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CC의 실상을 밝힌다 (6) [ 2010-08-17 14:36:16] | |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차 총회 일시 : 1948. 8. 22. - 9. 4. 장소 : 네덜란드 암스텔담(Amsterdam, the Netherlands) 주제 :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참가 회원교단 : 44개국 145 회원 교단, 351명 총대 명예 의장 : 죤 알 모트(John R. Mott) 의장 : George Bell 부의장 : Franklin Clark Fry 의장단들 : Marc Boegner, Geoffrey Chakko, T.C. Chao(1951년부터 Sarah Chakko), G. Bromley Oxnam, Germanos, Erling Eiden 총무 :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
W.C.C. 제1차 창립총회는 화란의 암스텔담(Amsterdam, Netherlands)에서 1948년 8월 22일 부터 9월 4일까지 44개국, 147개 회원 교단, 351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W.C.C.를 조직하고 "우리는 다 함께 머물기를 의도한다"(We intend to stay together)는 모토(motto)와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라는 주제 하에 회의를 진행하였다.
회원교회들 다수는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이었다. 단지 30개 교회들만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교회들이었다. 이들 지역의 대다수 교회들은 자치적 독립 교회들이 아니라 유럽과 영국과 북미 교회들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유럽과 영국과 북미 교회들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여 피선교지의 교회들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성공회, 침례교, 회중교,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메노나잇, 퀘이커 교회, 모라비안 교회,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 구가톨릭, 구세군 등의 교회들이 참석하였다. 이 교회들 중 가장 오래된 교회들은 동양정교(Oriental Orthodox)의 4대 총교구 즉 알렉산드리아 교구, 안디옥 교구, 코스탄티노플 교구, 예루살렘 교구와 동방정교(Eastern Orthodox)의 그리스 정교, 러시아 정교, 미국 정교 등이며 구세군 같은 신생 교회들도 가담하였다. 로마 천주교와 러시아 정교를 제외한 대다수의 교회들이 참여한 편이다. 이 총회에서는 개신교들의 연합에 관한 열망을 품고 W.C.C.의 헌장, 회원의 자격, 협의회의 성격(Constitution Conditions for membership, nature of the Council) 등에 관한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W.C.C.의 본질, 특성, 회원교회들과의 관계 등은 1950년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개최된 W.C.C. 중앙위원회에서 채택하였다. 이것을 토론토 성명서(Toronto Statement)라고 한다.
이 때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관석 목사와 청년 대표로 엄요섭을 참석케 하였다. 그리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주제 :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주제 하에 4개 분과 위원회에서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들을 토의하고 보고서를 채택하고, 시행토록 권고하였다. 제1분과 신앙과 직제 :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우주적 보편적 교회(The Universal Church in God's Design) 제2분과 선교와 복음전도 :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교회의 증거(The Church's witness to God's Design) 제3분과 생활과 봉사운동 : 교회와 사회의 무질서(The Church and the Disorder of Society) 제4분과 : 교회와 국제적 무질서(The Church and the International) 등 4개 분과위원회로 나누어 토의하였다. 이 총회의 주제는 바르트(Karl Barth)와 다드(C. H. Dodd)가 제시하였다. 칼 바르트는 신정통(Neo-Orthodox)신학자요, 다드는 자유주의신학자요, W.C.C.총회 대표자들 다수가 자유주의자들이었으므로 하나님의 계획보다는 정치적 무질서가 주관심사였다. 그들은 영혼구원보다 사회․정치․경제문제 등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물론 그때는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결된 직후로서 나치(Nazis) 독재가 패망하여 화란에서 철수한 후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의 모임이었으므로 전후(戰後) 재건의 기대감을 안고 축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음은 이해가 간다.
그때는 미국의 경제적 원조로 유럽이 재건되던 때이다. 그 때는 또한 냉전(Cold War)이 구축되기 시작하던 때이었다. 그러한 때에 W.C.C. 총회 내에서는 이념적․정치적․기독교 윤리적 측면에서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방 공산권 대(對)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 자본주의 논쟁이 심화되던 때이었다. 이런 때에 W.C.C. 총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념)를 모두 거절하여야 한다"고 한 후 W.C.C.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정죄하는 비판적 성명서를 채택하므로 W.C.C.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에 편중하였다.
※바르트(Barth, Karl)는 1886. 5. 10.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태어나 1968. 12. 10. 바젤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신학교 교수로 20세기 개신교의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에큐메니칼운동의 기수였다. 바르트는 다드(C. H. Dodd)와 함께 W.C.C. 제1차 암스텔담 총회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무질서"를 반대로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으로 뒤집어 놓았다. 바르트는 또한 개신교회들과 가톨릭교회와 대화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한층 더 격상시킨 자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1919년)과 13권의 교의신학(Dogmatic Theology)을 위시하여 수많은 논문들을 썼다.
※다드(Dodd, Charles Harold, 1884. 4. 7. - 1973) 다드는 영국의 자유주의 신약신학자, 에큐메니칼운동가로서 바르트(Barth)와 함께 W.C.C. 제1차 총회의 주제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을 제시하였다. 다드는 1884. 4. 7. 웨일즈(Wales)의 렉함(Wrexham)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포드(Oxford) 대학교에서 고전문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0년부터는 맨체스터(Manchester)대학교에서, 1935-49년까지는 캠브리지(Cambridge)대학교에서 성경비평과 성경주해를 강의하였다. 다드는 영국․유럽․미국 등지에서 강의하고, 20권 이상의 저서들과 70편 이상의 논문을 쓴 20세기 중엽 영국 신학계에 큰 영향(부정적)을 끼친 사람이다. 다드는 구약에 약속한 하나님의 왕국과 왕국의 도래(임하심)에 관한 예수 자신의 말씀은 예수가 도성인신하므로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소위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하였다. 그는 왕국의 현세성과 내세성에서 내세성은 경시하였다. W.C.C. 제1차 총회 종합보고서 제1분과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보편적 교회"에서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교회의 일치․연합 문제를 논의하였다. 제6항 "세계교회협의회"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큐메니칼 운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비평(A Critique) 위와 같이 W.C.C.는 W.C.C.에서 주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W.C.C. 제1차 총회 종합보고서 제3분과 "교회와 사회의 무질서" 제4항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왜 … 공산주의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강한 매력을 지니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에게 많은 힘을 갖다 주는 부정의(不正義; 불의)에 반대하는 군중의 폭동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파악해야 한다. …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많은 젊은 남녀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인간의 평등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한 비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또 공산주의는 가난과 불완전으로부터의 구원의 수단이라고 보고 있는 세상임을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 … 공산주의의 무신론과 반종교적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허위적인 기독교 사회의 얼룩진 기록에 대한 반동이라는 사실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 … 공산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도덕적․심리적 공허감을 채워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기독교회들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을 모두 거절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거짓된 추측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여야 한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경제정의를 강조하며 … 자본주의는 자유를 강조하면서 … 이것 역시 거짓이 드러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의 병폐보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훨씬 더 심하다고 하였다. 제4분과(Section 4) "교회와 국제무질서" 제1항,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제2항, "기독교는 어떤 정치적 체제들과도 동일시 할 수 없다 … 모든 종류의 독재와 제국주의는 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인권․기본적 자유, 특히 종교의 자유를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이 W.C.C.에서는 공산진영의 대표들과 자유진영의 대표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특히 로드마카(Hromadka)와 덜레스(Dulles)와의 논쟁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로드마카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반면에 덜레스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였다. W.C.C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죠셉 로마드카(Josef Hromadka)는 W.C.C 제1차 총회에서 "지금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가 전통교회와 서양문명이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사회의 비전(vision)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극도로 찬양하였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미국 장로교 대표들 중 한 사람인 죤 F. 덜레스(John Foster Dulles, 후에 미 국무장관이 됨)는 공산주의는 세계 평화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하면서 크게 반박하였다. W.C.C.는 처음부터 사회복음, 사회구원, 사회주의,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 건설, 기구적․조직적․유형적․비성경적 교회연합 등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며, 공산주의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토론토 성명서(Toronto Statement) - W.C.C. 중앙위원회 (1950. 7. 8 - 15, 카나다 토론토에서) 제목 : 교회․교회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The Church, the Churches, and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48년 8월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제1차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나 W.C.C.의 본질(nature), 특성(characteristic), 회원 교회들과의 관계(relationship) 등에 관한 본질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들은 1950년 카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W.C.C. 중앙위원회에서 발표한 "토론토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토론토 성명서는 W.C.C. "신앙과 직제위원회" 총무 올리버 톰킨스(Oliver Tomkins : 영국)와 W.C.C. 제1대 총무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 : 미국)가 초안을 작성하고,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토론토 성명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W.C.C.는 W.C.C.의 근본적 본질과 특성에 대하여 "… 이다"와 "… 아니다"로 규정하였다.
부정적인 면에서 W.C.C.는 … 아니다(What the World Council is not). ① 세계교회협의회는 초대형 단일 교회(one super church)가 아니며, 결코 되어서도 안 된다. ② 세계교회협의회의 목적은 회원 교회들의 통합(union)을 주도하는데 있지 않다. 교회의 연합을 위한 연구․토의․결의하는 것 등은 자체 교회들의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③ 세계교회협의회는 어느 교회의 한 특정 개념에 근거할 수 없으며 근거해도 안 된다. ④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교회는 교회의 개념에 대한 자체의 개념을 단순히 상대적으로 다른 교회에 적용하지 않는다. ⑤ 세계교회협의회 회원 교회들은 교회 연합의 성질에 관하여 어떤 특정한 교리의 승인을 적용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면에서 W.C.C.는 … 이다(What the World Council is). 1. 세계교회협의회(W.C.C.) 회원 교회들은 교회들 간의 대화․협력 그리고 공동의 증거는 "그리스도는 몸(교회)의 신적 머리(the Divine Head of the Body)"라는 공동인식에 근거하여야 한다. 2. 세계교회협의회 회원 교회들은 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Church of Christ is one)"라고 믿는다. 3. 회원 교회들은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의 지체됨보다 더 포괄적(more inclusive)이다. 다시 말하면 가시적 몸에 속하지 않은 지체들이라도 신비적 몸(the mystical body)의 지체들임을 인정하고 교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4. 회원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교회들을 인정하고, 신앙과 직제의 다른 점들을 서로 고려한다(consider). 5. 회원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에도 참된 교회의 요소들(elements)이 있음을 인정한다(recognize). 6. 회원 교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것을 찾아 배우기 위하여 다 함께 기꺼이 의논한다(willing to consult). 7. 회원 교회들은 각기 다른 교회들의 일치성(solidarity)을 인정하여야 한다(should recognize). 8. 회원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세워지고, 교회 생활의 갱신을 위하여 서로 배우고 돕는 것을 모색함을 통하여 영적 관계에 들어간다(enter into).
비평(A Critique) "토론토 성명서"는 W.C.C.의 근본적 본질과 특성을 비교적 잘 반영한 성명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앙고백․교리․예배․형식 등이 각기 상이한 회원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는 그와 같은 성명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W.C.C.가 토론토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총재 칼 맥킨타이어 박사(Dr. Carl McIntire)를 위시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공격이 거세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2013년 W.C.C. 제10차 총회를 유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지도층 인사들은 W.C.C.를 반대하는 보수 교단들의 계속되는 성명서들에 대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으므로 W.C.C. 중앙위원회의 "토론토 성명서"(1950)를 언급하면서 W.C.C.를 미화하고, 분별력 없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기만하고 있다. W.C.C.가 토론토 성명서를 발표한지가 벌써 60년이 지났으며, 이 장구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W.C.C.는 초창기보다 훨씬 더 신앙․교리적인 면에서, 도덕․윤리적인 면에서, 사상․이념적인 면에서 더욱 배교와 불신앙으로 극도로 타락되어왔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역대 총무들
1. 제1대 총무 : 비서트 후프트 2. 제2대 총무 : 유진 칼슨 브레이크 3. 제3대 총무 : 필립 포터 4. 제4대 총무 : 에밀리오 카스트로 5. 제5대 총무 : 콘라드 레이저 6. 제6대 총무 : 사무엘 코비야 7. 제7대 총무 : 올라브 트비트 W.C.C. 총무는 W.C.C.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다. W.C.C.의 역대 총무들의 약력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W.C.C. 제1대 총무 : 비서트 후프트 (Willem Visser't Hooft, 1900.9.20-1985.7.4, 총무재직 1948-1966) - 화란, 화란개혁교회 목사 화란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목사인 비서트 후프트는 초기 많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처럼 세계기독학생운동(WSCF=World Student Christian Movement)에 발을 내디디면서 교회연합운동(Ecumenical Movement)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1900년 화란 하알렘(Haarlem)에서 태어나 레이든 대학교(University of Leiden) 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대 초반기에 "화란 학생단체 구제 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1924년에는 제네바 "기독청년면려회"(YMCA)의 청소년 담당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처음으로 W.C.C. 창설에 큰 영향을 준 기독청년 운동 지도자 모트(John R. Mott)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였다. 후프트는 1925년 스웨덴의 스톡홀름(Stockholm)에서 개최된 "생활과봉사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Life and Works)에 참석하였으며, "교리는 달리하나 봉사는 같이한다"(Doctrine Devioles, Service Unites)라는 슬로건(선전 문구)을 보았다. 후프트는 미국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28년 레이든 대학교에서 사회복음주의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에 관하여 박사 학위논문을 썼다. 후프트는 1928년 이래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의 총무로 있으면서, 1933년에는 아시아 지역 기독학생 운동 조직을 위하여 처음으로 아시아를 방문하였다. 후프트는 1937년 영국 옥스포드에서 개최되었던 "생활과 봉사사역"(Life and Work) 대회라는 범세계적 에큐메니칼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에딘버러에서 개최되었던 "신앙과 직제대회"(Faith and Order Conference) 대회에 실행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삶과 봉사 운동"과 "신앙과 직제 운동"은 W.C.C.가 창설된 후 W.C.C. 기구의 중요 분과로 계속 활동하게 되었다. 1938년 스위스의 쥬리히(Utrecht)에서 WCC가 조직되었을 때 임시 위원회의 총무가 되었다. 후프트는 1948년 W.C.C.가 창설됨에 따라 36세의 젊은 나이에 윌리암 템플의 강한 추천으로 W.C.C.의 행정을 총괄하는 W.C.C.의 제1대 총무로 선임되어 1966년 은퇴할 때까지 총무직을 계속 수행하였으며, 1968년 W.C.C. 제4차 총회에서는 그를 명예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보쎄 에큐메니칼 연구소 대학원에서도 정기적으로 강의하였다. 후르트는 일평생 교회연합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대화가 아니라 참 연합이다. 우리 주는 모두가 서로 대화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모두가 하나되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의 1973년 "회고록"(Memoirs)과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기원과 형성"(Genesis and Formation of the WCC)은 에큐메니칼운동의 기원에 관한 가치있는 자료이다. 그는 은퇴 후에도 1980년대까지 제네바에 머물러 있으면서 W.C.C.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여왔다. 그는 제네바에서 192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방 정교(Eastern Orthodox Church)와 로마 천주교(Roman Catholic)와의 연합 운동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접촉한 W.C.C.의 설계사였다. 후프트는 W.C.C.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년의 몇 년 동안 폐기종으로 고생하고 1985년 7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2. W.C.C. 제2대 총무 : 유진 칼슨 블레이크 (Eugene Carson Blake, 1906.11.7-1985.7.13. 총무재직: 1966-1972) - 미국, 연합장로교 목사 1906년 11월 7일 미국 중부 미조리주,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도시에서 태어났으며, 동부 뉴저지주 프린스톤 시(市) 소재 프린스톤대학교(Princeton Univ.)와 영국 에딘ㅂ대학교(Edinburg Univ.)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29년에는 인도(지금은 파키스탄)라호레(Lahore) 소재 포만 기독대학(Forman Christian College)에서 교수하였으며, 1932년-35년까지는 뉴욕시에서 부목사로 1935년-40년까지는 뉴욕주 알바니(Albany, N.Y.)에서 미국 북장로교의 목사로, 1940년-51년까지는 캘리포니아 파사디나(Pasadina, Ca.)에서 목회하였으며 1951년-58년까지는 미국북장로교 총회 서기로, 1966년까지는 미국연합장로교의 총무로, 또 다른 한편 그는 1954년부터 1957년까지는 미국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 단체인 미국교회협의회(NCCC in USA)의 총무로, 동시에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W.C.C.의 중앙위원 실행위원 및 재정분과 위원장직을 겸임하였다. 블레이크는 당시 미국 장로교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1967 New Confession)의 주작성자이었다. 그는 성공회 신부인 파이크(James Pike)와 함께 러시아 크레믈린의 변호자였으며, W.C.C. 회원 교단인 러시아 정교(Russian Orthodox Church)와 밀접한 관련하에 일하였다. 그는 W.C.C.의 직원들을 인종․피부․성․교파․신앙․이념에 관계없이 골고루 채용하여 W.C.C. 기구를 한층 더 다원화하였고, 세속적 연합 운동과 민권 운동(Civil right movement에 더욱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블레이크는 미국의 흑인 민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의 워싱턴 군중 데모에 가담하여 1963년 투옥된 일도 있었다. 블레이크는 월남전 당시 미국을 침략자로 정죄하였으며, 닉슨 행정부의 요시찰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72년 65세로 그의 총무직을 정년 퇴직하였다. 1985년 7월 13일 그의 고향인 코넥티컷 주 스탬포드(Stamford, Connecticut)에 있는 자택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나 스템포드 롱 리지 유니온 공동묘지(Stamford Long Ridge Union Cementery)에 장사되었다.
3. W.C.C. 제3대 총무: 필립 포터 (Philip Potter, 1921.8.19 - 총무재직: 1972-1984) - 도미니카, 감리교 목사 필립 포터는 서인도 제도의 도미니카(Dominica) 섬 출신으로 아프리카 조상과 불란서와 아이리쉬가 합친 혼혈인이다. 그는 1921년 8월 19일 로제우(Roseau)에서 가톨릭 교인인 아버지와 개신교 교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법무부 장관의 젊은 보좌관으로서의 직업을 그만두고, 1944년에는 자메이카로 가서 캔우드 신학교(Caenwoo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학창 시절 기독학생 운동(WSCF)회장이 되었다. 네비스(Nevis) 섬에서 감리교 목사로 재직했으며, 그는 1947년 자메이카 기독학생회를 대표하여 노르웨이의 오슬로(Oslo)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 청년회의에 참석한 것으로부터 국제적 에큐메니칼 운동의 경험을 쌓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48년 W.C.C.가 화란 암스텔담에서 처음으로 조직되고 제1차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와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W.C.C. 제2차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도 필립 포터는 청년 대표들을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필립 포터는 생애의 대부분을 에큐메니칼 운동에 바쳤다. 그는 아이티(Haiti)에서 5년간 90%의 문맹인들을 위해 선교사로서 근무하고 난 후에는 1954년부터 스위스 제네바로 옮겨 W.C.C. 청년분과위원회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84년 W.C.C. 총무로 은퇴하기까지 24년 간 W.C.C.에서 봉사하였다. 그는 세계기독학생회 총무 및 카리비안과 서아프리카 교회들과의 관계를 관할하는 감리교 선교회(런던 주재)의 직원으로 있었다. 그는 국제선교협의회(IMC :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1961년 W.C.C. 제3차 총회시 W.C.C.에 흡수 통합되도록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67년 W.C.C.의 세계선교전도부(Divi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국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반대, 인권 운동,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들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깊이 개입하였다. 당시 W.C.C. 120명의 중앙위원회는 1972년 8월 16일 감리교 흑인 목사 필립 포터를 W.C.C. 제3대 총무로 임명하였다. W.C.C. 중앙위원회에서 포터(Potter)를 총무로 추천했을 때 아무도 반대없이 선출된 것은 소련 정교의 니코딤(Nikodim) 대주교가 이끄는 공산진영 대표들이 전적으로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필립 포터는 W.C.C. 총무로 선출된 직후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자신은 블레이크 박사(전 총무)가 수행해 온 W.C.C.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포터는 인종차별투쟁사업(Program to Combat Racism) 운동으로 제3세계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1977년 W.C.C. 중앙위원회에서 "공산주의가 베트남에서 승리한 것은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해방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이 위대한 베트남의 승리는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전(全) 세계 인민을 고무시키고 있다." "W.C.C.는 만일 폭력이 정치적․경제적 독재를 전복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면 그 폭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신앙을 행동으로 보고 W.C.C. 교회 연합 단체가 국제적․인종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제 분야에서 W.C.C.의 강령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크리스천들의 영적 생활은 세상에서 순종적 행동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이념을 지지하는 자,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이었다. 그는 또 1982년 1월 예배에 세례․성찬․사역(B.E.M.) 이라는 공동성찬식을 도입하고, 전통적 예배 음악을 현대 교회음악(C.C.M.)으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회의 혼합주의와 예배의 세속화를 가속시킨 사람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