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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차인들간의 국제교류다. 한국내 차인 교류가 아니라 중국·일본 차인들과의 교류가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차인들의 최근 관심사는 각 나라의 차의 역사성과 교류, 그리고 그 원류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가에 있다.
2001년 일본내 한국문화원들의 주선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초의차문화연구원을 초청한 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차인회들이 결집해 있는 교토, 도쿄, 고베 등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이었다. 한국문화원들은 한국-일본차 교류를 통한 문화적 교류를 시도하려는 의도로 차인들간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고베문화원에서의 일이다. 차회에 참석한 차인들은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초의차문화연구원에서는 초의 스님의 선차를 선보였다. 담백하고 간결한 느낌을 주는 초의 스님의 선차법은 일본의 차인들이 선호하는 말차의 행다와 많이 흡사하다. 그들은 초의차문화연구원의 행다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나 의문이 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차인들이 보였다. 행다시연이 끝난 뒤 그중 한 명과 대화를 했다.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맑고 담백한 행다가 참으로 격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의 스님의 행다와 우리 일본차의 행다에 비슷한 점이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 차인은 조심스럽게 초의 스님 행다에 얽힌 의문을 놓고 대화를 시도했다.
“초의 스님의 행다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우리 고유의 행다 중 하나입니다. 일본의 행다와 초의 스님 행다가 비슷한 것은 차 문화 역사가 흘러온 역사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일본 차 유파들의 행다와 우리의 행다는 크게 다를 수 없다고 봅니다. 여러 역사적 사료에서 밝혀지듯 일본문화의 많은 부분은 백제와 고구려 등 삼국의 것을 받아들인 것들입니다. 그것에 대해 일정 정도 동의한다면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보여준 행다의 역사와 원형에 대해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만약 여러분들이 백제시대 고구려시대의 차 문화 원형을 유지 보존해 왔다면 당연하게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우리도 옛 행다법을 복원, 그 전통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일본차회 인사들은 필자의 답변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필자의 역사성과 발언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읽혔다. 그들의 당혹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문화는 몰라도 초암과 말차로 대표되는 일본 차문화만큼은 충분히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행다뿐만 아니라 일본 차문화의 대표격일 수 있는 초암다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차인들이 일지암을 방문했다. 다음해인 2002년 한국문화의 달을 맞아 일본의 한국문화원들과 연결, 일지암을 방문한 것이다. 그들의 검증과 철저함에 필자는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2차세계대전의 실패를 딛고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그들의 저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2002년 5월 일본차회를 대표하는 인사 40여명이 일지암을 찾았다. 일지암 초당을 본 그들은 경악할 만큼 당혹스러워했다. 졸졸 흐르는 유천, 그리고 작고 아담한 봉창을 가진 일지암의 초당, 자우홍련사의 작은 연못과 툇마루를 본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지암 차실과 행다는 우리 전통 차문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의 스님의 선차와 차실은 여러분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행다와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행다와 일본의 행다는 뿌리가 같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본의 한국문화원에서 만났던 초의차문화연구원의 초의스님 행다가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그들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초암차실에 대해서도 그 역사성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아직도 시골 산간에 남아있는 우리 전통 초가집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일본차인들에게 전해진 충격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다. 눈앞에 자연스럽게 펼쳐진 초가집들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일상화된 삶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차문화의 자존심인 초암다실의 원형이 어디에 있었는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차문화와 차실이 아름다움의 미학 차원에서 준비되고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차와 차실은 바로 삶이었다는 것이 매우 다른 점입니다. 우리의 초가집은 삶의 여유를 즐기려는 차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삶의 전부로 그 기능성을 갖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초가집은 바로 궁핍한 삶속에서도 넉넉한 여유를 담을 수 있었던 우리 민중의 삶을 그대로 닮은 것입니다. 일본의 차실과 우리의 초가집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본의 차실은 자연에 조금 더 다가가 차를 마시려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작고 아담한 차실을 가꾸고, 차실을 감싸고 있는 봉창(덧문)도 작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초가집의 덧문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탄생했다. 제대로 된 건축설계도 없이 어림 눈대중으로 겨우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초가집인 것이다.
일본차의 핵심은 권력으로부터 회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차실과 이른바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은 이같은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지방의 토호들인 지방막부들을 동원해 일궈낸 통일의 성과로 돌려주고 분배할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도요토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황금차실이다. 도요토미는 황금차실을 만들어놓고 지방막부들이 참여한 대규모 차회를 열었다. 당시 지방의 막부들은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중앙문화에 굶주려 있는 지방막부들의 관심을 사치스러운 엘리트 차문화로 돌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문화적 갈증해소를 통해 지방막부들의 불만을 해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황금차실은 아마도 최초의 차 문화상품일 것으로 보여진다.
도요토미는 지방막부들에게 행다를 하기 위해 필요한 값비싼 도자기 문화를 조성했다. 그러나 송나라의 찻그릇은 너무도 고가여서 지방의 몇몇 막부들을 제외한 사람들의 빈약한 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도요토미는 이들을 위해 값싼 조선의 도자기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일본내의 정치적 목적이 교묘하게 배합된 도자기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의 다성’으로 불리는 센노리큐와 도요토미와의 관계도 일본 차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다. 당시 센노리큐는 일본차문화의 정신적 지주였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도자기를 판매, 이윤을 남기는 찻그릇 상인이기도 했다. 센노리큐는 청나라 도자기 판매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센노리큐의 이윤은 상대적으로 국가로 귀속될 재정에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권력과의 다툼을 피할 수 없었다. 센노리큐는 제자들이 목상을 만들어 추앙하고 경배할 정도로 거대한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이같은 현상은 당시 최고통치자였던 도요토미에게 큰 부담이었다. 죽음으로 일본차의 세계를 연 센노리큐가 탄생할 수 있는 주·객관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차실은 한발짝 더 나아가서 통치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수 있는 담론의 장 역할도 했다. 막부시대로 대별되는 일본의 무사시대는 통치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담론을 형성할 수 없는 파괴적인 권위를 담보하고 있었다. 그런 통치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워준 곳이 바로 차실이다. 일본의 차실은 평화와 담론의 공간이었다. 무사들도 차실에 들어갈 때는 칼뿐만 아니라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까지 빼놓아야 했다. 차실에서 그들은 자유롭게 정치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차실은 그런 점에서 문화아카데미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초암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센노리큐는 권력자들이 정치적 야망을 비판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황금차실과 비교되는 차실을 창조해낸 것이다. 일본초암차실의 원형은 결국 정치와 자연, 그리고 차와의 절묘한 배합에 있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교묘하게 정치와 접목시켜 당대의 정신문화를 창조해낸 것이 바로 일본 초암차실의 미학인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차실은 그러면 얼마나 많을까. 그 숫자가 통계학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많은 유파가 존재하듯 수백개가 될 듯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토의 금일암, 무마모토의 차실, 나고야의 차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100∼200년의 역사를 갖는 일본의 차실은 매우 많다. 일본통계에 따르면 현재 교토의 사찰 수는 약 2000곳에 달한다. 각 사찰들은 그 사찰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곳에 차실을 만들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교토에만 일본의 차실은 2000곳 정도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역사성을 갖지 않은 일본의 차실은 수만개가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자연을 축소지향적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차의 문화를 구현해냈다. 자연 그 자체를 삶속에 끌어들여 정서적인 보편성을 확보했던 우리의 차실과는 너무도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일지암 암주
■ 日 상국사 차실 이야기
차 교류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많은 일화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명원문화재단의 자문역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바로 상국사(相國寺) 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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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사는 태평양전쟁 후 가장 눈길을 끈 지식인 유키오의 작품무대가 됐던 금국사의 원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상국사를 방문한 명원문화재단은 우리 차의례 중 가장 아름답고 고아한 행다미를 주는 육법공양을 시연했다.
육법공양의 전통행다례를 본 상국사와 일본차인들의 눈길은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상국사에서는 두 가지 행사가 열렸다. 하나는 우리 전통다례 중 하나인 육법공양 시연이었고 또 하나는 온양의 민속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들을 전시한 것이다.
상국사는 정원부터 독특했다. 정원이 사찰의 앞에 있지 않고 사찰의 뒷쪽에 있었다. 그 정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수천년을 견뎌온 듯한 노송들이 숲처럼 우거졌고, 세월속에서 이끼가 끼고 끼어 마치 푸른 바다를 연상케 하는 바위틈을 타고 흐르는 작은 샘물은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아름다웠다.
상국사의 차실은 그 사찰의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방장실이었다. 방장실 자체가 바로 차실인 것이다. 상국사의 방장은 그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차로서 접대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법(法)도 논하고 있었다. 상국사의 방장 스님은 찾아온 손님들이나 제자들에게 직접 말차를 우려내 권한다. 찻물은 뒤편 정원에서 천년 넘게 바위 틈에 흐르는 물을 사용했다. 자연과 차에 대한 그들의 미학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완 역시 매우 진귀했다. 아름답고 품격이 있어보이는 녹유다완을 준비한 방장 스님은 우리에게 물었다.“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한국땅의 작은 연못은 매우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그 작은 연못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바로 연못에 피는 수련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수련의 문양 같은 아름다운 말차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 방장 스님은 검푸른 하늘을 아름답게 밝히고 있는 은하수가 두둥실 떠있는 것처럼, 또한 별이 아름답게 떠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별빛 같은 말차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참으로 쉽게 맛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다. 일본 차실이 갖는 정신적인 권위와 풍부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차실은 매우 아담하고 담백했다. 전형적인 다다미방이었으며, 차의 비조로 불리는 백장선사의 초상화와 백제향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상국사의 방장 스님이 직접 주관한 차회는 안타까움을 던져주고 있었다. 저 멀리 임진왜란이라는 처절한 민족적 상처 속에서 탄생한 찻그릇으로 보여준 저들의 차 정신 속에 우리의 거친 삶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친 삶 속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삶이 싹트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조선 찻사발들은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보면 그곳에는 우리의 잃어버린 피와 땀, 그리고 도공들의 쓸쓸한 영혼이 아직도 우리곁을 떠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탄생한 조선 찻사발들로 일본의 차인들은 차문화의 품격과 역사성을 높이고 있다. 그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 탓에 한 사람의 차인으로서 한 사람의 민중으로서, 차회 내내 영혼을 속절없이 태우고 있었다.
끌과 망치로 새겨 낸 '부처의 진리'
<중앙일보 2006/2/4/토/종교21면>
"중은 모름지기 세 가지 기본적인 일, 즉 염불.참선.법문만 아니라 생산적인 일 한 가지 씩은 꼭 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름침을 받들어 끌과 망치를 잡고 서각(書刻)수행을 한 지 어언 20여년. 서각과 선(禪)판화의 고수인 혜안 스님이 9~18일 서울 사간동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일획일각(一劃一刻)'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연다. 수필집 '그래, 떠나보거라'(열린박물관 간)도 펴냈다. 전시 작품은 자작나무와 산벚나무를 이용해 3년여 걸려 만든 금강경 경판 20장을 비롯해 반야심경 경판, 병풍 형태의 심우도.십이간지도.단청 문양, 선판화 등 150여 점. 경판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 과정도 전시한다. 자작.산벚 두 나무는 바로 해인사 법보전에 존치된 팔만대장경의 주재료다. "불교 서각은 부처님의 진리를 새기는 행위로 곧 수행의 방편이며, 만들어진 ?! 徘갠湧? 또 다시 포교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혜안 스님은 이런 믿음과 함께 불교미술 차원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한 서각을 선보인다. 고리금.쌍줏대금 등 단청 문양의 여러가지 형태에서 그런 시도를 드러내는 게 대표적이다. 선판화를 간결하되 만화적 요소를 경계해 만들며, 한 줄의 화제(畵題)에도 화두가 깃들어야 한다는 원칙도 같은 연유다. 스님은 수필집에서 "칼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면 어느 사이 세상이 텅 비어 버린 듯 시간을 잊고 나를 잊어 버립니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내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서각을 최고로 치기도 합니다"라고 썼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은 "마음이 담기면 만사 진실한 법"이라며 "한 끌 한 끌 전진해 가며 그가 새긴 일획일각은 그래서 아프다"고 말했다. 혜안 스님은 불교서각화를 감상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냐는 물음에 "그냥 서서 보세요"라고 했다. 10번째 전시지만 큰 규모론 1998년 이후 두번째다. 이헌익 문화담당기자 <leehi@joongang.co.kr> |
그의 샷은 禪이었다
<한국경제 2006/2/4/토/북A17면>
우즈 성공의 힘은 불교식 참선이 키운 집중력
'타이거 우즈 성공철학' 일렉스 트레스니오프스키 지음
1997년 봄 마스터즈 대회.오거스터 내셔널 클럽의 그린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프로 전향 1년차인 스물한 살의 타이거 우즈는 이 경기에서 모든 홀을 2타 이내로 온그린, 2위와 무려 12타 차이라는 기록으로 우승했다.
전 세계가 경탄했다.
2000년 PGA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14번홀까지 밥 메이에게 1타 차로 뒤져 있던 우즈는 위기의 15번홀을 절묘하게 넘기고 승부를 연장전으로 돌린 뒤 극적인 승리를 낚았다.
같은 해 브리티시 오픈에서는 4라운드 합계 269타를 치는 동안 단 한 개의 공도 벙커에 빠뜨리지 않고 우승했다.
세인트앤드루스 클럽의 벙커 112개는 악명 높다.
2003년 베이 힐 인비테이셔널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연인이 만들어준 스파게티를 먹고 배탈이 나 경기 내내 구토를 하면서도 보기 하나 없이 2위와 11타 차로 우승했다.
미국 증시에도 '타이거 우즈 이펙트(Tiger Woods Effect)'라는 말이 있다.
다우존스 지수가 우즈의 경기가 있던 주말 다음의 월요일에는 상승하고 경기 없이 집에서 쉬었던 주말의 다음 월요일에는 하락한다는 것.실제로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우즈의 경기가 있던 21번의 주말 다음 월요일에 지수가 상승했다.
경기가 없던 주말 다음의 월요일 지수가 하락하는 비율은 80%에 달했다.
우즈는 그야말로 필드를 넘어 경제·사회분야까지 슈퍼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신이 내린 완벽한 골퍼'라는 우즈 신화의 가장 큰 내공은 무엇일까.
미국 잡지 '피플 매거진'스포츠 전문기자인 알렉스 트레스니오프스키는 우즈가 퍼팅하기 위해 그린을 읽는 모습을 보고 '참선에 들어간 스님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타이거 우즈 성공철학'(알렉스 트레스니오프스키 지음,김원호 옮김,북@북스)은 그가 40회 이상의 우즈 인터뷰와 골프 분석가의 조언,아버지 얼 우즈와 매니저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펴낸 책.골프에서 위대한 역사를 이룩한 타이거 우즈의 삶과 성공철학을 18가지로 정리한 자기계발서다.
저자는 무엇보다 우즈의 놀라운 집중력과 심리적 안정감에 주목하면서 그 원동력이 바로 불교의 가르! 침이라고 분석한다.
우즈의 정신적 스승인 어머니(쿨티다 우즈)는 ? 素?
전 데이트 중에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갈 정도로 신실한 불교신자였다.
우즈도 "어머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며 "불교의 규율은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저자는 2500년 전 부처가 녹야원(鹿野苑ㆍ사슴 동산)에서 첫 설법을 펼친 것과 프로 전향 뒤 우즈가 처음 경기한 장소가 디어 파크(Deer Park·사슴 공원) 골프장이라는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결국 '마음을 다스릴 줄 알라' '겸손이 몸에 배게 하라' '현재의 순간을 살라' '마음이 삶을 결정한다'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없다' '능력을 믿고 직관을 따르라' '때를 기다릴 줄 알라' 등 18가지 성공철학도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저자는 이를 '타이거의 도(道)'라고 부른다
■이슬람은 왜 분노하나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제112장 제2절에는 “알라는 스스로 존재하시며”란 구절이 있다. 또 제42장 11절에는 “그분(알라)과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나니”라는 성구가 있다.
무슬림들은 이 성구를 위대한 알라는 사람의 손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알라는 스스로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이므로 형체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종이에 그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알라의 모습을 묘사하려는 시도 자체가 알라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언자 마호메트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슬림들은 또 알라와 무하마드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상이 경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우상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한편 마호메트와 그의 교우들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는 알라, 마호메트, 예언자들에 대한 모습을 떠올리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여적] 만화와 종교
<경향신문 2006/2/4/토/오피니언22면>
디즈니 만화의 주인공들 못지 않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뽀빠이가 지난달 희수(喜壽)를 맞았다. 수병모자를 비스듬하게 쓰고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가 처음으로 독자들 앞에 얼굴을 보인 것은 1929년 1월17일 한 신문만화에 등장하면서였다. 여주인공 올리브가 “살려줘요, 뽀빠이”라고 외칠 때마다 통조림 시금치를 먹고 달려오는 그는 삽시간에 전 미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뽀빠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덤으로 덕을 본 것은 미국의 시금치재배 농민들이었다. 뽀빠이가 악당 브루터스를 물리칠 때마다 그 막강한 힘이 바로 시금치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930년대 미국의 시금치 소비량이 33%나 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텍사스주 크리스털시의 시금치 재배 농민들은 시 중앙광장에 뽀빠이 동상을 세워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도 했다.
만화라는 단어는 영어의 캐리커처를 일역(日譯)한 것으로 1899년 일본의 한 신문이 시사만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재미있고 우습게 세상과 인정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이야기를 만담(漫談)이라고 하듯이 만화는 세상과 인정을 재미있고 우습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그림이다. 만화책을 영어로 ‘코믹 북’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만화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때때로 만화를 만화로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과 시비를 자주 볼 수 있다.
요즘 유럽에서는 덴마크의 한 신문이 이슬람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만화로 그린 것 때문에 ‘문명의 충돌’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유럽국가들과 알라신에 ?! 淪? 모독임을 주장하는 이슬람 국가들간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예언자 마호메트를 형상화하거나 희화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슬람 교리라고 한다. 1980년대 말에는 소설 ‘악마의 시’가 마호메트를 부정적으로 그렸대서 호메이니가 작가 루시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적도 있다. 아직도 표현의 자유가 종교의 금기(禁忌)를 뛰어넘기엔 문명 간의 골이 너무 깊은 모양이다.
〈이광훈
논설고문〉
[씨줄날줄] 풍자만화 <서울신문 2006/2/4/토/오피니언23면>
육철수 논설위원 |
시사풍자만화에는 좋든 싫든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게 마련이다. 작가에게 촌철살인의 창의력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미디어 기능이 강한 신문만화·만평의 경우 더욱 그렇다. 풍자의 대상인 현상이나 인물의 정곡을 찌르고, 때론 대상 인물의 속을 벅벅 긁어 놓아야 제맛이 난다. 물론 풍자 대상이나 표현에 성역시되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어서 어디까지를 영역에 넣을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수 있겠다. 그런 연유로 만화가의 필화사건은 동서고금에서 숱하게 일어났다. 주로 당대의 권력자를 건드렸다가 생긴 일이다. 시사만화의 도입 초기인 18세기, 화가이자 만화가로 활약한 고야는 자신이 그린 만화로 인해 스페인 군주 페르난도 7세의 미움을 사서 프랑스로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19세기 프랑스에서 신문삽화가로 활약한 오노레 도미에는 루이 필립왕을 서양배(꼭지 쪽은 가늘고 밑 쪽은 넓은) 모양으로 그려 신문에 실었다가 6개월 금고형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이 1950년대 ‘경무대 변소동’(경무대에서는 변소청소하는 사람도 위세가 당당함을 빗댄 풍자만화)을 그렸다가 수난을 겪었다. 불과 십수년전 군사정부시절까지 필화사건은 다반사였고 화백들은 걸핏하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유럽에서는 지금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풍자한 만평 때문에 난리가 났다. 지난해 9월 덴마크의 어느 신문이 마호메트의 터번에 시한폭탄을 그려넣어 테러리스트로 묘사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뒀으면 일이 잘 풀렸을 텐데, 지난 1월 노르웨이 신문에 이어 최근엔 유럽 7개국 12개 매체가 게재하는 바람에 ‘문명충돌’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마호메트의 형상이나 조각조차 금기시하는데, 형상에다 조롱까지 해놨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벌써 일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해당국 대사소환과 대사관 폐쇄, 상품불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외교공관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유럽 국가들의 주장대로 신문이 표현의 자유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겠으나, 이번 일은 아무래도 도를 넘어선 것 같다. 가뜩이나 테러문제로 세계가 살얼음 위를 걷는 판국에, 풍자만화로 한바탕 웃으려다 세계 평화가 깨지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