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모랭이-구롱(九隴)길
1472년 김종직선생이 4박 5일 동안 지리산을 유람한다. 8월 14일 함양 관아를 출발하여 고열암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구롱길은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약 5km 구간의 상허리길 루트를 말한다. 평균 고도 1050m 고원의 지능선 모롱이를 돌아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아홉모랭이 길은 일강(一岡), 삼사롱(三四隴), 동부(洞府), 구롱(九隴)을 지나 청이당에 닿는다.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아홉 모랭이(구롱) 길 초입은 남쪽 사면 길로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른다. 숯가마터에서 50m 아래 송대 계곡의 발원지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친절한 샘이 있다. 일강샘이다.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상내봉) 방향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미타봉을 아직도 상내봉이라고 하는데 산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실계곡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와 습지를 지난다. 길은 평탄하게 남쪽을 향하고 산죽밭을 지나 작은 모랭이를 돌면 바위가 나타나는데 세 모랭이 이정표 바위이다. 이어서 네 모롱이 바위와 넓은 터를 지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阝(阜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한계였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최대한 지름길이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진주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노장대(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혹자(惑者)들이 모랭이의 숫자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 論하는데... 유두류록에서 이미 1, 3, 4, 9 모랭이를 언급하였으니, 답사자가 나머지 모랭이에 숫자를 붙이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2020년 3월 말 아홉모랭이 길을 연결했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갈 때마다 새롭다. 2년 동안 도사목(倒死木)과 덩굴을 걷어내고 묵묵히 케른을 쌓았다. 산길은 암자터에서 암자터, 집터에서 집터, 움막터에서 움막터, 숯가마터에서 숯가마터, 샘터에서 샘터, 이정목에서 이정목, 이정표 바위에서 바위, 고개에서 고개, 모랭이에서 모랭이, 돌 포장에서 돌 포장으로 길은 이어진다. 1000m가 넘은 고원지대에 5km가 넘는 인공으로 조성된 도로가 있다. 가야인(伽倻人)들이 건설한 가야(伽倻)의 고도(古道)라고 생각했지만,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가 산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산행은 심독(心讀)을 하고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탐사팀은 수없이 토론을 하고 현장을 찾아 퍼즐을 맞췄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람록 복원을 하면서 내가 최고라는 생각은 비상(砒霜)이 들어간 독약이다. 이 세상에 나만 못한 사람은 없더라. 끝. - 도솔산님-
방장문(方丈門)
김종직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길 방장문 석각 탁본(200709)
금년 3월 14일~15일 김종직 선생의 구롱(九隴, 아홉 모랭이) 길을 찾으면서, 점필재 길 복원의 속도를 더하였다. 5월 16일에는 구롱 길의 여덟 모랭이에서 조봉근 주무관이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였다. 조박사는 완폭대와 은정대 오두인 석각을 발견하였고, 석각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7월 9일 탁본 사진을 보내왔고, 7월 12일 하동으로 내려가 탁본을 확인하였다.
▣ 일 시 : 2020년 5월 16일(토) 12:00경(발견)
▣ 장 소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구롱 길 중 여덟 모롱이)
▣ 좌 표 : E 127.741100, N 35.378400 고도, 1,097m
▣ 답사자 : 8명(조용헌 박사 외 역사문화조사단 7명)
1.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길 여덟 모롱이에 있는 석각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이체자이다. 서예대자전에서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행서와 서자불명(書者不明)의 예서에 보인다. 방장문(方丈門) 필획의 주인과 석각의 연대는 미상임.
2. 方丈의 어휘에 대한 유래
1)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지리산에 대한 설명
"杜甫詩所謂方丈三韓外註及《通鑑輯覽》云: "方丈在帶方郡之南。是也。(두보의 시에서 말한 '방장산은 삼한 외지에 있다'라는 구절과 《통감집람》의 '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2)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國。方丈卽智異山。瀛洲卽漢挐山。蓬萊卽金剛山也。"(두보의 시에 있는 '방장은 삼한의 외지에 있다'는 구절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나라(조선)에 있다.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한라산, 봉래산은 금강산이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