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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함께 하는 금정산 생태교실' 열번째 테마인 '금정산의 역사' 참가자들이 금정산성 서문 앞에서 최화수 고문의 마지막 강의를 듣고 있다. 곽재훈기자 kwakjh@kookj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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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을 빼놓고 부산을 말할 수 없습니다.
금정산은 부산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6일 오후 '낙엽비'가 내리는 금정산에서
최화수 국제신문 논설고문은 '금정산의 역사'를
주제로 국제신문과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가
공동주최한 '시민과 함께 하는 금정산 교실'의
마지막 열번째 테마를 풀어나갔다.
"부산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금정산은 동해,
낙동강과 더불어 부산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금정산은 불교의 성지이자 토속신앙의
본거지죠. 금정산은 부산과 뿌리를 함께 하면서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향토문화의 토대가
됐습니다."
최 고문은 참가자들과 금정산 산성마을 국청사와 금정산성 서문을 답사하며
금정산성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금정산성은 길이 1만7377m, 성벽 높이 1.5~3m, 면적 8.2㎢(251만여평)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산성이다.
너무 크다 보니 관리의 효율을 위해 4망루와 서문 사이에 중성을 쌓을 정도다.
신라시대에 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의 산성은 1703년(조선 숙종 29년)에 쌓은 것이다. 1971년 사적 제215호로 지정됐다.
금정산성에는 성문 4개와 망루 4개가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쓸 때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해
사제지간인 두 석공에 의뢰했다.
동문은 스승에게, 서문은 제자에게 맡겼다.
서문을 만드는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렸지만
동문을 담당한 스승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웅대하게만 세우려 했다고 한다.
최 고문은 "서문은 우리나라 성문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대천천 계곡 위에 걸려 있는 수문으로
특히 아름답다"고 강조했다.
금정산에는 범어사 등이 세워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토속신앙의 성지로 자리해 왔다.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 주변 고모당을 비롯해 상계봉 일원 등 곳곳이 토속신앙의 본거지다.
"토속신앙은 주민들의 생활습속과 정신을 지배하기 마련이고 주민들은 금정산을 찾아 정성껏
제물을 차려놓고 기원함으로써 정신적인 안정을 얻었습니다." 최 고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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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국청사 입구. 국청사는 승군들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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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은 시민정신의 산실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수모를 겪을 때
부산시민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였다.
"실제 항일민족운동은 금정산의 범어사와
동래중·고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꽃피운 시민정신, 저항정신은
역사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 임진왜란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결연히 꽃을 피웠습니다.
동래읍성을 최후까지 지키다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민들이 산화했습니다.
임진왜란 후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민관이 혼연일체가 돼
국내 최대 규모의 금정산성을 쌓았습니다."
최 고문은
"부산시민들은 금정산을 오르면서 잘 참는 성격을 길렀지만 한번 터지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면서 10·16 부마항쟁, 6·10 민주항쟁 등을 예로 들었다.
금정산은 또한 부산산악운동의 모태다.
금정산 북문 주변이나 북문에서 산성을 따라 동문쪽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준행암 무명암 부채바위 나비바위 대륙암은 부산 클라이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훈련장소로 유명하다.
준행암은 1972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해 눈사태로 숨진
청봉산악회 송준행씨를 추모하기 위해 붙여졌다.
최 고문은 "전국의 유명산을 다 돌아본 뒤 첫사랑의 연인처럼 다시 찾고 감탄하는 산이
바로 금정산"이라고 강조했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찾기 때문에 그 매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으니
금정산에 애정을 가져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오상준기자 letitb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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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서문은 특이하게 대천천에 걸쳐 있어 더욱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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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산의 역사
금정산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금곡동 패총이나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온천동의 무문토기 등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금정산 능선 위의 남문 주변이나 파류봉 부근에서도 무문토기 파편들이 발견됐다.
이는 곧 금정산이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의 삶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금정산은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금정산 개산(開山)은 의상대사가 금샘을, 원효대사가 미륵암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금정산이란 이름도 금샘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금정(金井), 곧 금샘이 있기에 금정산이란 이름이 생겨났고,
그 금샘으로 하여 화엄종 10찰의 하나인 범어사가 탄생한 것이다.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이자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으로서 특징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금정산을 찾았던 것이다.
왜구가 10만 병선으로 침략하려고 하자 신라 왕은 의상대사와 함께
금정산 금샘에서 칠일칠야를 기도하여 물리쳤다.
그 공적을 기려 호국사찰 범어사를 창건했다.
금정산의 지형 특징을 '산정은 성채와 같고 산릉은 성곽과 같다'고 말한다.
금정산은 그 자체가 성채와 성곽과도 같지만,
실제로 주능선을 따라 국내 최대의 산성이 축성돼 있다.
금정산에는 고당봉 상계봉 파류봉 등 12개 봉우리가 있는데,
이들 가운데 10개 봉우리를 금정산성의 성곽이 지나가고 있다.
금정산성 성내 사찰인 국청사와 해월사는 승군작대의 승영(僧營)으로서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
성내부락인 공해 중리 죽전 세 마을도 국방부락으로서
군관아 건물과 식량 무기 탄약을 저장해 유사시에 대비했다.
지금의 성내 사찰과 마을에는 국방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현재의 산성마을에서 호국의 얼을 찾기는 어렵다.
국방부락으로서의 유적들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부산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고 계승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부산 금정구청이 앞으로 금정산성진 관아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더불어 금정산의 역사적 발자취들도 제대로 복원되었으면 한다.
최화수·국제신문 논설고문
# 숫자로 보는 금정산
◇금정산 규모
-고당봉 해발 801.5m(부산 최고봉)
-금정산성 길이 1만7377m, 면적 251만여평(국내 최대)
-금정산성 성문 남문 북문 동문 서문 4개
-1971년 금정산성 사적지정(제215호)
◇금정8경(金井8景)
1.어산노송(魚山老松)=어산교의 노송
2.계명추월(鷄鳴秋月)=계명암의 가을 달
3.청련야우(靑蓮夜雨)=청련암 대밭의 밤비 소리
4.대성은수(大聖隱水)=대성암 개울물 소리
5.내원모종(內院暮鐘)=내원암에서 듣는 저녁 종소리
6.금강만풍(金剛晩楓)=금강암의 단풍
7.의상망해(義湘望海)=의상대에서 보는 동해
8.고당귀운(姑堂歸雲)=고당봉에 걸린 구름
◇범어3기(梵魚3奇)
1.원효석대(元曉石臺)=원효암의 원효대사 좌선 터
2.자웅석계(雌雄石鷄)=계명봉의 암탉과 수탉 모양 바위
3.암상금정(岩上金井)=바위 위의 금빛 물고기 노는 우물. 금샘
※그동안 국제신문과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가 공동 주최한
'시민과 함께 하는 금정산 교실'을 성원해주신 참가자와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인터뷰 29면>.
다음주부터 일본 캐나다 독일의 효율적인 산지 관리실태를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