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학으로 가자 1951년 3월에 2학기를 맞이하여 천막교실이지만 몇 개를 증축했으나, 그래도 1, 2학년의 3부제를 면하려면 교실이 하나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도로에서 학교로 들어오는 길모퉁이에 있는 소방기구 창고를 빌리는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면에는 ≪의용소방대≫라는 민간단체가 있어서 소방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전쟁 전에는 그 창고에 소방기구가 가득 있고, 불이 나면 종을 두드려서 소방대 청년들이 모여 그 소방 기구를 동원하여 불을 끄게 되어있지만, 내가 구지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사용하는 일을 본적이 없었다. 이 창고를 면장에게 교섭하여 빌리자고 했다. 면장은 경찰지서장과 협의하여 흔쾌히 허락을 했고 그 교실은 제기한 나의 공을 생각해서 나의 담임학급인 5학년 2반이 사용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말이 교실이지만 바닥은 시멘트바닥이어서 짚 덕석을 짜서 바닥에 깔고 50여명의 학동들이 책을 놓고 공책을 받칠 기다란 판때기책상을 만들어야 했다. 짚 덕석은 창동 ‘윗담’ 마을의 일꾼들에게 부탁해서 해결했고, 기다란 판때기책상은 서무를 맡은 곽용암 선생이 나무를 현풍에 있는 제재소에서 맞추어 가지고 오고, 나는 나이가 좀 들고 큰 아이들의 조력을 받아가면서 책상 15개를 만들었고 앞에다가 흑판을 걸어놓으니 임시로지만 그런대로 교실이 되었다. 3월 2일까지 날짜를 맞추려고 이틀 쯤 밤까지 샜다. 이렇게 하여 신학기를 맞았다. 곳곳에 폭발물이 산재해있어서 학동들이 어린 호기심으로 건드리다가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날마다, 하학할 때마다 주의를 주었다. 이런 나날을 지내면서 나는 아침저녁 집에 가서 식구들과 끼니를 함께 하고 학교에 근무하며 밤에는 보통 새벽 서너 시까지 공부를 했고 일곱 시에는 일어나 집에 가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출근을 했다. 목표는 하루빨리 대학에 입학하려는 것이다. 고학년이라서 매일 과제물을 주어야 했다. 국어, 산수, 자연, 사회 네 과목은 1주일에 꼭 프린트로 과제물을 만들어 주었고 응용문제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도 잘 따라주었고, 공부를 잘하는 학동들은 나의 이 일을 잘 거들어주었다. 그 가운데 평촌 마을에 사는 영리한 윤동렬, 윤규렬 형제와 ‘나부실’에 사는 김태린이 나를 곧잘 거들어주었다. 이런 세월 가운데 2학기 시작부터 나의 숙부는 평소 한글문법에 관심이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해오던 중, 「구지고등공민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곽병화 선생의 추천으로 「국어말본」 과목을 맞게 되었는데 몇 달 지나자 교사로 채용되었다. 그래서 아재의 경제문제는 자력으로 해결되었다. 아버지도 피난 갔다 온 다음 당국의 『도민증』 정리로 사진 일이 많이 생겼고, 난리 통에 결혼을 못한 처녀•총각의 결혼도 잦아져서 사진관 일로 집안 경제가 좀 나아졌다. 그래서 나의 진학문제는 온 가족이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7월에 학년말이 되고 방학이 되자 나는 진학문제의 형편을 탐문하기 위하여 대구로 갔다. 그것은 먼저, 얼마 전에 「구지고등공민학교」에서 도 학무과의 주관으로 성인교육문제를 의제로 하여 연구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오신 「대구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이종항(李鍾恒) 교수를 아버지의 소개로 만나게 된 데에서 나의 진학문제가 적극적으로 우리가족 전체의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이종항 교수는 학구의 능력이 있는 청소년을 지금 초등학교 준교사로만 있도록 두기에는 아깝다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와 함께 나를 만난 자리에서 나에게 방학도 되었으니 한번 대구로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시면서, 명함을 주시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는 바로 당면문제로 해서 이번 새 학년에는 꼭 이루어 내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직서를 써가지고 교장을 만났다. “교장 선생님, 저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겠습니다.” 교장은 놀란 얼굴을 하고 의아한 듯이 나를 보더니, “이 사람 각중에(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고? 학교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닙니다. 공부하러 갈라꼬요.” “그래 어느 학교로 들어가기로 했나?” “아닙니다.” “허, 이 사람. 들어갈 학교도 정하지 않고 사표부터 먼저 내다니. 무슨 일을 그래 하노!” 하시고 화를 버럭 내신다. “아닙니다. 물러갈 학교라는 직장이 있으면 안 됩니다. 누가 나를 기다리는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규학력으로는 중학교 1년도 안되는데,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줄 학교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발악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때까지 공부한 것을 가지고 인정을 받고, 참으로 이 자식은 꼭 공부를 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이 서야만 내 학력에 맞게 넣어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뒤를 몽땅 끊어버리고 발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허 이 친구, 그야말로 대단하네. 꼭 그러게. 암 자네를 넣어 줄 사람이 꼭 생길 걸세. 그건 첫째 실력이라는 배경은 든든하겠다, 무작스레 고집도 대단하겠다, 꼭 될 걸세. 그래 사표는 지금 당장 수리하겠네. 다시 이 학교에 돌아올 생각은 말고, 안되면 끝이라는 각오로 한번 해보게.“ 그리고 내가 제출한 사직서를 자기가 늘 가지고 다니는 서류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이튿날, 나는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일단 대구 대봉동에 있는 이모의 집으로 갔다. 이종사촌들은 형만 빼놓고 모두 있었는데 그저껜가 방학이 되어 방학동안 고령에 가겠다고 지금 한창 짐을 챙기고, 여행준비에 정신이 빠져있었다. 형은 역시 농구합숙훈련이 있어서 나중에 간다고 했다. 형의 방에 들어가 조용히 앞으로의 계획을 위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종항 교수를 만나 방도를 지도받아야 하겠다고, 잠정적으로 결단을 해두었다. 정오 사이렌이 불고 얼마 안 되어 이모가 오셨다. 대청으로 올라오시면서 낯선 남자구두를 보고 손이 왔다고 아시고, “누가 왔는가뵈.” 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형의 방문을 열고나오며, “아지매, 재구가 왔소. 나도 방학했다고.” “아이구, 방학하자말자. 막바로 왔는가뵈.” “그래 우리 이모가 제일로 보고 싶어서 숨도 안 쉬고 안 왔나.” “아이구 이 기특한 것, 우리 선생님.” 하고 놀린다. “선생님이고 뭐고. 인자부터 공부해야지. 이번에는 그것 알아볼라꼬.” “학교 선생은 우짜고?” “학교에 다시 다니려면 그만 두어야지.” “그래 학교는 어디 정했나?” “아니 지금부터 알아볼라꼬.” “아이고, 우선 점심부터 챙겨야지. 규야!(이종누나의 이름). 점심 우째 됐노?” 좀 있다가 점심상이 나왔다. 나도 바빴다. 그래서 그냥 불문곡절, 퍼 넣기 바빴다. 점심을 챙겨 배속에 넣자 나는 일어나, “아지매, 내가 바빠서 먼저 나간다. 갔다 와서 이야기하자.” 라고 말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방을 나와 이종항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은 계셨다. 반가워하시면서, “안 선생, 아니, 이제 안 군이라 부르겠네. 안 군, 결단이 빨라서 좋네. 나 지금 포정동 도청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대구야간대학」이라 부르는 대학에 있는데, 오후 강의는 3시부터야. 지금 대봉동이라 했나. 거기에서 걸어서 한 15분? 아니면 20분이면 충분할 거야. 기다리겠네.” 라고 하셨다. 나는 큰길로 나와 중앙로로 향했고 먼저 도청을 찾았다. 도청 청사를 지나 바로 담으로 이웃한 이층짜리 바라크인데 벽체는 나무판자에 검은 콜타르를 칠했고 양철지붕이었다. 교문인지 그냥 문인지를 지나 좀 공간이 있는 마당에 들어서니 그 왼편에 그 허술한 건물이 서있었다. 그 안쪽에는 단층의 교실인지 여러 개의 방이 있다. 여기가 밤에는 「대구야간대학」의 강의실이고 낮에는 「대구사범대학」과 「대구대학」이 강의실로 빌려 쓰고 있었다. 당시 학교의 건물은 모두 징발되어 군부대가 막사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서 대학이고 중학교이고, 심지어 초등학교 교사까지 모두 징발되어있었고 모두 가교사라는 허술한 판자집 교사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교문에 붙은 수위실에서 이종항 교수님 면회를 부탁드렸다. 수위는 좀 전에 부탁을 받았다고 하면서 계신 곳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계신 방에 기척을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선생님은 웃음을 가득 띠우시고 일어나서 나를 안내하여 맞은 편 소파에 앉도록 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를 나에게 묻고 또 의향도 물으시면서 결론적으로 정리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지금, 안 군이 인정받을 수 있는 학력은 중학교 1학년 1학기 학력뿐일세. 그것 가지고는 어떤 수를 써도 대학에 입학할 자격은 될 수 없네. 그러니 중학교 6학년, 올해부터는 고등학교 3학년 졸업장을 받아오는 것만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네. 요즘은 이런 방식은 내가 권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가짜 졸업장 또는 재학증명서를 만들어서 바라는 학년에 들어가고 졸업하기도 하지만, 안 군은 실력이 있으니 그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 졸업을 하라는 것이야. 그것은 어떤 고등학교이건 들어가서 졸업을 하면 되는 것이야. 자네가 그것을 찾아서 해보라는 것이야. 남들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중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온단 말일세.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의과대학에도 들어가고, 의사도 되고 하고 있거든. 아무튼 내가 안 군 자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만 있다는 것뿐이라네.“ 이런 말씀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시는 것은 아니리고 믿습니다. 제가 그 길을 뚫어 기어이 내년에는 선생님을 대학에서 만나 뵙도록 해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나왔다. 이종항 선생님은 나를 배웅하시면서 내 어깨를 뚜드려주시면서 “꼭 한 번 해보라는 말일세.” 나는 그길로 나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누구와 의논을 할까 생각하다가 이런 문제는 ‘재치가 있는 사람이라야’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바로 『평화당』의 상정 아재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도청 앞으로 나와 「한국은행」 대구지점에서 중앙로를 건너 오른편으로 굽어 곧 사거리를 건너 상정 아재의 상점 「평화당」으로 갔다. 마침 아재는 계셨고 나를 반가이 맞았다. 만난 반가움의 인사를 끝내고, 나는 이종항 교수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했다.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씀했다. “재구 이사람. 꼭 한 사람이 있네. 내가 한번 부탁함세.” 라고 했다. 그분은 못골 동네, 나의 외가 종손 집안의 사람으로 나이는 훨씬 많아도 나에게는 형님 항렬로 김채영(金彩永)이라는 분이다. 쇠뿔도 단김에 뽑는다고 지금 당장 가서 만나자는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영남중학교」의 서무과였다. 김채영 형님은 전화를 받고 어머니의 아명을 대고 말하고 그리고 오랜만이니 만나자고 했다. 김채영 형님은 방학도 했고 좀 조용하니 좋다고 했다. 한 30분 쯤 되자 「평화당」 상점으로 왔다. 가게는 상정 아제의 생질인 형에게 맡기고 우리 셋은 가게의 다락방 같은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에 올라가서 좀 전에 이종항 교수가 말한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김채영 형님은 나를 한참 보다가 이야기했다. “하기사 요즘 학력이고 뭐고 있나. 힘센 놈이 바로 학력도 되고 있으니. 이북내기들은 『이북5도청』에서 위조 「재학증명서」에 도장만 찍어주면 진짜가 된다네. 그런데 실제 학력은 ‘구구단’을 못 외니 ‘초등학교’ 3학년도 안되지. 그런 놈도 중학교 6학년에 들어서 졸업장을 타고 나가서 대학으로 들어간다네. 재구 자네야, 자네는 고향 밀양에서도 그리고 구지에서도 소문이 자자하지. 한번 해보지. 교장에게 천재라고 말해서 학력인정을 진짜로 해보라고 할 게.” 라고 앞장서 나섰다. 나는 형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님, 고맙구마. 형님과 상정 아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할 게요.” 채영 형님은 말했다. “내가 사전에 교장 선생에게 네 자랑을 여러 번 해놓아 교장이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놓고 해야지. 그러면 교장은 교무실에 데리고 가서 실력을 검사하려고 할 걸. 그때 마음에 안 들면 너는 도리가 없고, 나는 정말 신용이 떨어지지. 나는 자네 소문만 믿고 하는 걸세. 그러니 8월 20일경에, 새 학년 시작 한 열흘쯤 남기고 하자고.” 이리하여 8월 20일에 교장을 만나도록 주선해두기로 ‘못골’의 형님은 말씀했다. 구지에 돌아온 나는 하 선생님이 계시는 사택의 공부방에서 불철주야 책상머리에 붙어살았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는 8월 19일에 대구로 갔다. 대구에 도착하자 바로 상정 아재의 가게 「평화당」에 갔다. 아재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재는 못골의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8월 20일 오전 10시에 교장과 만나기로 했다. 그날은 상정 아재를 따라 동인동에 새로 장만한 집으로 갔다. 보통 중산층이 사는 기와집으로 사랑채가 한태 붙은 기와집이다. 정침은 가운데 청이 있고 안방은 두 간반이나 되는 큰방이고 두간 반의 대청 건너 건넌방이 두 간방이고 앞에는 퇴청 반간이 미닫이로 들고나고 할 수 있다. 큰방 앞에 바로 정주간이 한 간이고 그 앞에 방이 두 개가 있는데, 앞에는 퇴청이 있어 들고나기가 되도록 미닫이로 되어있다. 사랑채로 되는 이들 두 방에서 바깥쪽에 있는 방은 바로 상정 아재의 아버지, 나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매원 할아버지의 빈소로 되어있었다. 매원 할매는 당시에 예순이 좀 못된, 하지만 당시로는 상노인이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절을 하고 인사를 했다. 거기에는 상정 아재의 누님이 당시 「대구의과대학부속 간호학교」의 담 벼랑에 붙여서 판잣집 잡화가게를 지어 가게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데리고 자기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나를 반가워했다. 아무튼 그날 나는 이모에게 전화를 해서 말씀드리고, 그 빈소방 옆에 있는 방에서 잤다. 그 이튿날 8월 20일, 나는 남산동에 있는 「영남중학교」 가교사로 갔다. 「영남중학교」 본교사는 당시 「육군포병사령부」가 접수했고, 중학교 1, 2, 3, 4학년은 그 교사의 운동장 서편에 있는 교사에 수용되고 있고, 5, 6학년은 「영남중학교」의 전신인 「연남전수학교」의 교실 2개짜리와 가운데 교실 반도 못되는 직원실로 된 그 전수학교의 교실을 쓰고 있었다. 1951년 3월부터 학제가 개편되어 중학교는 3년제로 통일되고 3년제의 고등학교가 생겨났는데 6년제 「영남중학교」는 3년제 「영남중학교」와 3년제 「영남고등학교」로 분할되었다. 그래서 내가 입학한다면 새로운 학제에 따라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되는 것이다. 나는 이 전수학교의 교사의 교무실에서 김채영 선생을 만나도록 약속되었고 우리들은 만났다. 10시가 되자 김채영 선생은 교무실 안쪽 문을 열고 어딘가로 나갔다. 좀 있자, 눈이 위로 쭉 째진 길쭉하고 살집 많은 얼굴의 50대의 초로의 분이 교무실로 들어선다. 교무실에 있는 교사들이 인사를 했다. 나는 즉시 교장임을 알았다. 교장은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김채영 선생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말하던 그 사람인가?” “예, 그렇습니다.” 교장은 나에게 말했다. “이리 좀 와봐요!”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그의 가까이에 갔다. 교장은 교무실 전체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 사람이 우리학교 3학년에 편입하려고 지망하고 있는데, 여러 선생님이 시험을 해서 3학년 공부를 할 수 있겠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교감 선생님이 맡아서 시험을 보아주시오.” 라고 말했다. 참으로 정감이 가는 인상을 하신 50대 후반의 선생님이시다. 먼저 자기 곁에 오란다. 선생님은 나에게 종이를 한 장 주고 자기가 미리 적어둔 종이쪽지에 있는 문제를 내주었다. 「처용가」(處容歌)의 이두가사(吏讀歌辭)를 주고 번역하라는 것과 그밖에 서너 문제가 더 있었다. 다른 문제는 기억이 안 난다. 한 20분 좀 넘어 문제의 답을 다 썼다. 교감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 만족인 것 같다. 이 교감선생님은 나를 몹시 아껴주신 강창덕(姜昌德) 선생이고 나중에 이름을 강복수(姜馥樹)라고 개명했으며 청구대학, 나중에는 영남대학교의 교수가 되셨다. 다음에 수학선생이신데 나중에 안 이름이지만 석종구(石鍾九) 선생님과 이원복(李源複) 선생님이셨다. 고등대수, 해석기하, 미적분학, 논증기하학 등 문제는 고루고루 내었다. 30분 쯤 걸려 모두 풀었다. 물리, 화학, 생물, 문화사, 국사 등, 그날은 이 선생님, 저 선생님 곁에 가서 의자를 곁에 놓고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영어였다. 이름은 나중에 알았지만 문덕길(文德吉) 선생님이 문법을, 노봉열(盧鳳烈) 선생님이 강독을 맡아 시험을 했다. 그런데 나는 형편없는 답안을 내어놓아 두 선생님에게 실망을 주었다. 오후 3시쯤 되어 시험을 마쳤다. 교장 선생님과 김채영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좁은 직원실에는 시험에 관련한 선생님들이 죽 둘러앉았다. 제일 먼저 수학선생님이 평가했다. 석종구 선생이 말씀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수학은 지금 당장 고등학교 교단에 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라는 말로 결말을 지었다. 그리고 모든 과목의 선생님은 모두 합격을 주었는데, 영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 둥했다. 문덕길 선생은 말씀하셨다. “영어는 지금 중학교 3학년 정도는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합격을 주기에는 너무 모자랍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만 틀렸구나.’라고 생각하고 실의에 빠졌는데, 곁에서 석종구 선생님이 말씀했다. “지금 중학교 6학년 학생을 데리고 와서 시험해보면 이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보다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걸.” 그래서 나는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영어 선생님들을 향해 말씀드렸다. “선생님들께,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시험에 통과시켜주시면 제가 졸업할 때까지 6학년의 영어실력을 가지도록 공부하겠습니다. 이 시험의 결과를 보류하신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학년말의 시험에서 그 결과를 보이도록 공부하겠습니다. 이를 제가 다짐합니다.” 교장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이 사람이 영어 낙제생이라 생각하고 넣어주고 영 안 되면 그때 낙제시켜 졸업장을 안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만 입학시킵시다. 문덕길 선생.” “아이구,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우짜겠습니까? 교장선생님의 의견대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해서 결말이 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새 학년에 개정된 학제에 따라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입학하고부터 나는 영어만 공부했다. 급속도로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 당시 수험공부와 자습을 위한 책으로 『삼위일체의 종합영어의 신영구』라는 약 500페이지 쯤 되는 책을 선정하고 그 책 안에 있는 내용과 그 예문까지 몽땅 외워버렸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공부하니 날로 실력이 올라갔다. 당시 영어시험은 매주 한 날에 시험을 쳤다. 점수가 날로 올라갔다. 입학하고 첫 실력고사시험에 13점밖에 못 받았다. 그것이 날로 성적이 오르니 혹 부정은 아닌가 하고 문덕길 선생은 시험 때 아예 내 책상 곁에 의자를 두고 딱 앉아서 감시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를 아주 좋아하셨다. 한겨울동안 나의 이러한 노력으로 나는 근시를 얻었고 근시안경을 끼게 되었다. 집에서 나의 학비를 감당하려면 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일 꺼리를 구해야 했다. 마침 「영남고등학교」 편입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고 이종항 선생님을 방문했다. 나의 이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셨다. 학교는 들기는 했으나 그 학비를 감당하기에 부모들이 애를 태우게 될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학비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도 있으면, 하고 무심중에 이야기한 것을 마음에 담아 두셨는지 어느 날 나를 부르셨다. “내가 안 군을 부른 것은 내가 오래도록 단골로 글을 쓰는 『백영사』라는 출판사가 있는데 교정부에 결원이 생겨 그 일을 자네가 하면 학비는 해결되는데 어떤가, 해볼란가?” 나는 흔쾌히 응했다. 그 수입으로 내 학비와 하숙비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 하학 후 포정동에 있는 『백영사』(白英社) 편집부에 가서 교정 일거리를 가지고 와, 그 교정을 마치고 나면 저녁 9시 쯤 되고, 그 다음에는 영어공부가 끝나면 새벽 3시 쯤, 7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영사』 편집실에 교정지 갖다 주고 새 일거리를 다시 가져오기. 그해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빈소방과 한 온돌이라서 군불을 안 땐다는 것이다. 그 냉방에서 삼한사온의 ‘삼한’일 때는 잉크병이 얼어버려 쓸 수 없는 지경이었고 나의 손등에는 얼음이 박혔다.(주1) 그 한 겨울을 지내자 나는 근시가 되어 도수 높은 근시경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의 시간에 관해 이해심이 없는 상정 아재 집에, 한 달에 쌀 한 말이라는 좀 헐한 하숙비 대신에, 그 바쁜 가운데 지내주어야 하는 빈소의 상식제사, 정말 나에게는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었다. 1월에 들어 대학입학에서 어느 과를 택할까 할아버지의 조력을 얻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네가 기억력도 비상하고 해서 의학을 공부했으면 하지만 학비에 무리가 간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학문으로서는 사회의 병 치료의 이론인 「정치경제학」 공부를 했으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탄압받으면서 살아야 하겠고.....” 라고 주저했더니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 지금의 체제에서 사회과학은 진리는 고사하고 체제의 허위를 옹호하는 반민중적인 이론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그래야 이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가 수학에 남달리 이해가 빠르더구나. 모든 과학과 학문은 수학적 논리, 형식논리로 그 기초를 구성하고 있지. 그래서 수학은 어떠냐?” “예, 그것 참 좋습니다. 저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재미가 있는 학문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학비도 덜 들고, 졸업 후에는 일자리도 쉽고. 예.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학과로 지망하게 되었다. 1952년 1월에, 나는 입학시험원서를 「경북대학교사범대학수학과」에 지망했고 합격하여 장차 졸업하여 수학을 가르치는 교원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이제 전쟁으로 조국의 분단은 항구화되었고, 그 갈등이 전쟁으로 더욱 그 골이 깊어가기만 했다. 이런 동족상잔의 피와 살덩어리로 청년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부모들은 자식을 하루라도 더 지키려고, 징집을 연기받기 위해 대학으로 보내려고 논 팔고 소 팔고 아우성이었다. 대학 4년 동안만이라도 군대에 가지 않으면 그 동안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빌면서. 이를 틈타 교육모리배는 기승을 부렸다. 허술한 교사와 시설로 곳곳에 대학을 만들었다. 일제 때 지주의 자식들이, 일본에서 놀이삼아 대학을 다니며 졸업장이나 받은 자들이 그때 배운 학문의 노트를 펴들고, 심지어 군국주의 철학의 노트를 펴들고, 교수라면서 엉터리 같은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의 대학에 1월 하순의 어느 날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어머니를 나의 학비를 위해서 박진목 씨의 「미곡창고」 옆의 공터를 갈아 고추 모를 심어 빨갛게 익은 고추를 추수하고 정성을 들여 햇볕에 말려 장날에 팔아 등록금을 장만했다. 「사범대학」이라서 입학금, 수업료가 없어서 다른 대학 등록금의 반값도 못되었다. 어머니가 그 따가운 여름 햇볕을 받아가면서 가꾼 고추를 팔아 장만한 돈으로 등록금을 해결했다. 1952년 9월 1일,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나는 이 분단된 나라의 남쪽 사회에서 출세의 끄나풀을 일단은 잡게 되었고, 분단을 반대하는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투쟁의 나의 깃발을 내려버리고 만 것이다. ------------------- <주1> 우리가 어렸을 때 추위로 동상이 걸리면, 거기에 ‘얼음이 박혔다’는 동화적인 말로 나타냈다.
일단 이야기를 마치고 대학으로 들어갈 때는 순수이론과학인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기를 작정했다. 그것은 분단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겨레가 너무나 가슴에 아리어서 그 상황으로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겨레를 위하여 일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무것도 안하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문으로써 겨레의 창조성을 빛내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학문으로 택한 수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고 자연과 사회에서 수학적 종자를 찾아 그들 상호간에 춤추는 아름다운 논리의 예술을 인류문화의 세계에 전개해 보이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들어가서 나중에 나의 은사로 나의 학문세계에서 길잡이를 해주신 스승의 강의를 듣고, 스승이 전개하시는 논리의 예술에 흠뻑 취하여 그 상아탑 안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상아탑에 푹 파묻혀 그 바깥에서 천둥이 치건 폭우가 쏟아지건 아랑곳없이 내 혼자의 학문의 세계에 완전이 빠져버렸다. 1952년에 수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했고 56년에는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사람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전문인으로 되었고, 다시 새로운 창조물을 찾아 마치 석공처럼 논리를 조각하는 논리의 예술품을 만드는 공인(工人)으로 인정받아 그 창조물을 발표했다. 그때부터 학문의 전문인을 양성하는 대학의 강의를 교수하는 자로 되어, 전임강사, 조교수로 되어 수학적 논리의 조각하는 공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럴수록 나는 나의 상아탑에 침잠하여 그 바깥의 아우성, 그리고 인민들의 노성, 생활하는 민중들의 몸부림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아니 일부러 모르는 채 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처럼 이른바 학문에 푹 빠져, 홀로 만들고 홀로 그 안에 수학적 논리의 장난으로 날이 새고 밤이 새도록 파묻혀 있는 나에게 호된 회초리를 들이대는 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나보다 열 살이나 적은 후배 청소년 학생들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하여 도발된 청년학생들의 의거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호된 채찍을 들이댄 것이다. 정말 정신이 뻔쩍 들도록 하는 채찍이었다. 미국 놈이 만들어 준 권좌에서 영구히 권력을 휘둘러대는 무소불위의 권좌의 주인인 줄 알았던 그 이승만이 4월의 봉기로써 그 권좌에서 들려 나가도 만 것이다. 나는 이때 알았다. 그 하나는 미국 놈이 만들어준 권좌도 민중의 힘으로 부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논리는, 아무리 강력한 외세의 힘도 민중의 단결된 힘을 당하지 못한다는 것. 미국 놈을 이 땅에서 몰아내면,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를 하나로 아울러서 원래 하나였고 장차 하나여야 하는 통일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민족은 식민지상태로부터 해방되고, 온갖 무권리로부터,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학문논리의 이른바 상아탑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고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다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혹독한 탄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히 맞서나갔다. 그것은 민중의 힘을 보았기 때문이다. 민중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 군사깡패의 5.16강도정권으로부터 감옥살이를 했고, 그 깡패들의 유신정권에 의하여 대학에서 쫓겨나 나의 학문을 강탈당했고, 두 번의 사형을 구형받고, 한 번의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두 번의 무기징역을 살았다. 그렇게 무작한 탄압을 여러 번 받아도 나는 계속 민족의 통일해방을 위하여,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영원히 하나인 민족, 하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쳐 투쟁할 것이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고, 우리들의 다음 투쟁의 이야기, 그 안에서 『어떤 현대사』는 계속 쓸 것이다. 다만 그것은 적당한 시기에서 여기 이 인터넷신문 ≪통일뉴스≫를 통해 이야기 될 것이다. 오래도록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 재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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