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중세도시, 프리부르(Fribourg)
인생을 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길고 지루하게 사는 방법과 짧더라도 멋지게 사는 방법이다. 스위스 프리부르를 여행할 때 가슴에 새긴 가치있는 구절이다. 프리부르는 베른에서 로잔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인구 30,600명의 작은 도시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부르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베른이 1191년 건설됐고 프리부르가 1157년 건설됐으니 이곳은 베른의 아버지 도시라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체링겐가 베르톨드 4세(Berthold IV, Duke of Zähringen)가 프리부르를 건설했고, 그의 아들인 베르톨드 5세가 북동쪽으로 올라 가 세운 도시가 바로 베른이다.
베른에서 프리부르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차로 30분 정도. 프리부르는 크게 나눠 바스빌 지역과 언덕 위로 지어진 구시가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사린(Sarine)강은 가파른 계곡을 흘러 바스빌(아랫마을) 지역을 감싸고 나간다. 이곳에는 1255년에 건립된 마이라우 수도원(Abbaye de la Maigrauge)이 있다. 당시 바스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헌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수도생활을 병행했다.
조용한 도시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젊은 대학생들이다. 조르주 피통(Georges Python)이 1889년에 세운 프리부르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프리부르 대학의 전신은 1580년에 세운 생미셸 예수회대학(Collège Saint-Michel)이다. 4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에는 재학생 만 명과 940명의 훌륭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프리부르는 스위스에서 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이 나뉘는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민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 사용비율은 70%, 독일어 사용비율은 30%다. 그러나 프리부르 대학에서의 강의는 프랑스어가 55%, 독일어는 45%를 차지한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바스빌 중앙광장으로 가니 큰 벽시계가 있는 특이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 건물은 곡물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곡창이사회(De la Planche Granary)건물이다. 곡창 건물 옆으로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고 분수대 앞에는 하얀 건물들이 양쪽으로 이어져 있다. 구시가로 올라 가는 길은 오래전에 깔아 놓은 아름다운 돌길로 만들어 졌다. 공지영이 쓴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을 보면 그녀가 이 돌길을 올라 가며 사진 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돌계단 위로 보이는 건축물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리부르 시의 시청사(City Hall). 헤르만이 1501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1522년 한스 펠더가 완성한 건축물이다. 돌계단을 걷기 힘든 사람들은 곳곳에 있는 푸니쿨라를 타고 구시가로 올라 가면 된다.
구시가에서 구텐베르크 박물관(Musée Gutenberg)을 발견했다. 독일 마인츠(구텐베르크의 고향)에 있는 원조 구텐베르크 박물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1527 년에 지은 유서 깊은 박물관(3층) 건물에는 인쇄에 관한 모든 것을 잘 갖추고 있다. 마인츠에는 육중한 금고 안에 구텐베르크 성경이 잘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도 성경은 보인다. 상설 전시관에는 인물 크기로 만든 왁스 인형으로 곳곳에 인쇄 기술과 산업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또한 워크숍에서는 방문자들에게 책의 구성, 인쇄 및 제본의 전통 기술을 시연 제공하기도 했다. 박물관에는 주로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단체로 견학을 온다고 한다.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스위스 패스 이용자는 무료 입장이다.
성 니콜라스 성당(Cathédrale Saint-Nicolas)은 1283년부터 짓기 시작해 1430년 완공된 건축물이다. 하지만, 11개의 종이 있는 76미터 높이의 첨탑은 60년 후인 1490년에 세워졌다. 성당의 출입구는 1380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수태고지와 열 두 사도의 부조가 조각돼 있다. 성당 내부에는 십자가의 예수님 형상이 중앙제단 위에 있고, 파이프오르간은 예배당 뒤 쪽에 위치해 있다. 작은 예배당을 보니 프란체스코 안톤 피스코가 그린 ‘세인트 마이클과 세인트 앤’ 작품이 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도 여러개가 있는데 그 중에는 순교자의 스테인드글라스, 성체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성묘 매장 예배당(Mise au tombeau de la chapelle du Saint-Sépulcre)이다. 이 무명의 작품은 요셉과 니고데모, 사도 요한,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두 천사 등 열 세 명의 동상이 예수님의 시신을 둘러 싸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이 누워 있는 아래 석관에는 1433년이라는 날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프리부르에서 태어난 유명한 사람으로는 장 팅겔리(Jean Tinguely)와 조 시퍼트(Jo Siffert)가 있다. 장 팅겔리는 움직이는 예술을 뜻하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세계 제1인자 조각가. 조 시퍼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인 F1(포뮬러 원) 의 전설적인 레이스 드라이버다. 포르쉐 운전의 명수로 불리는 시퍼트는 41번(1968 - 1971년 사이)의 경기에서 14번 우승을 차지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르게 질주하는 F1은 전세계의 남자들에게는 최고 스포츠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극한의 스포츠로 불리는 F1 레이스 드라이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기중에 일어나는 엄청난 압박과 중력의 힘은 물론 스티어링휠, 각종 계기류, 페달을 조작하고 경쟁자와 치열한 두뇌싸움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레이스 내내 유지해야 하는 지구력은 엄청난 훈련과 관리를 요구한다. 그 것을 모두 갖추었던 인물이 바로 프리부르 출신의 조 시퍼트다.
시퍼트는 1971년 제작된 레이싱 영화, 르망(Le Mans)에서 스티브 맥퀸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런 그가 월드 챔피온쉽 빅토리 레이스(영국 브랜즈 해치)에서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충돌로 연료통이 터지자 경주차는 삽시간에 엄청난 불길에 힙싸였던 것이다. 불길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시퍼트는 자신의 경주차에서 최후를 맞는다(당시 35세). 동료 드라이버들과 전세계의 레이싱 팬들은 모두 경악했다. 1971년, 프리부르에서의 장례식에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5만명의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였다. 그리고 1984년 6월에는 조각가 장 팅겔리가 ‘조 시퍼트 분수’를 제작해 프리부르에 세운다. ‘짧고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이 지루하게 100년 인생을 사는 것 보다 낫지 않겠어요?’ 시퍼트의 누이, 아델라이데가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말이다. 누구든,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 한 번의 인생,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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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르망 예고편 = Le Mans (1971) ↓↓↓↓↓
https://www.youtube.com/watch?v=228f-dPxI3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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