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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의 오차(お茶) 그 패륜문화의 원형
한슈(藩主),다이묘(大名)모두 도노사마(殿?)라고 불리는 이들 영주들은 졸개들 앞에서는 검소하고 화기애애한 인격자 처럼 같이 놀아주지만 뒤에서는 졸개,부하들의,돈뺏고,땅뺏고 부인 뺐어 재미 보느라 정신 없었죠.
자기 졸개들 가운데 얼굴좀 반반한 여자 있으면 다 자기거죠. 뺐으니까 대신 뭘좀 줘야 조용 하니까, 뒤에서 거래할 돈이나,논밭을 준비 하는라 정신 없었죠.
그런거 논의 할때는 왠만한 졸개들은 다 내보내고 핵심측근들과 회의를 해서 비밀리에 실행하죠. 만약 이런 음모를 발설하면 가차없이 목을 자르는 겁니다. 개처럼 혹사 시키진 않지만 소,돼지 잡듯이 배를 가르게 하고 목을 쳤지요.
그러니까 졸개들 입장에서는 도노사마가 앞에서는 검소한 듯 자기들과 같이 놀아주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자기들을 무시하고 뒤에서 뭔가 일을 벌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 음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항상 두렵고 긴장, 불안 ,초조해서 가능한한 도노사마 근처에서 자기는 충성스런 개란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었죠.
혹시 지목 되어서 단둘이 영주와 마주 앉는 날이오면 백발백중 음모를 수행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참수를 당하느냐 이 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친한 친구의 마누라를 영주에 갖다 바치라는 명령에도
목숨 걸고 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죠.
영주를 둘러싸고 있는 부하들끼리 도 언제 어디서 배신의 모략에 당할지 모르므로
도노사마와 함께 오니기리를 먹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은 편치 않았죠.
이건 일본 원숭이들이 대장 앞에 충성을 하지 않으면 언제 대장측근 졸개 원숭이들에게
왕따,집단 이지메,구타 당할지 몰라서 대장의 아들딸이나 먼 친척 뻘 원숭이에게 접근하여 이를 잡아주고 맛사지 까지 해주며 갖은 아양을 떨며 같이 놀아주는 것과 거의 흡사하죠. 도노사마의 측근들도 충성 경쟁을 하면서 파벌이 생기게 되는데 강한 파벌에 안 들어가면 언젠가 지위와 명예 부,마누라,가족 전부 잃고 결국 사무라이로서 나는 순수 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배를 갈라야 하므로 (하라끼리) 같이 히히덕 거리며 웃고 지내는 평등한 모습 가운데서도 항상 소름 끼치는 우라 세계가 파놓은 함정에 대비해 자기가 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하거나,아부하기,(고마스리)로 그 속마음은 복잡한 의식구조로 겹겹이 싸여져 혼미하게 되죠.
도노사마 라는 것은 이런 무시무시한 권력의 정점에 서서 부하들의 충성경쟁을 항상
검토하고 저울질 하면서 그런 충성스런 모습이 마음에 드는 애들과는 오니기리도 같이
먹어주며 안심 시키는 거지요.
결론적으로 영주 앞에서 히히 낙락 하면서 평등하게 오니기리 같이 먹는 이졸개들은
인간으로서 자기의 의사,바램 ,주장을 완전 포기하고 주군 앞에 자기 마누라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비정한 인간 들이며 자신의 여자를 팔아 자기 지위와 명예를 유지 할려고 하는 파렴치한 들이고 인간 이하의 인간들이죠.
그렇지도 않은 도노사마도 간혹 있었고 (다떼마사무네-伊達政宗)그들이 일본의 봉건시대를 발전 시킨 것 도 사실이지만 일반적 흐름 안에 특별한 경우 였지만 그도 잔혹성에 있어선 대등 소이한 도노사마에 불과했죠 .
일본의3대 쇼군 중에 하나로 영웅으로 인정 받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小田信長)가 전국
제패 를 앞두고 평소 자기의 전국제패에 방해를 한 승려들이 사는 마을 을 토벌 하는데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고 승려는 물론 승려들의 첩과 자식들인 여자와 갓난 어린애 까지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집결시켜 목을 베는 지독한 짓을 했는데 그당시 그 성스럽다는 승려들의 이 마을은 모두가 타버린 시체더미위에 나뒹구는 어린아이들의 목잘린 시체로 말그대로 지상지옥을 방불케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히에잔야끼우찌(比叡山?き討ち)라고하는건데 일본의 유명한 3대쇼군들은
이런식으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며 공포의 대명사로 군림 해간겁니다.
쇼군이못된 다떼 마사무네도 17세 때에 노부나가의활약? 을 듣고 자기도 그 이상의 잔혹성으로 이름을 날려서 전국 제패할 쇼군이 되리라 야심의 칼을 갈며 사무라이의 길로 나섰던 것인데 그도 역시 노부나가 이상의 잔인한 수법으로 여자와 어린이들의 목을 베며 자기 이름을 과시 해나갔던 것이죠.
그러나 이런 마사무네도 결국 쇼군에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당한
다이묘 로서 그 한이 아직도 지금의 미야기켄 의 한으로 남아 있죠 .
일본의 봉건영주 들이 군웅할거 하여 전국시대를 이룰 때 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잔혹, 참혹 ,지옥 그자체 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자기들 끼리의 참혹한 역사는 교과서 에도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고 있어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전혀 모르죠.
자기들의 역사가 얼마나 비 인간적 역사였고 자기들이 영웅시하는 노부나가,토요토미,
도꾸가와등 전국의 무장영주들이 얼마나 잔혹한 살인마였는가 하는 것을 일본인
스스로가 모르고 있죠.
이런 인간 이하의 잔혹한 역사에 의해 지내온 일본이기에 주군의 명령하나에 자결이든,
731이든,위안부든 ,남경 학살에서 보여주듯 민간인 특히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 항상 뒤 따르는겁니다.
자기들의 역사 에서 길들여진데로 아무 의식 없이 해 버리고 말게 된 거죠.
사무라이들이 권력을 쥐면 결국 첩을 여기저기서 사냥해 와가지고 자기 욕심도 채우고
그걸로 권력을 과시하게 되는데 대개 한국이나 중국도 그런 역사가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좀더 분석 해보면 너무 가증스럽고 비열하며 소름 끼치는 비 인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의 국도 1호선 이라고 있습니다.
이게 왜 생겼나 하면 전국시대를 제패한 토요토미는 일본 최초의 쇼군이고 전국에 있는
영주 다이묘 들은 지방의 지역왕 이었고 쇼군과 경쟁관계 이면서 서로 적이었지만
천하대세가 기울은 터라 지방에서는 토요토미의 지방 지역을 책임 맡고있는 부하입장이죠. 그런데 이부하 들이 배신 않고 쇼군에 완전 충성해야 나라가 유지되는데 지방영주의 경우 부하들의 단결과 충성경쟁을 지역적으로 관리하기 쉽지만 쇼군이 지방의 다이묘 들을 직접 관리하며 충성을 강요하고 확인하기란 일본열도가 사실 방대해서 여간 쉽지 않았죠.
즉 언제 어디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몰라 토요토미는 상당히 불안했던 겁니다.
그래서 토요토미가 고안 해 낸게 영주들의 참근교대 라고 (?勤交代-산낀고타이)해서
교토와 자기본거지를 1년간씩 번갈아 살게 했던 것인데 이것은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통치수단 으로서 1년에 한번씩 긴 장거리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이묘들로써는 여기에 드는 비용이나 시간 등 엄청난 에너지 낭비로
쇼군에 대항할 힘을 키우는 데는 여간 불리 했던게 아닙니다. 그리고 영주들은 지방에 돌아갈 때엔 거의가 처와 자식들을 쇼군이 있는 교토에 남겨놓고 가야했는데 한마디로 인질이죠.
너희들 지방에서 까딱 잘못하면 여기 히메사마(??) 목 날라 가니까 꼼짝 말어! 이거지요. 그런 명령에 불복 할경우 한바탕 쇼군과 나라를 놓고 전쟁을 해야 할 판국 이니까 당장에 그럴 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자기번(藩-한)에서 상징적으로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히메사마와 자식을 교토에 남기고 지방에 가서 1년 지내다가 다시 교토에서 재회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주들은 1년에 한번 정도 자기 부인들을 만나러 가는데 가는 도중에 언제 다른
다이묘나 쇼군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니 엄청난 군세를 거느리고 교토까지 처자식을 만나러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거대한 행렬이 이어집니다.
이때 지난 길로 인해 자연히 만들어 진게 바로 지금의 국도 1호선입니다.
지금이라도 자동차로 오사카 교토 나고야 시즈오카,동경까지 이국도 1호선만 타면
다 연결됩니다. 동경 이후로 관동이북은 국도 4호선이죠 후쿠시마,미야기,이와테,
그리고 본토 최북단아오모리 까지 4호선으로 연결 됩니다.
오사카 이남은 히로시마까지 2호선이나 다른 국도로 연결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골서 올라온 장거리 여행에 지친 영주를 쇼군이 맞이하는
의식이 참 가관 입니다. 영주가 자기부인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 그와 때를 맞춰서 궁중에서 는 쇼군이 직접 영주부인들과 함께 황금 차실에서 차도회를(오차까이) 열고 있는 것 입니다. -(초록색 맛차(抹茶 )-우리말로는 말차라고함)를 정성스럽게 저어서 예의 바르게 마심- 다도의 일종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이 오차의 문화도 그 배경을 잘 알아 둬야 돼죠.
예쁘게 화려한 기모노 차려 입은 내노라 하는 당대 절세 미인들인 영주부인들이 무릅 꿇고 앉아 초록색 오차를 저으며 찻잔을 몇 번 돌리면서 풍미를 맛보며 마시는 기품을 통해 궁중예절을 몸에 익혀가는 거라서 별로 이상할거 없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다도회 가 우리의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죠.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는 자기 밑에서 크게 공헌한 전국 무장들 즉,영주들에게 토지나
금품등 수고비를 줘야 했는데 긴 전쟁동안 더 이상 보상할 토지가 일본 내에서는 포화상태가 되었으므로 지방영주들이 고분고분 하도록 뭔가를 주어서 달래야 했는데 그때 고안해 낸것이 차실 이었습니다.
전쟁만 했지 고품격 문화 생활에 허덕이던 시골 영주들에게 토요토미는 토지와 같은
물질적 배상이 아닌 정신적 고품격 문화를 선물로 대신 하기위해 황금다실을 만들어
영주들을 초청하여 차를 마시며 통치 이데올로기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죠.
시골 촌에서 올라온 영주들에게는 황금다실에서 쇼군과 같이 차를 마시며 정치와 담론을 논할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당시 최고로 손꼽히던 중국의 찻사발 정도는 이 영주들에게 많이 선물해서 지방에서도
차실을 만들어 격조 높은 지방왕 으로서 품위를 세워줘야 했는데 재정이 여의치 않아서
생각끝에 토요토미는 그 다음으로 값나가는 한국의 전통찻잔을 영주들에게 마음껏 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고 사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며 이 전쟁이 도자기 전쟁이다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실제 토요토미는 전쟁에 패하면서도 한국의 도공들을 수만명 데리고 건너와서 도자기를
마음껏 제조하여 정치를 안정 시켜려 했던 것입니다.
이 차실에는 사무라이들도 누구나 칼은 물론 손가락의 반지 까지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허심 탄회하게 스트레스를 풀며 평소 하지 못했던 얘기를 최고급 정치지도자들이 모여서 아무 격식 없이 차를 마시며 자유롭게 담론을 즐길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항상 칼을 지니고 다녔던 긴장된 무사들에게 있어선 당시 최고의 휴식처 였던 것 입니다.
그런데 토요토미는 가증 스럽게도 영주를 길 들이기 위해 이 다도회를 짐승과도같은
음란 파티로 변질 시켰다는 것입니다.(라이온과 같이 동물의 무리에서는 강한 수컷이
암컷 무리들을 독차지 하고 힘없는 수사자는 방랑한다.)
부인을 만나러 온 다이묘 에게 지금 쇼군사마가 부인들과 다도회를 하고 있으니 옆방에서 좀 기다리 라고 전해놓고 토요토미는 영주가 만나러 온 바로 그 부인을 다도회 실의
뒷방으로 불러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겁탈 하는 것 입니다.
자기부인을 만나러 온 영주는 자기부인이 오차는 안마시고 뒷 방으로 끌려가서
토요토미 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 차리게 됩니다.
당장에 쇼군을 박살내고 부인을 찾아 귀향하고 싶지만 영주는 감히 그런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여기는 쇼군의 안마당 이므로 자칫 하다간 몰살 당하므로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여 목숨 이라도 부지 하고 살아 돌아가기 위해 영주는 분노를 가라 앉히고 쇼군이 자기의 부인을 데리고 다놀때 까지 한마디도 못하고 오차를 앞에 두고 무릅 꿇고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짐승과다를바없는 통치행위를한것입니다.
이게 어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들 끼리 할 수 있는 행위 입니까 ? 이 더러운 짓을 당연하게 대낮 백주에 궁중에서 해도 아무도 제지하는 자가 없고 굴복하고 말았던 이 비열한 통치문화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야만문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차실에 흘러나오는 띵띵하는 일본가야금(琴-고토)의 곡조도 유달리 심금을 찢어 놓을 듯 삭막한 곡조 인 것 입니다.
다른 부인들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그냥 홀작 홀짝 이 맛차만 마셔야 했던 것 입니다.
이 맛차의 맛은 아주 씁슬 합니다. 자기들도 언제 그 신세가 될지 모르니 그 기분은
맛차의 맛과 같았을 겁니다.
일본의 오차문화가 좋다고 하기 전에 그런 배경 정도는 알아두고 마시는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차문화는 다릅니다.
시골 가난한 사람들이 초가집 짓고 뒷마당에 흘러가는 냇가를 내다보며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분으로 차를 마시며 지내왔던 것입니다.
오차의문화는 바로 이 토요토미가 다이묘 들을 다스리는데 이용했던 비열한 일본의
허위와 가공의 문화의 뿌리이자 원형 이었던 것 이며 극도로 타락한 일본 봉건문화의
허세 인 것 입니다.
이렇게 쇼군은 영주가 자기 부하들이 보는 가운데 자기 처를 쇼군에 빼았기는 수모와
좌절감을 맛보게 하여 쇼군 앞에 왠만 해서는 대항할 의욕조차 안 나도록 1년에 몇 안되는 기회를 통해서 철저하게 주군의 성스러움을 다이묘 들에 교육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통치문화를 오차문화를 통해서 펼쳐 왔던 것입니다.
쇼군의힘 앞에는 영주라도 인간이 아니다 라는 등식을 세워 가르쳤던 겁니다.
군신의 예의나 주종간의 법도를 몰랐던 야만문화 이었기에 국가를 대표하는 최상위
통치자들 간에 주종간의 법도를 세운다고 이런 비열한 행위를 했으니 이러한 토양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문화가 나올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추측으로도 알수 있는 것 입니다.
이런 일본의 문화에 대해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늘 일본은 자랑스러운 자기들의
사무라이 문화라고 방송국 마다 매일 시대극을 장려해서 방송해 대니 그런 일본에
무슨 통치이념이 있고 민주주의 사상이 있겠으며 평등이란 단어가 어울 리겠습니까?
통치문화가 이런 수준이라면 그밖에 다른분야 뭐 볼거 있겠습니까?
우리 뿐 만이 아니라 전세계 인류역사에서 이런 가증스런 통치행위를 자연스럽게
시행한 나라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16세기 봉건시대 아무리 망나니 국가라 하더라도
오늘말로 한다면 수상이 도지사 부인을 남편 앞에서 힘으로 강탈 하는
것이니 어찌 문명국가에서 가능 했겠을까요?
소설이지만 우리의 변학도가 춘향이 를 수청 들 의사를 물어보며 본인이 선택하게
하는 것과 비교해 봐도 참 우리의 문화는 양반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치가 떨리며 인간으로서의 의식구조를 의심케 하는 이런 발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곳이 일본이므로 위안부 문제도 일본 정부에서 황국신화를
이루기 위해 몸바쳐 충성하는 천황의 노예들에게 상으로써 여자를 바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결국이런 위안부문제의 근본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것을 자연스레이 하는 문화죠.
일본의 성 문화 라는것도 이렇게 위에서부터 형편없는 야만적 성문화가 일반화
되었으므로 우리나라 와는 레벨이 틀리다 는 걸 똑똑히들 알아둬야 합니다.
맥아더 가 일본의 전후를 통치할 때 천황제를 유지할려는 자들이 일본 고관의
아낙들이나 딸들을 보내 맥아더와 그 부하들을 상대로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겁니다. 명령에 고분고분 하는데는 지위고하가 따로 없었던 거죠.
이리하여 영주들은 교토에서 당한 수모를 품에 안고 자기고향에 돌아와서 분풀이
하기 위해 애꿎은 부하들의 부인을 뺐고 겁탈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곤 했죠.
쇼군이나 지방의 영주들이 부하들의 부인 들이나 첩을 얼마나 많이 뺐어 소유하고
놀 수 있는 힘이 있나 하고 서로 자존심 겨루기에 국가, 지방의 예산을 할애했으니
가마꾸라에서 에도시대 까지 이어왔던 막부시대가 끝나고 궁중을 폐쇄할 때 궁중에
쇼군의 여자들이 수천명이 넘었고 그 여자들의 의상 ,미용,품위,예절 교육에
에도정부 예산의 반을 퍼부었다고 하니 참 가관이죠.
그 수백 수천의 정실과 첩들이 거처하고 있었던 궁이 오오꾸(大?)라고 하는데
유명한 얘기가 있죠 .
(19세기말 페리 제독이 개항을 다그쳐서 개항파 들이 막부를 폐쇄하고 메이지천황을 세우고 근대국가를 세울 때 더 이상국가 예산을 여자들에게 쏟을 여유가 없으니 이 오오꾸를 폐쇄해야 한다며 계략을 꾸몄는데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었다고 하는 이 오오꾸의 문이 열리면서 잠시시골집에 놀러 갔다 오너라고 하고 난 뒤 문을 폐쇄하고 말아서 순진하게 다시 돌아왔던 수많은 쇼군의 첩들이 문 앞에서 울면서 아무리 소리쳐도 이 궁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쇼군사마의 첩으로서의 궁중생활을 끝내고 버림받은 한을 간직한 채 그 이후로는 모두기생(芸者게이샤)이 되거나 지방의 돈 많은 무사들의 첩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이 있는데 이렇게 야만적 행위를 자국 내에서 자국민끼리 가하고
당하는데 익숙 해지면서 점차 일본인 에겐 힘이 없으면 굴복 하는게 당연하고 어떤
비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도 불평하지 않고 운명 (定め? 사다메)으로 받아 들이며
힘의 우위가 그 어떤 절대선과 절대도덕을 대신 한다는 식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형성 되어 왔다는것입니다.
아무리 반인륜, 반도덕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렸던 것이므로 인류보편의 문화발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일본의문화는 흘러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힘은 상대적으로 변하므로 선과 악도 그에 따라서 변하게 되므로 진정한 선이나
절대도덕론이 일본에서는 발붙일 수 없게 되며 그들만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관이 형성
되는데 바로 야오요로즈노가미(八百万の神-8백만의신)라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일본에는 점차 선악 관념에 근거한 도덕이나,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사상이 자연히 일본문화와 융화 될수 없었고 그리하여 모토오리 요리나가 같은 에도시대의 일본유학의 대가들도 조선의 유교의 근본정신은 송두리째 던지고 모노가타리(物語)를 중심으로 유교의 껍질만 일본내에 전파하여 오늘날 만담(漫才-만자이),가무극(歌舞伎-가부끼)등으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운명론이 일본인의 생활 습관 속에 하나의 관습 으 로 몸에 배이게 되었는데 더더욱 주목해야 할점은 이러한 문화나 가치관이 일본 국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적용될 때, 즉 일본이 타 민족에 대해 힘의 우위에 설 때에도 똑 같은 논리로 타 민족에 그런 비정한 가치관을 적용하여 잔혹한 행위를 가해 왔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근대에 차별,착취,침략,강제징용,위안부동원,학살등과 같은 총체적 잔혹행위를
한국 중국과 같은 인근국가에 눈깜짝않고 할수 있었던 것도 자국의 지독한 역사적 경험을 타국가에 단순 배설,재현해 내는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 이었으므로 그런 어두운 역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도 자신들의 역사적 가치관을 되풀이 적용하여 힘이 없으면 당하는게 당연하니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입장 인거죠.
이것을 두고 국화와 칼의 저자 베네딕트는 일본인은 계층과 위치를 정해놓고 자기도 거기에 들어가 있고 남도 적당한 위치에 집어 넣을려고 한다고 분석했는데 대략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계층 보다는 사다메 (힘의우위가 행사하는 운명에 대한 복종)가 보다 더 정확히 일본인의 정서를 집어내는 표현 인것입니다.
복잡한 계층이 있어서 그곳에 적당한 자리에 있어야 안심 한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건 역사적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심층적 배경을 보면 계층이란 처음부터 없고 항상 힘에 의해 뒤집어 질수 있으므로 힘에 의한 상위자의 모든 불평등 대우에 대한 운명적 복종정신(사다메) 이 더 근본적인 일본문화의 특징이죠.-일본에흔한 지진이나 태풍등 자연재해도 마찬가지- 이런 문화에 길들여 오다 보니까 주군을 모시는 부하나 하위층 들은 주군이 없으면 불안 해지게 되죠.
즉 처음부터 끝가지 명령에 의해 움직여 오던 사람에게 명령할 당사자가 없어지는 것 보다 더 두렵고 자신 없어지는 일은 없는 상황이되어 힘의 상위가 되지 못하는 하위자 들은 상위자가 생겨야 힘이 나고 명령이 있어야 힘이 나게 되는데 이런 결과적 모습을 보고 일본의 특징이다 라고 분석들을하는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잔인하고 비열한 행 위를 우리 일본인은 줄곧 당해오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으니 너희도 힘이 없으면 이정도 쯤은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 들이라 는 겁니다.
일종의 억눌린 스트레스의 배설행위 인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타국에 대해 가해자가 되기 쉬운 문화의 배경이며 가해자로서의 죄의식까지 잊어버리게 한 일본의 양심과 도덕의 파멸을 가져오는 패륜문화의 원형 인 것 입니다. 이 어찌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토인비나 존베네딕트도 여기까지 일본문화를 분석해야 석학 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이 왜 근대역사의 한국중국 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반인륜적 악질문화를 타민족에 저질렀으며 그런 범죄 행위에 대해 정식적 사과도 않은 채 오히려 아직까지
망언을 되풀이 하는냐 하는 것도 모두 한꺼번에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본이 중세엔 한국에, 근대엔 한국,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제국에서 빚은 반인륜적 역사는 이런 자국의 반 문명적 자산을 자연히 이웃나라에 재현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그런 야만적 행위에 수긍하며 안주했으므로 그런 역사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보다는, 망언조차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관습에 자연히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자기민족 내부에서 있었던 비참하고 악질스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당한
저항과 비판의 경험이 전무한 가운데 그런 부당한 환경을 타파하는 쪽으로 역사가
흘러온 게 아니라 운명론적으로 복종하는 정체성을띠며 혁명다운 혁명이 일어나지못한채 장기간의 쇄국 정치로 인해 문화가 폐쇄되어 왔기 때문에 19세기 근대화를위한 메이지 유신 도 결국엔 서구유럽 문명의 내적인 정신문명은 고스란히 접어둔채 힘을상징하는 외적인 공업기술 문명을 중심으로만 수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은 프랑스 혁명처럼 근대 시민정신이 바탕이 된 혁명다운 혁명이 되지 못하고 또다시 전국시대나 봉건말기와 같은 가치관에 사로잡혀 힘의 우위를 절대선으로 인식하여 이웃 선린 국가였던 한국이나 중국이 근대문물의 힘에 있어 일본에 밀리자 마치 야만인 사냥하듯 인정사정 없이 유린하여 일본의 과거 봉건시대의 불평등 야만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역사를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반동적혁명 이었던것 입니다.
일본문화의 침략성과 비열함 야만성, 천인 공노할 죄를 저지르고도 조금도 반성 않고
오늘날까지 뻔뻔하게 망언을 일삼는 그 근본배경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러한 설명으로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런 어이없는 잘못된 문화의 스트레스가 타국에까지 전이되어 재현된 이후 지금까지 여기에 대해 인류보편의 양심적 반성이나 사죄, 정상적인 인간 의로서의
회개를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정 반대로 망언이라는 악순환의 구조를 연출하고 있는
일본의 병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이 스스로 자기들 의 문화역사에 대해서 그것이 반인륜적 반문화적 역사 였다는 것을 시인할 수 있는 분위기로의 의식개혁과 사회적교육이 병행 되어야 한다고 보는것입니다.
이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근대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역사를 논하기전에 먼저 일본
국내의 무참했던 봉건역사 와 근대국가의 구악습 재현 으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에대해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절대 선행 되어야 하며 이런 악습문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일본인
스스로 의 양심에 의한 보편적 비평의 힘이 일본국내에서 싹 트게될 때 자연적으로
일본의 고질적 과제인 대외 과거 역사문제도 해결의 국면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런데 얘기한 바와 같이 일본의 근대역사는 아쉽게도 서구문화를통해 자신들의 패륜적
문화에대한 조금의 반성도 없이 일본민족으로 하여금 침략하는 그것이 정당한 것임을
또다시 각성하게 하여 자신들의 잘못된 야만적 역사의 한을 타 민족에 재현해내는 방향으로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어 그것이 총체적으로 근대아시아 제국에 실현 되어버리게되었다는점에 우리는 주목해야합니다.
메이지유신의 사상의 근간이 된 계몽사상가로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등의
민족주의 사무라이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봉건시대의 악습을 떠받드는 야만문화가
거의 완벽하게 부활재생 되어 버렸던 까닭에 근대의 일본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갑자기
튀어나온 제국주의의 만행 이라기보다 잊혀져 있던 일본 봉건문화의 썩은 잔재가 부활하여 근대문명의 개방성을 통해 아시아제국에 차례로 재현, 전개 되어 버렸던것이죠.
이른바 거꾸로 달린 역사의 수레바퀴로 인해 이제껏 일본 내부에서만 곪아 터져온
무지막지하고 비정한 역사가 일본 내부에서 다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잠자고 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전개 되었던 것이 근대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어두운 역사의 전모였던 것입니다.
역사책을 많이 쓰고 읽으면서 지식을 뽐내는 학자들이 아직 확실한 처방을 못해 내지만
필자의 확실한 언급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일본의 문제 와 그 문제의 뿌리를
확실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일본을 문명의 한 축 이라는 얘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문화에 대해 평등하다느니 예절 바르다 느니 신사적 이라는 말은 도저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암울한 역사가 일본인의 의식 깊이 항상 내재 되어있기 때문에 사실상 아시아의 미래를 논할 때는 이러한 일본의 국내역사와 문화와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등 그 들의 잘못된 문화유산을 그들 스스로 정화할 힘과 능력에 대해 먼저 논의되는것이 급선무이며 이것은 일본의 전후60년을 끝낸 시점부터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시기를맞이하고 있다고 보는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본의 사상,종교 문화등 총체적인 논의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지면관계상 핵심적 부분만을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오늘날 아베 정부의 우경화 현상도 그런 관점에서 거론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아베를 위시한 오늘날 일본의 우익인사들의 한결 같은 의식은 바로 한국을 침략했던
토요토미. 그리고 대미 불평등조약의 피해를 한국과 중국,만주에서 만회할 것이 사무라이들 이 가야할 바른길이라고 주장했던 요시다쇼인 (吉田松陰),탈아 입구론을 통해 힘없고 약한 한국등 아시아를 야만인 취급 하는게 일본의 살길 이라며 정한론의 사상적 토대를 세운 후쿠자와 유기치(福?諭吉)등과 같은 반문명적 사상가의 주장들도 알고보면 이런 힘의 우위에 의한 모든 권력행사가 선이며 운명 이라고 받아 들여온 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극히 자연스럽게 재현되는 시대적 발상이란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것입니다.
그증거로 토요토미가 저지른 코무덤이 은폐 되어오다가 정식으로 일본국민에게 당당히
선전되는 시기도 바로 이 들의 활약했던 메이지시기와 일치하는점을 들수있습니다.
즉 토요토미때의 무자비한 조선침략 정신을 일본은 메이지 시대 와서 정면으로 떠받들며 일본국민에게 대대적으로 침략이 위대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국민에게 교육하기
시작 했던거죠.
임진왜란때 토요토미가 조선에서 자행한 잔인한 코베기 행위에 대해 쉬쉬해오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이후 신정부가 들어서자 마자 한국인을 야만인 취급하라는 후쿠자와의 설교하에 1879년 당당하게도 한국인양민 12만명의 코무덤을 귀무덤(耳塚-미미즈까) 으로 포장하여 토요토미를 기리는 토요꾸니 신사앞에 재건립해 과거 자기들의 선배 토요토미가 조선에 침략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과같이 이제부터 자랑스런 사무라이들의 업적을 본받아 한국,중국을 침략할때가왔다 는 식으로 일본국민들을 게몽한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지 얼마안되어 일본은 이렇게 전국민에게 사무라이들의 잔인무도한 침략역사를 노골적으로 미화하기 시작했던것입니다.
교토의 히가시구에가면 토요토미를 기리는 도요꾸니(豊國神社) 신사가 있는데
그신사안에 미미즈까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박삼중스님이 다행히도 그 한 많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10여년전 혼령을 한국으로 모시고 온 건 참으로 다행이죠.
역사에대한 이러한 호도된교육은 메이지시대 뿐만아니라 타이쇼 쇼와시대를 거쳐 태평양 전쟁 때까지 그대로 일본인의 집단적 정신의 뿌리로 명맥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이문제를 덮어둔체 지나온 전후 60년간의 일본의 경제 선진국으로서의 화려한 자화상
뒤에는 아직도 이러한 어두운 사상이 생생하게 숨어서 도사리고있으며 이것은 오늘날21세기 일본의 지성인 대부분의 가치관 임과 동시에 정치인 언론인 등 모든 관료사회 에서도 전통적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의 일본 엘리트 집단들의 일반적 국가관이 되어 버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확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요토미 식의 반인륜적 통치행위가 아무런 비판 없이 아직까지 수용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문화에 대해 일본인 스스로가 세계와의 보편적 가치관을 공유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이 결집되지 않는 한 일본문제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무의미한 것이란 점을 밝혀두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대중의 힘의 결집이 일어나지 않고는 항상 그런 야만문화의 부활은 기다리고 숨어 있다가 언제라도 다시 화려하게 부활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더더욱 냉철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볼때 작금에 평화헌법개정을 서두르고 있는 지금의 아베 정부가 바로 전후 62년간 봉인된 일본의 봉건, 메이지 시대의 야먄문화의 부활을 첫번째 시도하는 이 시대의
토요토미 의 화신이며 메이지시대 이토오히로부미의 후계자 인것입니다.
패전60년이후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일본의 보수 민족주의의 에너지를한데 모아 국회를 장악한 고이즈미도 재임 당시 한국 중국과의 외교 마찰로 어려울 때 기자들에게 전국시대의 무장(다이묘급영주) 들의 파란만장한 고난과 사투에 비하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 위안 했는데 이것은 지금의 일본의 정치현장이 봉건시대 악랄한 사무라이방식의 싸움을 통해서 전국을 제패한 토요토미시대와 같은 환경으로 회귀했음을 시사하는 말이죠.
그리고 고이즈미 로부터 안정된 정치기반을 물려받은 아베는 철저하게 옛날 사무라이들의 무참한 힘의 통치사상과 철학을 재생해낸 요시다 쇼인등의 근대 침략주의 사상을 신념으로 무장한체 중세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대의 패전까지 일본을 이끈 힘,즉 사무라이들의 무자비한 통치문화에 기반한 통치철학을 중심으로한 국가재생프로그램 이야 말로 오늘의 일본에 결여된 부분이라고 지적하는것이며 그 국가 재생의 청사진에 대한 비젼을 내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아베수상의 초심표명인 우쯔꾸시이 꾸니 (美しい?-아름다운국가) 란 것입니다.
아베는 우쯔꾸시이 꾸니 라는 저서에서 본인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요시다 쇼인 이라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는데 아베신조(安部晋造)와 자기부친 아베 신따로(安倍晋太?)의 이름에들어간 신(晋)은 메이지시대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막부정권을 무너뜨린 존왕파의 영웅으로 알려진 전설적 사무라이 다카스기 신사꾸 (高杉晋作)의 신(晋) 에서 대대로 따온 이름이죠.
또한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노부스케 (岸信介)의 증조부 사또신칸(佐藤信管)은 요시다쇼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또히로부미)과 친분이 아주 두터운 사이였죠.
이렇게 일본의 정치는 중세봉건 시대에서 부터 오늘까지 많이 변화한 모습 인것 처럼
세계에 인식 되어있으나 봉건시대의 악랄하고 잔인하고 흉폭한 비문명적 악습이 몇백년이 지난 오늘 까지 그대로 남아 무언의 복종 굴복심으로 명맥을 유지한 채 오늘의 일관된 일본의 국민 적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봉건시대의 무사들의 힘의 우위가 모든 정의와 선을 대체한다는 전근대적
의식문화가 21세기를 사는 오늘 현대에도 살아 숨쉬며 일본인의 의식의 기저를 지배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오늘의 일본이 세계와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