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평생 읽은 책 중에 실존주의 계열의 소설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왜냐하면 젊은 날 허무로 향하는 죽음의 틀을 벋어날 프레임이 없어서 방황을 하다가 실존주의 계열의 소설들을 읽고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바도, 원한 바도 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운명뿐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이 쟁취한 자유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고 강요된 자유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 빼고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로 처단된 존재” 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사회과학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혼란이 찾아왔었다.
당시 민주화를 위한 투쟁들은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 시기는 분명 이념의 과잉적 분위기였지만 구조의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개인의 문제에 집착할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개인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실존'이라는 말은 자폐적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실존주의를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실존의 무대는 저 하늘나라가 아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세상이다. 이러한 책임성은 당연히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종교적 초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삶의 초월이나 미래적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재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구원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의 구원이다.
인생을 즐기기는커녕 살기도 어려워 삶이 지겨운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최고로 급한 문제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노동으로 밥 벌어먹고 택시운전사이다. 힘들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먹고사니즘에서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이어서 삶이 피곤하고 힘들어 가끔씩 인생이 빨리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두 번째는 종교적 구원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한국 기독교의 길거리 리어카 상품처럼 싸구려 복음도 있고 높은 수준의 선승들이나 추구하는 해탈까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부분은 종교적 구원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은 대부분 짝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그 자체가 구원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살아 오면서 구원을 말해 주는 십자가의 예수 보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더 피부에 닿게 느껴질 때가 많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을 이고 또 지고 올라가야 하는 인간, 여기엔 종교적 의미의 어떤 구원이나 절망은 없다. 열심히 돌을 언덕 정상에 올려 놓고 허망하게 다시 떨어진 돌을 향해 내려가야 하는 부조리한 삶이 있을 뿐.
시지프스의 신화에 실존주의를 적용해보자면 돌을 산꼭대기로 굴리고 올라가는 상태를 부조리에서 벋어나려는 인간의 의지 혹은 자유라고 한다면 "허망하게 다시 떨어진 돌"의 상태는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돌이 굴러 떨어지는 형이상학적 절망은 카뮈의 실존주의적 해석이고 돌을 굴려 올려가는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주체적 인간의 정치적 행동을 주장하는 싸르트로식 실존주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카뮈 보다는 사르트르를 더 선호했다.
영어의 engagement에 해당하는 불어에 앙가주망이라는 말이 있다. 2차 대전 이후 불란서에서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현실참여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는 앙가주망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50년대 자유당 시절에 유명한 정치깡패 임화수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해서 앙가주망(현실참여)을 하려고 하는 문인단체의 행사장을 습격해서 ‘뭐? 앵겨 주먹이라고?’ 하면서 회원들에게 주먹을 한 방씩 앵겨주었다는 사건이었다.
1966년을 기점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반문화 운동으로 히피운동이 퍼져 나갔다. 그 때부터 세상에서 소위 ‘Alternative Lifestyle(대안적 삶)’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는 ‘대안학교’라는 말이 많이 알려졌다. 즉 종교에 기초하지 않은 세속적 공동체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속적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자유로울 수 밖에 없는 나의 앙가주망인 것이다.
첫댓글 현실참여라는 실존이 공동체적 대안이 된다는 것에는 충돌이 없는 것 같은데, 여전히 공동체적 프레임이 삶의 자유와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는 고민이 됩니다. 이민자인 저희가 속한 이 사회에서의 생존과 삶의 질의 문제가 공동체적 대안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지를 또한 생각해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거 하자고 모인 것 아니겠어요? 선례가 없어서 조금 답답 하지만.
이번 주부터 TOP지에 4 회에 걸쳐 그 문제에 대하여 칼럼을 연제하려고 합니다.
'맥도날드기독교', '구원비지니스' 참 멋진 비유들입니다. 목사님의 정곡을 찌르는 적합한 비유가 대단합니다.
여기 젊은 시절(아니 어린 시절), '실존'에 취해 삶을 '비관적'으로 보았을 . . . 저는 요만한 시절 '히틀러 평전'을 읽다가 얻어터지고, 사르트르를 읽다 눈물 흘리고. . .흑흑. . .참 목사님 혹시 글 하나 삭제하시지 않으셨나요. 아침에 잠시 읽었던 것 같은데 없네요. 행여 지우셨다면 제게 살짝 보내주실 수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