베레스트 단독등반 팀.
박무택은 '계명대 개교 50주년 기념' 합동등반 팀.
함께 동행하면, 경비절감 안전 등 서로 도움될 목적.
박무택은 히말라야 원정 직전 오은선을 찾아와
초모랑마 원정을 함께 하자고 제의해 와서.,동행.
초모랑마에서 박무택이 앞서 올라가 서로 헤어진 것.
오은선 산악인은
자신의 페이스 대로
뒤쳐져 꾸준히 올랐다.
그래서, 오은선보다 먼저 올랐던.,박무택.
그리고나서,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후, 오은선은 박무택 실종 소식을 듣게 된 것.
박무택이 쓴 고글이 설원으로 날아가 버린.,사고.
하여, 설맹(雪盲)으로 인해 데드 존에 고립된 상태.
박무택이 후배 장민을 혼자라도 살라며 하산시킨 것.
.
그 다급한 상황을 무전으로 듣게 된.,백준호 산악인.
'데스죤 조난자' 구조 출정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릎쓰고 홀로 오른 백준호.
백준호 산악인은 악천후 속에서 홀로 12시간 산행 끝에
박무택을 발견한 후,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켰고 자신도 숨졌다.
그는 왜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뛰면서까지 동료를 구하러 간걸까?
함께 동행한 세르파도
박무택 구조를 포기한
에베레스트., 최난 구간.
고 백준호 산악인은 그만큼이나
동료와 선후배들을 평소 사랑했다.
앞뒤가 꽉 막힌 이 경상도 사나이는
오랫동안 벅찬 꿈을 하나 갖고 있었다.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서는 것이다.
2004년 5월18일 오후 3시.
그는 꿈에 다가서 있었다.
정상 직전의 마지막 캠프5(8,300m)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비보에 접한다.
그날 오전 10시에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원정대.
하산길에 박무택이 조난당하고,
함께 오른 장민은 실종된 것이다.
급히 베테랑 셰르파에게 구조작업을 지시했지만 허사.
이미 날이 어두워 혼자서 못올라가겠다며 되돌아 온 것.
당시 박무택이 설맹과 동상으로 쓰러져 있던.,8,750m 지점.
그에게는 밤을 지새울 고산장비도 없었고,
산소통 계기판은 이미 제로(0)를 가리켰다.
저대로 두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
'다른 산악인이라면 이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구조에 나서야한다 말할 것.
하지만, 히말라야 8,000m 이상을 올라가본 사람들은
'죽음의 지대' 그곳이라면 모두 고개를 무겁게 외로 튼다.
‘죽음의 지대’에서는 육체와 정신 모두
통제범위 바깥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제 정신으로 제 몸 하나 가누기 버겁다.
냉정하게 말해 그런 상황에서라면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는 것이 ‘당연’.
왜?~ 조난자를 구조할 가능성이.,0%.
그곳은 구조하러 나선 자마저
불귀의 객이 될 가능성이 100%.
그런데, 고 백준호 산악인은 갔다.
칼바람이 어둠을 가르는 영하 30도의
암흑천지 속으로 두 셀파와 함께 올랐다.
2인 셀파는 밤 7시경 함께 올랐다가
밤10시경 구조할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
더 이상 전진은 죽음이라 여기고 철수한 것.
에베레스트 북면 8750m 고도 지점.
'죽음의 지대'라고 불리우는., 데드 죤.
그와 산소 없이 동행을 했던 셀파 2인도
중도에 숨벅차 하산했지만 홀로 오른 것.
그밤을 꼬박 새워 에베레스트 최난 구간
‘세컨드 스텝’(8,600m) 데드 죤을., 오를 때
백준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백준호는 이튿날 새벽 6시, 기어코 박무택과 조우.
그날밤은 한국 등반사에서 가장 의롭고 외로웠을 등반.
백준호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2004년 5월19일 새벽 6시. 박무택을 만난 백준호는
전진 베이스 캠프의 원정대장과 무선교신을 나눈다.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되어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구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
...............계명대 원정일지 속.,사고 경위.....................
계명대학교 원정대가 밝힌 일지에는 당시 긴박했던 상황과
죽음조차 가로막지 못한 대원들 간 우정이 행간에 담겨있다.
5월 18일 오전 10시(이하 현지 시각)께 북릉과 북동릉을 통해
등정한 박무택과 장민은 촬영을 위해 정상에 1시간 쯤 머문다.
그리고 하산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12시 무렵,
박씨는 장씨 탈진과 자신 또한 설맹 상황임을 ABC에 알린다.
박씨는 자신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장씨를 먼저 하산시킨 후
그곳에서 2시간 정도 하산을 시도하다가 포기, 비박을 결정한다.
그리고, 15:40 산소고갈 호흡곤란 무전을 끝으로 ABC와 교신두절.
.
한편 ABC에서는 캠프5에 무전을 보내
셰르파 누리와 니마(오은선씨 셰르파)를
올려 보내지만 둘은 되돌아오고, 백준호가
오은선(38세·영원무역)의 레귤레이터를 빌려
19:30 구조 출발, 20:30 셀파 누리도 따라 나선다.
19일 06:00 백씨 만 8750m‘스노우 피라미드’ 위에서 박씨와 만남.
"심한 동상과 탈진까지 겹친 박씨를 혼자 구조하기 어렵다.".,교신.
20일 09:30 오은선은 ‘스노우 피라미드’ 상단 박씨 주검을 발견한다.
21일 15:30 캠프5(8300m) 인근 8450m 지점에서
외국등반대가.,백씨와 장씨의 시신을 발견한다.
박무택 대장은 왜 앞을 볼 수 없었을까?
박씨와 함께 정상에 올랐던 셰르파 락파는
“박 대장이 정상에서 1시간 가량 고글을 벗고
사진촬영을 하길래 고글을 착용하란 말을 여러번”
.
락파의 말대로 하면 박씨는 설맹에 걸렸던 것.
하지만 8000m급 봉우리를 6개나 오른 박씨가
과연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동상과 탈진 때문에 대원들 보다 먼저 내려온
락파가 책임 회피를 위해 허위로 진술했을.,가능성
.
만약 락파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박씨의 증세는
산소결핍으로 설맹과 비슷한 ‘화이트 아웃’일 수 있다.
왜 신속한 구조가 못 이뤄졌을까?
첫째 무전교신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
둘째 캠프5에 구조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캠프에서 다른 팀 셰르파들에게 구조요청
이들은 다음 날 등반을 위해 선뜻 나서지 않았던 것.
당시 캠프5에는 백준호·오은선·누리·니마가 있었지만
이들 또한 캠프에 도착한지 한두 시간 지쳐 있는 상태.
셋째 산소장비가 부족했다.
당시 캠프5에는 오은선씨의
레귤레이터 하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맨 처음 구조하러 올라간
니마와 누리가 2시간 만에 되돌아왔고,
백씨가 오씨의 레귤레이터를 빌려 혼자 출정.
.
넷째 셰르파들의 불성실한 행동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백씨를 뒤따라 구조하러 올라간 셰르파 누리가 중도 하산.
(그후, 세르파 누리는 동상으로 손가락 3개를 짤라야 했다.)
또한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 중인 이정면 대원이 누리에게
2차 등정조에게 레귤레이터를 전해달라고 했지만 전달하지 않았다.
백 부대장은 왜 장민을 만나지 못했을까?
장씨는 박씨와 헤어진 후 탈진으로 인해
정상적인 속도로 하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저물거나 탈진 증세가 심해서
아마도 8450m 지점에서 운행을 중단하고 비박.
또는 휴식을 취하다가 피로와 산소부족까지 겹쳐
정신을 잃었으리라 추정되며 만약 장씨가 깨어있었다면
아래 쪽에서 올라오는 불빛을 보고 도움릏 요청할 수 있었을 것.
하지만, 이날이 그믐이었던 탓에 밤이 어두워
백씨가 올라가면서 장씨를 발견하긴 어려웠을듯.
‘에베레스트뉴스닷컴’에 '이번 조난사고와 관련해
미국팀 셰르파 앙 밍마한테 들었다.'는 외국팀의 글.
19일 정상에서 하산 중 한국 대원 두 명을 보았다는 글
글에 묘사된 내용으로 볼 때 박씨와 백씨를 만난 것.
그의 말을 요약하면 ‘박씨는 벽에 매달린채 죽음에 임박.
거기서 조금 내려갔을때 백씨는 박씨가 하산하는지 물었다.’
기사 내용과 이들의 등정 시간 그리고 시신 발견 위치를 토대로
당시 정황을 추측해보면 백씨는 박씨를 만나 최소 6시간 이상 함께
있으면서 후배인 박씨와 함께 내려가기 위해 안간 힘을 썼을 것이다.
이에 박씨는 자신이 가망이 없음을 느끼고 ‘먼저 내려가라.
눈이 나아지면 나도 따라내려 가겠다’는 말로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백씨를 하산시켰을 것이다.
하산 중인 백씨는 장민을 만나지만 이미 사망 뒤.
그리고 꼬박 이틀을 운행해 체력이 떨어진 백씨는
후배를 둘이나 잃은 상실감과 설령 살아 내려간다 한들
평생 잊지 못할 죄책감에 결국 자신도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
이번 조난사고에서 보여준 대원들 간의 우정은 눈물겹다.
장민을 먼저 하산시킨 박 대장의 판단은 앞을 볼 수 없는
공포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후배라도 살리겠다는 의지.
또한 조난 소식을 듣고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구조작업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백씨의 행동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 희생정신이 낳은 비극이었다.
죽음 앞에서 이들이 주고받았을 마지막 대화
그 얼마나 가슴이 절절했을지 충분히 짐작된다.
계명대와 계명대산악회는 사고수습 대책을 논의.
특히 시신 수습 문제는 경비조달, 입산료,
대원선발 등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계명대산악회가 혼자 해결하기에는 역부족.
...................................................................
5월 20일 새벽에 사고지점을 향해 출발한 오은선 산악인.
7대륙 정상 '7 서미트' 일환으로 에베레스트를 찾았던 것,
세컨드 스텝을 오른 직후 커다란 바위에 올라서니 누군가가
고정 자일에 매달린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故 박무택 산악인
오은선 산악인.,촬영
"무택이 시신을 발견했어요.
고정자일에 묵인채 숨져있어요.
준호는 안보입니다." - 오은선 산악인 -
오은선 산악인은 소속팀 원정대장에게
최후 판결문과도 같은 정식보고를 올렸다.
백준호와 박무택이 만났다는 무전을 듣고
오은선이 19일 자정에 올라가 오전 9시에
박무택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
오은선 산악인.
오은선이 그 모습을 사진 찍고 에베레스트 등정.
오은선의 셰르파 역시 도망가고 그녀 혼자 내려오다가
8,300m에서 탈진해 지나치던 스위스 등반대 셰르파가 구조.
........에베레스트 정상부에서., 오은선............
"해발 8750m 지점에서., 박무택 시신을 발견했다."
"슬픔과 미안함이 교차."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오를 수밖에.,1시간 남짓 사투 끝에 정상에 등정."
'해냈다는 감격보다는.,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또 하나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2004년 5월 28일 오은선.,인터뷰에서............
지난달 20일 오전 3시15분(이하 한국시간), 11시간 사투끝에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같은 달 28일 귀국한
오은선 산악인(38ㆍ영원무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93년 고 지현옥씨를 포함한 3인의 여성 등반대의
에베레스트 등정 후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11년만의 쾌거.
하지만 결코 좋아할 수 만은 없었던 것은 함께 베이스캠프를
공유하며 힘이 되었던 계명대 산악회 박무택 등반대장 시신을
등반 도중 직접 목격한데다, 등반을 도와주던 셰르파가 도중에
하산하는 바람에 산소통 하나를 들고 자신은 단독등정 하산한 탓."
"정상에서 1시간 남짓 내려오다가 산소가 바닥났어요.
캠프5(8300m) 근처에서 탈진해 앉아 있을 때 다른 팀의
세르파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오씨가 등반한 날은 3명의 한국 원정 대원을 포함해
총 7명이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 도중 유명을 달리.
그만큼눈보라가 심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접한 오씨는
먼저 간 대원들에게 미안해 눈시울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여성 최초로 세계 7대륙 최고봉에 도전중인 오씨는
2002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5642m), 북미 매킨리(6194m),
남미 아콩가구아(6962m)에 이어 에베레스트에까지 오름으로써
이제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4m), 오세아니아 칼스텐츠(4884m),
남극 빈슨매시프(4897m) 등 목표에서 3개만 남겨놓게 되었던 것.
올 8월 킬리만자로 도전할 계획.
"가장 어려운 고비는 지나갔지만
이제 반환점을 넘었을 뿐입니다."
"희망에 도전하는 한 인간으로
기억됐으면.," - 오은선 산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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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산악인이
박무택 조난 소식을 들은 시기는
얄룽캉(8505m)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박무택., 산악인
장민., 산악인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엄홍길 산악인은
시신 3구 수습을 위해., '휴먼 원정대' 출정.
엄홍길 산악인에게는 꿈에도 못 잊을.,박무택 후배.
안나푸르나에서 발목이 180도 꺾인 부상을 당했을때
엄홍길 산악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동행했던.,박무택.
그후, '의리의 사나이' 박무택 후배를
친동생이나 다름없이 여긴.,엄홍길 선배.
히말라야 14좌 등반 때 6차례 동행한 사이.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어온.,박무택 후배 시신을
에베레스트 '데스 죤'에 방치할 수 없었던.,엄홍길.
하여, 자신이 시신 수습을 위해 선봉에 나서서 출정.
'박무택, 백준호, 장민' 3인의 시신 수습을 위한.,팀원 18인.
2015년 12월 개봉된 영화 ‘히말라야’는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고 백준호 산악인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 대원이 조난을 당하자
위험한 줄 알면서도 구조에 홀로 나서 박무택을 찾아
안전 조치 후 박 대원이 숨을 거둘 때까지 곁을 지켰다.
아마도 당시 백준호 대원은
박무택 대원이 숨을 거둔 후
하산길 계곡에서 실족사한듯.
2005년에 히말라야 휴먼원정대가
시신 수색을 벌렸으나 찾지 못했다.
'에베레스트 북측' 베이스 캠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향년 37세)
그는 결국 그곳에서 숨진
영화 ‘히말라야’의 주인공.
'최초 산악의사자' 故 백준호.
산이 아빠.
잘 지내고 있죠? 무심한 사람. 그렇게 좋아하던
산이 수야 두고 갔는데 한 번도 꿈에 안 오고
당신 별명대로 정말 미련곰탱이 맞네요.
당신 거기 누워 있는 그때부터 더워도 덥다고
추워도 춥다고 말하기가 참 미안했어요.
갑자기 아빠 보고 싶다고 울어대는 수야를 볼 때,
아침에 자고 일어난 수야가 아빠가 내 마음속에
없는 것 같다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할 때,
아빠가 없어서 우리 가족은 행복할 수 없다고
심각하게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수야를 볼 때,
애들 학교 행사란에 당신 자리 비워두어야 할 때,
왜 우리 애들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
당신 원망도 참 많이도 했어요.
산 사람들은 참 편하게 말하더라고요.
당신 거기 누워 있을 수 있어 참 행복하다고...
부럽다고까지 말하던데 그건 참 이기적인 말이예요.
.
남아 있는 가족들은 생각 않고 하는 말이예요.
그 흰산에 당신이 꽁꽁 얼어 있다고 생각하면
사지가 뒤틀리고 피 마르는 걸 모르고 하는 말.
육체는 중요한게 아니라지만 불쑥불쑥 커서
에베레스트에 아빠 찾으러 갈 거라고 애들이 말할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는지 그들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 그렇게 되고 서점에 책 사러 갔는데
산이가 망설임없이 고른 책이.,<에베레스트 등정하기>였어요.
아빠 찾으러 가겠다고.. 당신 꼭 닮은 아들이 맞죠?(중략)
우리 산이랑 수야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면 그걸로 됐어요.
일이 잘 안 되고 속상할 때면 당신 원망도 하겠지만....
당신이 그 정도는 들어줘야 되지 않아요.
이제 우리 가족 걱정하지 말고 당신 그곳에서
하고 싶은거 하며 지내요. 너무 멀리 가진 말고요.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 돌아봐줄 곳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 산이 수야 항상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 해줘요.
- 산이 수야 엄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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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으로
해발 7,300m 이상 고봉이 30여 개 분포한다.
정상부는 만년설로 덮여 있어, 설원을 신성시.
산스크리트 어., hima는 '눈',
ālaya는., '보금자리' 또는 '집'
성지순례 등산가들이 이 산맥을
'히말라야'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놓인.,벽.
겨울에는 북쪽 찬기류가 이 산맥을 넘지 못하고,
여름에는 남쪽 남서무역풍이 북으로 넘지 못한다.
.
히말라야 산맥은 서쪽의 낭가파르바트(8,126m) 산에서부터
동쪽 남차바르와(7,755m) 산까지 2,500km나 연속되어 있다.
남북간의 너비는 200~400km, 산맥 중간에 네팔 및 부탄 왕국.
이들 국가가 차지한 몇몇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대부분., 인도 영토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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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개봉.,히말라야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
“기다려... 우리가 꼭 데리러 갈게...”
에베레스트 고도 8,750m지점.,데스 존.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신의 영역.
에베레스트.,'Death zone.'
그곳에 우리 동료가 묻혀있다.
생을 마감한 후배 대원의 시신을 찾기 위해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가슴 뜨거운 여정.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위대한 도전.,감동 실화.
에베레스트(주무랑마봉, 쵸몰라마봉, Mt.Everest).
네팔에서는 시가르마타(산스크리트어 : 하늘의 이마)
티베트어 초모랑마(세상의 어머니). 중국어 주무랑마 봉.
영국 조지 에버레스트 경 이름을 본딴.,'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8,848 m)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지구의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은 아니다.
지구 중심에서 가장 먼산은 안데스산맥 침보라소 산.
중국과 네팔의 국경이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지난다.
에베레스트 산괴에서는 주위의 로체 산(8,516 m),
눕체 산((7,855 m), 창체 산(7,580 m)이 포함된다.
1924년 6월 8일 영국의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첫등정에 도전했으나 정상 200m 아래서 마지막 목격.
1999년 영국 BBC 다큐멘터리 팀이 에릭 시몬슨이 이끄는
'맬러리-어빈 수색원정대'를 조직해 에베레스트로 파견했고
그해 5월 1일 8160m 지점에서 조지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등정에 실패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맬러리-어빈의 등정 성공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그후로 많은 원정대가 도전하였으나 실패.
1953년 존 헌트가 이끄는 뉴질랜드 원정대.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족 텐징 노르게이가
현지 시각으로 5월 29일 오전 11:30에 정상 등정.
대한민국에서는 고상돈 원정대가
1977년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2008년 5월 8일 티베트인 니마 츠런(尼瑪次仁)을 단장으로,
중국인 뤄선(羅申)을 부단장으로 19人 전문 산악인으로 구성.
성화 봉송주자들은 6시간 등반을 통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성화.
이날 오전 9시20분(현지시간) 에베레스트 정상 성화
올림픽 성화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했다.
에베레스트 휴먼원정대.,출정기.
故 박무택 산악인 시신 위치 & 에베레스트 정상부
세계의 모신(母神)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등반 중
목숨을 잃은 동료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대한민국 ‘휴먼원정대’ 결성은 세계 등반사.,초유의 사건.
2004년 5월 정상에서 내려오다 설맹(雪盲), 탈진 등으로
끝내 지상을 밟지못한 대원은 백준호, 박무택, 장민 등 3인.
사고 당시 이들은 서로 구조하려다 결국 모두 생명을 잃었다.
이들 시신은 에베레스트 정상 아래 8750m 부근에 위치.
처음 사고를 당한 박무택은 로프에 매달린 싸늘한 모습이
오은선 산악인에게 발견되어 유가족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박 대원을 구조하러 나선 백준호, 장민 대원 역시
그보다 300m 아래에서 외국등반대에 목격되었지만
정확한 시신 위치는 좀 더 수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3인의 시신을 하루 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사건 직후부터 있었지만, 최고의 전문 산악인들조차
초모룽마 정상에서의 시신수습은 무모한 시도라고 난색.
“초모룽마 정상부의 낙석은 총알처럼 위협적인 환경”
“시신 수습 작업은 모두에게 목숨을 건 사투가 될 것”.
자기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열악한 조건에서
특수장비까지 동원해 시신수습 작업을 하려면
그만큼 더 큰 위험 속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점.
지금까지 어떤 나라 등반대도 동료의 시신수습을 위해
초모룽마 등반에 나선 적이 없을 만큼 이번 작업은 위험.
아니, 이번 휴먼원정대 계획은 무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2005. 3. 14 휴먼원정대 출정을 지켜본 고인 유가족들도
원정대가 성공적으로 유해와 함께 돌아오길 기원하지만,
무엇보다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 만을 바라고 있다.
동료애로 시신 운구 작업에 나선 휴먼원정대
대원들은 취재팀을 포함해 모두 20여명이다.
특히 이번 원정대를 주도한 엄홍길 등반대장은
고 박무택과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함께 한 사이.
히말라야 14좌 완등자 엄홍길 산악인에게는
휴먼원정대 출정이 곧 인생의 중대 기로인 것.
후배들의 시신이 초모룽마 정상 등반 루트에 방치.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만 다른 정상에 계속 도전한다는
그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견디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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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히말라야'의 실제 주인공 엄홍길 대장은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났다.
후배 박무택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엄홍길 대장은 에베레스트를 오른 산악인들로부터
박무택의 주검이 얼음이 된채 절벽에 메달려 있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 들어오면서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
대한민국 산악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 여긴 것.
박무택 대원은 2004년 에베레스트 등정 뒤
하산길 8700m 지점에서 설맹으로 시력을 잃고
로프에 메달린채 숨졌는데 그 시신은 수직 절벽에
매달려 있었기에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던 상태였다.
그래서, 엄홍길 산악인은
자신이 나서야겠다고.,결심.
휴먼원정대를 결성하게 된 것.
'휴먼원정대' 영화의 한 장면.
2000년 엄홍길과 박무택은
히말라야 칸첸중가 등반 당시
8000m 지점에서 함께 비박했다.
엄홍길과 故 박무택은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어섰던
선후배 산악인으로서.,각별한 사이.
엄홍길 산악인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후배를
에베레스트 수직벽에 매달린채 잠들게 할 수 없어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하기로 결심한 것.
휴먼원정대 대원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8700m 지점에 안장이 된.,故 박무택 산악인.
그곳 에베레스트 북면 중턱은 산악인 공동묘지.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 휴먼원정대 라마제.
........................엄홍길 산악인.....................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등반을 시작으로 K2까지,
세계의 고봉인 히말라야 14좌를., 한국 최초로 완등.
이어, 얄룽캉, 로체샤르까지 세계최초 8000m 16좌 완등
1985년 9월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시도 후.,실패.
1988년 9월 재도전 등정. 2000년 7월31일 K2(8,611m)를 등정.
이로써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히말라야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2004년과 2007년 5월 31일에 등정해 16좌 완등한 산악인.
네팔 및 개발도상국에
교육과 복지를 지원하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다.
2003년 의정부 호원동에
'산악인 엄홍길'전시관 개관.
.....................................
엄홍길은 2005년 휴먼원젇대 등반대장으로
고 박무택의 시신을., 앞장 서서 수습했지만
휴먼원정대 대장은 산악계에서 추천한.,손칠규.
그는 그당시 노무현 대통령과도 친분이 깊었고
2005년 휴먼원정대가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
라마제 때 고인이 된 후배들 이름을 한명씩 부르며
오열하고 절규하면서 애통해하던 정이 많은 산악인.
"무택아. 준호야. 장민아~
우리와 함께., 집에 가자~"
그에게는 계명대학교 후배들.
.
휴먼원정대 대장.,손칠규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숨진 동료 산악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에베레스트를 오른 엄홍길 대장과 ‘휴먼 원정대’의 실화 영화.
‘국제시장’ ‘베테랑’으로 ‘쌍천만’ 배우가 된 황정민이 엄 대장을,
정우가 엄 대장 신뢰를 한 몸에 받는 후배 박무택 대원 역을 맡았다.
'휴먼 원정대.'
2015년 12월 개봉.
775만 관객을 모았다.
2005.3.14 공항 환송식.
고소적응훈련을 위해
아일랜드 피크 6839m에서
정상등정을 마친뒤(2005. 3.17~3.31)
초모랑마에서(2005.4.12)
휴먼원정대 안전기원 라마제
장비와 식량을 운반하는 셀파
ABC를 떠나 노스콜로 향하는 대원들
탈랜트 박상원, 황인성 등이 휴먼원정대를
응원차 베이스 캠프를 찾아 식사(2005.5.20)
식사하는 엄홍길 등반대장와 대원들(2005.5.20)
2005.4.30. 초모랑마 8300m지점.
휴먼원정대(노란색 상의.,엄홍길)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 티베트 명)에서
숨진 원정대원 3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악천후를 뚫고 제3캠프로 향하는., 휴먼원정대.
2005.5.28. 초모랑마 8300m고도 지점에서
제3 캠프를 설피하는., 셀파와 휴먼원정대.
고 박무택 산악인 시신 수습을 하기 위해
데드 존(죽음의 지대으로 떠나는., 대원들
2005.5.29 .1:20.,고 박무택 시신 수습.
8750m 고도지점에서 3시간 30분 걸려
시신을 얼음에서 분리하는 작업 후.,운구
2005.6.13. 3 : 20 눈물바다가 된 합동추모식
“그들의 동료애가 에베레스트의 만년설을 녹였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뜨거운 동료애와 사랑은 만년설을 다
녹이기에 충분했습니다.이제는 편히 잠드소서...”
1년 전 에베레스트에서 숨을 거둔 백준호(당시 38살),
박무택(36), 장민(28)씨등 계명대 산악회원 3명과
‘휴먼 원정대’를 격려하러 갔다 고인이 된
한승권(50) 산악회장의 합동 추모식.
합동 추모식
2005년 6월 13일 오후 1시
계명대학교 성서캠프스바우어관.'
유족과 동료 산악인 300여명 참석
오열과 흐느낌으로 눈물바다.,추모식.
'추모위원장' 손칠규 휴먼원정대장.,개식 선언으로 시작.
이날 추모식에서 유족들은 가족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흐느낌을 못참고 울부짖었고, 아버지를 여읜 철부지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해맑은 표정을 지어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대원들을 차디찬 에베레스트에 남겨둔
지난 1년간은 살아도 사는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은 우리 산악인의
숙명이었다” - 추모위원장 손칠규 휴먼원정대장 -
"대원들이 보여준 도전 정신과 개척정신,
패기, 희생정신은 이 시대의 귀감이라” - 손칠규.
산악인 엄홍길씨도 추도사에서
“그들은 산에 대한 애정 하나로
에베레스트를 찾아나섰고 인간
이상의 우정을 보여줬다”고 평가.
추도사에 이어 유가족과 산악인들의 헌화가 진행되자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영정앞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이를 지켜보던 참가자들도 눈시울을 붉혔던 추모식 현장.
추모식을 마친 휴먼 원정대와 계명대 산악회 관계자들은
산악회 전통에 따라 팔공산 비사골로 자리를 옮겨 현지에서
추모식을 추가로 가진뒤 3인 이름을 새긴 동판을 바위에 걸었다.
에필로그.
- 2005.6.1 엄홍길(45세) 산악인-
“국민의 많은 성원이 없었다면 무택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1년전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산악인 3명.
그 시신 수습을 위해 떠났던 휴먼원정대가
박무택 유품을 가지고 13일 타이항공편으로
인천공항 도착, 이날 13시 계명대 성서캠퍼스 내
바우어관 시청각실에서 열리는 합동 추모식에 참석.
2005년 3월14일 히말라야로 떠난지 91일 만이었다.
원정대원들은 출국 전보다 체중이 10㎏씩 살이 빠지는
등 수척해졌지만 모두 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대구일보 -
지난 5월 29일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8천750m)에서
잠들어 있는 박무택씨의 시신을 휴먼원정대가 수습.
세컨드스탭(8천600m) 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안장했다.
2005년 5월 4일에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고 박무택, 장민, 백준호 시신수습 휴먼원정대를
응원하러 갔다온 뒤 안타깝게도 고산병으로 숨진
한승권 계명대산악회 OB회장 등에 대한., 위령제.
그들의 이름을 묘비에 새겼고 휴먼원정대는
박무택씨가 사용했던 선글라스와, 안전벨트,
안전고리 등 수습한 유품을 유족들에게 전달.
지금까지 경험했던 히말라야 원정 중에서
가장 장기간 산에 머무른., 엄홍길 산악인.
“에베레스트에서 날씨와 몸 상태 등 여건이
좋지 않았을 때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결국
무택이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되어 마음이 편합니다.”
“심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국민이 성원해줘
무택이를 티베트 고원과 네팔의 히말라야가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묻고 온 것 같다”.
2005.6.5.
네팔 성토(聖土) 떠오르는 태양 아래
에베레스트 동릉에 안장된 님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그리고
우리 대한의 아들들
님의 발걸음따라 지날때마다
히말라야 혼으로 부활하소서~~
- 2005년 6월 5일., 19 : 29 -
해외원정대는 히말라야 등정 전 베이스캠프에서.,라마제.
셰르파들이 라마제를 지내지 않고는 산에 오르지 않기 때문.
라마교를 믿지 않는 원정대 대원들도 이때 반드시 예를 갖춘다.
............................라마교..............................
대승 불교가 티베트 중심 다신적인 토속 종교와 혼합
독특한 의식과 행사를 가진 불교로 발전한., 티벳 신앙.
힌두교의 은둔적이며 신비한 영향을 받은.,독특한 불교.
티베트를 비롯하여 만주, 몽골, 부탄, 네팔 등 지역에 전파.
대승불교의 한파이지만, 라마의 역할을 중시한 까닭에 라마교.
...................................................................................
제사 음식을 만들기 위해 셰르파들은 베이스캠프에서 음식 장만.
곡식가루 짬바를 반죽한 여러 모양 도넛이나 기름에 튀긴 꽈배기.
제수가 만들어지면 셰르파들은 제단에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놓고
태극기 네팔기 후원업체 깃발, 라마 경전 깃발들을 함께 늘어뜨린다.
라마제에 꼭 필요한 것으로., 붉은 끈 '승디'가 있다.
여성들이 머리끈으로 사용하면 적당할 것 같은 붉은 끈.
우락부락 산사나이들이 목걸이나 팔찌를 차고 다니는 것.
재앙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부적인.,승디.
산으로 떠나기 전, 셰르파들은 고승이 있는 사찰을 찾아간다.
사실, 승디는 어느 절에서나 시주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많은 수양을 쌓은 고승에게서 얻은 것일수록 효험이 크기 때문.
제단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등반 장비를 함께 올려 놓기도 한다.
라마승이나 셰르파가 경전을 읊기 시작하면 라마제가 시작된다.
경전이 끝나면 제단위 쌀과 짬바를 서로 얼굴이나 장비에 뿌린다.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는.,라마제의 독특한 의식이다.
라마제는 네팔인 특유의 유머와 해학을 엿볼 수 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옆사람과 대화를 해도 상관없다.
서로 얼굴에 짬바를 발라주며 장난기가 발동해
뒤집어 씌우다시피 하여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짬바를 뒤집어 쓰는 일이.,곧 신의 은총을 받는 것.
라마제가 끝나면 셰르파들은 대원들의 목에 승디를 걸어 주며
안전산행을 기원하고, 제단 음식들은 모두에게 골고루 배분된다.
술은 셰르파와 대원이 음복하는데 고소 적응이 안된 대원은 치명적.
두주불사 주량(酒量)의 산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고소에 적응이 안된 경우에는., 3잔만 마셔도 후송.
고소증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있는 곳.
라마제단 앞에서 기원하는 것은 보통 언제나 두 가지.
첫째, 대원들의 건강과 안전이고 두번째가 무사히 하산.
모두가 자신의 능력만큼 만 올라갔다 내려오면 되는 것.
모두 무사히 하산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라마제를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 라마제를 올리는., 가장 간절한 바램.
라마신에게 절실하게 갈구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혜다.
날씨를 예측할때
정상공격 시기를 정할 때,
안전한 곳에 캠프를 설치해야 할 때,
체력소모 적은 안전한 루트를 결정해야 할 때,
예측불허의 돌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정확하고 신속한 상황판단을 내려야 할때.
산에서는 대장의 판단 하나에 전 대원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악인들은 결코 산을 정복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인간은 대자연을 결코 정복할 수 없음을, 특히 히말라야는
아무리 경험이 많고, 등반 기술이 뛰어난 산악인 일지라도
신이 허락한 만큼 만 다녀올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마제는., 그러한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티벳 산사람들의 오래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마제가 끝나면 경전을 기록한.,'룽다'가 펄럭인다.
오색깃발 '룽다'는 말과 바람을 의미하며 깃발에 적힌
경전이 바람을 타고 말처럼 달려 세상으로 번지길 염원.
원정대의 안정적인 등정을 기원하는 라마제.'
그 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고소 캠프에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지내는 라마제.
베이스캠프 라마제단에서
원정대는 안전등반을 기원.
2014.03.30 안나푸르나.,'고 박영석 대장 추모' 라마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라마제.
2014.10.2 마나슬루 원정대.,베이스캠프 라마제
덧 말.
히말라야를 찾는 원정대는 라마제를 지낸다.
히말라야 트레킹 참여자들도 꼭 라마제를 지낸다.
라마제를 주관하는 셰르파는 신과 인간 사이 중재자.
셰르파를 단순히 짐꾼이라고 여기면
히말라야 등반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네팔 트레킹 도중에
셰르파가 트래커를
버리는 사고가 종종.
셰르파에게 버림 받으면
죽을 고생을 하게 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