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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독백
1 부
- 첫 번째 밤 -
' 야 이번에 너 갈 꺼야? 또 저번에처럼 혼자 빠지는 건 아니겠지? 웬만하면 이번엔 꼭 가자. 가뜩이나 사람들이 많이 안 온 다는데 너마저 안 오면 진짜로 갈 사람 별로 없다.'
'.... 이번에... 나.. 갈 꺼야. 벌써 간다고 회비 냈다.'
' 어 정말? 잘 됐네. 야 너 웬일이야 너 원래 이런 자리 많이 참가하지 않잖아.? 이야! 다시 봐야겠는걸. 어쨌든 좋아. 우리 이번에 불타는 여행 한번 만들어 보자고. 히히 !! 야 내일 늦지 말고 일찍 와라. 내일 보자 '
' .......그래. 내일 보자.'
며칠 전부터 J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전에도 두통기운이 가끔씩 있어서 J를 괴롭히곤 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J의 머릿속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잠을 자려고 몇 시간 동안 뒤척이다가, 급작스레 걸려온 핸드폰 전화를 받은 J는 잠시 동안 멍하니 눈을 뜨고 누워 있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두통이 조금씩 더 심해지는지 J는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의 구석구석을 짧게 쥐었다가 놨다 하더니 이내 짧은 한 숨을 내 쉬었다. 오늘도 여전히 J는 쉽게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벌써 몇 일째 재 시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누워있던 J는 도저히 안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대 옆 책상 서랍을 열고 알약이 담겨져 있는 통을 열고서 두서너 개의 약을 물과 함께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약을 먹은 J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불이 꺼져 있는 방은 새벽 무렵이라서 그런지 너무나도 조용하게 느껴졌다. 단지 그 속에서 조금씩 들리는 소리라고는 탁상시계의 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반복되는 그 소리에 신경이 쓰이는지 J는 시계에 손을 뻗어 가물가물 만지작거리다가 건전지를 빼버렸다. 그나마 들리던 시계소리마저 없어지자 J의 방은 적막감이 감돌정도로 고요해졌다. 잠을 자야 된다. 내일 예정된 여행이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멍하니 앉아 있던 J는 다시 잠을 청할 모양인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뿐 이내 J는 이리 저리 뒤척였다. 차가워 졌던 이불 속에 온기가 채 따뜻해지기도 전에 도저히 안되겠는지 J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언가 더듬더듬 하더니 벽에 있던 스위치를 눌러 캄캄하던 방에 불을 켰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던 눈이 밝은 불빛에 노출되자 적응이 쉽지 않은 듯이 J는 눈을 두 서너 차례 깜빡였다. 두통과 함께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잠옷을 벗고 옷장 속에서 두터운 외출복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담배, 라이터, 핸드폰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동전들을 챙겼다. 나갈 준비가 다 되었는지 J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다가 이내 불을 끄고 다른 방에 자고 있는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런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바깥에 날씨는 꽤나 춥고 매서웠다. 12월이 다 지나가는 한겨울이라서 그런지 두터운 옷을 챙겨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서운 바람이 옷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차가운 칼바람은 오랜 시간 동안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J의 몽롱한 눈을 조금씩 트이게 해주었다. 며칠사이에 많은 눈이 내렸다. 새벽에 도시는 오랜 시간 눈을 맞아서인지 조용히 얼어 있는 듯이 보였다. 저 멀리 고속도로에서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도 얼어붙은 도시에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이 조용하게 펴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저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과 야식 집만이 몇 사람의 실루엣을 쇼윈도에서 비추는 것이 전부 다였다. 그리고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술에 취해 삼류 가수가 된 주정뱅이에 흥얼거림도 들려 왔다. 밖으로 나온 J는 상가 옆 인도를 따라 조심조심 걸어갔다. 사람들이 치우기 전에 쌓였던 눈이 얼어 인도가 대부분 미끄러운 빙판이었다. 길의 중간 중간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뿌려 논 연탄재들을 밟으며 J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길을 걷던 J는 바지주머니 속에서 담배 한 개피를 물어 불을 붙이고는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몸이 많이 추웠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새벽의 가라앉은 차가운 기운을 느끼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지도 않는 잠을 자려고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J는 내친 김에 잠이 올 때까지 한가롭게 새벽에 도시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년에 몇 번씩 내려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집에만 며칠 있다 올라갔을 뿐 변화해 가는 도시를 제대로 느끼진 못했다. 천천히 담배를 피면서 J는 어디부터 돌아다녀야 할 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표정에 호기심이 차가운 입김과 함께 어렸다.
J가 살았던 이 도시는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었다. 도시의 가운데에 그다지 크지 않은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기준으로 크게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주로 공단(주로 ○○기업에 계열사들이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이 많이 위치하고 있으며 목재소와 펄프 공장들이 있고 아파트 단지도 있었다. J의 집은 강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남쪽도시에는 다리로 연결된 국도 변에 상가들이 주로 밀집되어 있으며 상가들의 외곽 부분에는 주택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5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종합 시장도 있다. 도시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주변에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과 체육관등이 있으며 국도와 고속도로 그리고 철도를 잇는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강의 하류로 쭉 올라가면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주로 농사를 많이 지어 밭과 논이 많다)들이 있으며 상류로 올라가면 쓰레기 매립부지와 수심이 비교적 깊은 저수지와 몇 개의 낚시터들이 자리잡고 있다. J는 어릴 적부터 이 도시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어릴 적부터 밖에서 뛰어 놀던 것을 좋아해서 많이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기에 도시의 어느 곳 하나에도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지금이야 J가 성인이 되어 진로 때문에 다른 도시에서 살아 온지 5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있어서 이 도시는 언제나 향수 어린 곳이며 어린 때가 묻은 곳이었다.
곰곰이 도시를 살피던 J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는 어디로 갈지 마음을 정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걷던 그는 주택가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먼저 자기 집에서 가까운 주변부터 둘러보려고 한 것이다. 주택가로 들어서자 상가 단지와는 다르게 많이 어두웠다. 도로에는 가로등이 많이 줄지어서 켜져 있었지만 주택가에는 몇 개의 가로등만이 약한 불빛으로 골목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택가라고 하지만 과거에는 거의 빈민촌에 가까운 곳이었다. 주택의 대다수가 낡은 함석집이었고 그러한 집에 사는 사람들도 전세나 월세의 집이 많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집들이 새롭게 바뀌어져 있었다. 과거처럼 아무렇게나 막고 세워진 집들이 아닌 매끈하게 잘 지어진 콘크리트와 벽돌에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개똥과 자갈이 밟히던 길바닥도 아스팔트길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가진 않았는지 몇몇에 집은 J의 유년의 기억 그대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매일 놀던 여러 친구 중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았던 한 친구 놈에 녹슨 판자 집, 주택가를 관통하는 기차길 옆에 있는 거의 매일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하던 친구에 키 작은 집도 5년 전 그대로 있었다. 그 친구들이 거기에 아직도 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친구들이 이사간다는 소식을 간혹 전해듣곤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없지만 그들이 살고 있던 곳에 향취가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J를 스치고 지나갔다. J는 어릴 적 자주 놀던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갔다. 전에 봤던 눈에 익은 집들이나 장소가 나오면 발걸음을 천천히 걸으면서도 이내 멈추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주택가를 다니던 J는 이후에 기차길 옆 담 벽을 따라서 걸어갔다. 조용하고 어두스름 하던 길가가 갑자기 밝아지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갔다. 길을 걷던 J의 그림자가 기차에 불빛에 비쳐 담 벽에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금 어둠으로 사라졌다. 밤에 몰래 집 앞에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고양이들이 J가 걸어가는 발자국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어두운 길을 따라 쭉 걸어가자 멀리서 몇 개의 노란 불빛이 보였다. 기차 길을 가로지는 지하 굴다리였다. 과거에는 기차길옆에 지금처럼 높은 시멘트 담벼락이 없었고 나무로 된 낮은 담 장들로 경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탓에 이웃동네를 가로질러가기 위해 담을 넘어 기차 길을 건너던 취객들이 야밤에 기차에 많이 치어 죽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단단하고 높은 담을 세우고 중간에 굴다리를 만든 것이다. J는 굴다리로 향했다. 몇 걸음 걸어가고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반대편에서 차가 한 대 오고 있었다. 차 위에 붉은 색과 파란색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니 경찰 차였다. 가고 있는 길이 좁아 J는 차를 피해 담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눈길을 헤치며 다가오던 경찰 차는 J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속력을 천천히 줄인 상태로 지나쳤다. 그리고는 조수석에 앉아있던 뚱뚱한 경찰관이 창문을 반쯤 열고는 J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J의 시선도 그 경찰관에 시선과 마주쳤다. 경찰 차는 이후에 다른 골목으로 차 머리를 돌리고는 이내 사라졌다. 야간 순찰 차원에서 가뜩이나 어둡고 후미진 기차길 옆이라(J가 어릴 적에는 이곳에서 자잘한 범죄들이 많았다) 그러겠거니 생각했지만 아래위로 훑어보던 경찰관에 거만한 시선에 J는 못 마땅했다.
굴다리를 건너서 반대편 동네로 넘어온 J는 걸음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도시의 많은 모습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과거 보다 도시의 덩치가 많이 커졌기에 남은 시간 동안 도시의 전부를 다 돌아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간에 J는 잠이 올 때까지 무작정 돌아다니기로 했다.
반대편 도시 또한 주택가가 많았다. 하지만 굴다리를 건너오기 이전에 도시들보다는 상당히 잘 사는 동네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동네는 꾀나 좋은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굳이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동네에는 그렇게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J는 기차길 주변을 따라 반대편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차길 주변 부를 따라 반대로 쭉 올라가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이 나온다. 지금은 많이 개발되어 오염될 되로 오염된 늙은 강이 되었지만 이 새벽녘이라면 그 어릴 적 멱감으며 느꼈던 향수 어린 강의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J는 수풀 때문에 조금씩 좁아지는 외곽의 길을 따라 이동했다 . 강둑을 향해 어느 정도 걸어가고 있는데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전봇대 옆쪽에 수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바람소리하고 섞여서 잘 안 들렸지만 귀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니 분명 무언가가 소리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에 궁금해 J는 그 소리에 정체를 알고 싶어졌다. 조금씩 이상한 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J는 조심조심 다가갔다. 어느 정도 다가가자 그 소리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소리였고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소리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넘어갈 듯한 기침소리와 신음소리가 섞인 분명한 남자였다. 풀숲에 나뭇가지들이 튕겨져 나가지 않게 J는 가지들을 잡았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놓으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누군가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되는 위치에 이르자 꽤나 높은 덤불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 바로 옆에 누군가가 와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넘쳐나는 호기심에 못이긴 J는 신중함을 잃고 덤불을 양옆으로 밀어붙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신중하지 못한 호기심이 확인한 것은 쓰러져 있는 중년을 넘어 보이는 한 남자에 모습이었다. 고개는 옆으로 젖혀져 있었으며 몸은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빛 바랜 누런 운동화에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추리닝과 함께 얼룩진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고된 막일을 마친 인부 같았다. 또한 옷이 흠뻑 젖어 퀴퀴한 냄새가 났으며 무엇에 긁히고 부딪쳤는지 옷이 이곳저곳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아직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는 땅바닥과 수풀 사이에 쌓인 눈과 섞여 이곳저곳 찐득하게 묻어 있었고 달빛을 받아 반사되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조금 남은 소주병이 몇 병 깨어져 있었다. J가 옆에 서 있는 것을 눈치챈 듯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달빛에 반사된 남자에 얼굴은 그야 말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얼굴엔 피범벅이 되어있었으며 입가주위엔 이곳저곳 진흙들이 묻어 있었다. 어딘가가 몹시도 아픈지 남자는 계속 신음을 했다. 얼굴을 돌린 그 남자는 어느 정도 혼미한 정신을 발휘하여 J와 눈빛이 마주치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몇 번 들썩하던 남자는 이내 포기한 듯 그대로 누워 버렸다. 남자는 그 상태로 계속 J를 쳐다봤다. 하지만 J를 경계하거나 또한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는 측은 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초점 흐린 덤덤한 시선으로 말없이 J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동안 남자를 바라보던 J는 쓰러져 있는 그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딱히 무언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짧은 찰나에 망설이던 J는 바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졌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 약한 불빛이 누워 있는 남자 옆의 술병에 반사되어 푸른 녹색으로 빛났다. J는 짧게 몇 번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고 지금에 상황과 위치를 막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누워있던 남자가 J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가는 쉰 소리로 말을 이었다.
' 아니야 … 아니야 … 안 그래도 돼. 그러지 마 '
남자의 말에 J는 전화를 멈췄다. 전화기에서는 걸려온 전화에 답하는 하는 소리가 났다.
' 거... 그럴 필요 없어. '
가는 숨을 고르며 그는 애써 말을 이었다.
'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
남자는 J를 바라보며 간곡히 말했다. 정말로 측은 한 눈빛으로 J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남자에 부탁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가 몇 번 대답을 하던 전화기에서는 이내 뚜 하는 긴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둠에 가녀린 색을 주던 작은 푸른색의 불빛도 꺼져버렸다. 꺼진 전화기를 멍하니 쥔 상태로 J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천천히 오른손목을 움직여 허공에 세우더니 한 손가락으로 J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저 앞에가 내 집이라네. 금방 집에 들어 갈 것이니까 이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보게.'
하지만 J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멀리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밝은 불빛이 일었다. 그 소리와 빛은 천천히 길 주변의 수풀에 잎사귀와 주변 집들의 벽들을 어루만지며 J와 남자에게 다가왔다. 미친 듯이 달리는 철마의 빛이 남자의 얼굴을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저 멀리 눈이 내린 도시와 함께 잠들어 버렸다.
J는 남자에 의지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남자가 말한 그 집이 과연 그의 집이던 아니던 간에 거기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J가 곧 자기를 떠날 것이라는 걸 눈치챈 듯 애써 편안한 얼굴표정을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거푸 기침을 해 댔다. J는 주머니를 뒤져 몇 가치 안 남은 구겨진 담배 중에 하나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물어 불을 붙인 J는 길게 한 모금 들이키더니 누워있던 남자에게 그 담배를 건네 주었다. 남자는 담배를 받아서 천천히 피기 시작했다. 이후 J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근처에 있는 강둑으로 향했다. J는 일부러 빠른 걸음을 했다. 오로지 바로 앞에 있는 강둑에 가로등에게만 시선을 주며, 빨리 걸었다기보다는 거의 달리는 속도로 걸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뒤를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콜록거리는 남자의 기침 소리가 담배냄새와 함께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강둑에 올라간 J는 그대로 경사져서 미끄러운 시멘트를 타고 내려가 강 안쪽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남자의 소리가 없어지고 조용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남자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안심한 J는 걸음을 멈추고 강 옆에 있는 시멘트 바닥에 앉았다. 엉덩이를 눈 내린 시멘트에 깔고 다리는 살짝 얼은 강에 살얼음에 내린 채로 J는 앉아있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J에게 엄습했다. 그러자 J는 몇 구절만 아는 가요를 조용히 웅얼거렸다. 한 소절이 끝나가자 같은 구절을 계속 반복했다. 계속 부르던 J의 흥얼거림은 이내 소리를 멈췄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남자를 찾아낸 호기심 어린 행동만을 찬양했다.
강에 모습은 아름다웠다. 적어도 음침하던 주택가들보다는 훨씬더 신비한 모습을 품고 있었다. 새벽에 아직 꺼지지 않은 여러 색의 네온사인이 강의 물줄기에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고 회색 빛의 옅은 안개가 강과 주변에 풍경을 빛과 함께 하나로 삼키고 있었다. J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강은 그때 그 방향대로 변함 없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어릴 적 ... 멱감으며 놀던 어린 J는 강이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지 궁금했었다.
눈 바닥에 앉았던 J는 엉덩이가 차가운지 곧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걷는 동안에 계속 남자에 대한 생각이 J를 엄습했다. J는 남자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을 정도로 보이진 않았다. 또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의에 의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였다. 분명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흔한 사유(집이 빚쟁이들 손에 넘어갔거나 마누라가 도망갔거나 아니면 극도의 심한 우울증에 선택할 수 있는 일들 말이다)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이유에 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가 쓰러져 있던 그 모습 자체가 흐르는 강물위로 아른거렸다.
J는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한 개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강 주위에 바람들이 J의 주위를 감싸며 담배에 붙이려고 하는 라이터 불을 춤추게 했다. 몇 번의 노력 끝에 잠바 품으로 라이터를 가려 이내 불을 붙인 J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철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쪽을 향하여 걸었다. 철길 다리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데 멀리 다리 반대편에서 J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차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까 아까 철길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 차였다. 다가오는 차가 경찰차인 것을 확인한 J는 마음이 거슬렸다. 분명 한 소리하고 지나갈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경찰들은 야심한 시각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고운 눈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 들에게 있어서 밤늦게 배회하는 인간이라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고 무엇보다 연말에 업무 실적 때문에 범죄에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건수를 올리려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용한 도시의 밤을 위하여 이 밤에 또한 잠을 자지 못하는 인간들이 아닌가? J는 그대로 경찰 차를 바라보며 걸어갔다. 예상대로 경찰들은 J의 곁에 다다르자 차를 멈추었다. 차에 창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이전에 지나가면서 기분 나쁜 눈으로 J를 쳐다봤던 뚱뚱한 경관이 J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무언가 의심이 가서 제대로 J를 조사를 해볼 모양인지 아예 차 시동까지 꺼버렸다. J는 물끄러미 서서 경찰 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더니 운전하던 경찰은 그대로 있은 채 뚱뚱한 놈을 비롯해서 세 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렸다. 중년을 넘어서 보이는 뚱뚱한 경관은 기름져 있는 얼굴에 배가 어지간히 튀어나와 있었다. 다른 경관들은 J와 비슷한 나이에 청년들이었다. 키가 큰 한 놈은 치직거리며 간간이 사람 소리가 웅얼거리는 무전기를 한 손에 쥐고 있었고 작은 키에 제법 단단한 체격의 한 놈은 경찰 곤봉을 만지작거렸다.
' 어이- 이봐 뭔 일인데 이렇게 싸돌아 댕기나? '
뚱뚱한 경찰관이 내리자마자 지방 사투리가 섞인 어조로 J에게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한 놈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J는 그 무전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키 큰놈이 무전기를 든 손으로 대답이 없는 J를 가볍게 쳤다. 아무런 대꾸가 없는 것에 열이 받았는지 뚱뚱한 경관(계급이 꽤나 높은 듯이 보였다.)이 언성을 높였다.
' 벙어리인감? 뭐 하는데 돌아 다니냐고 묻자너 지금. '
뭐라고 말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곰곰이 경관을 바라보던 J가 말했다.
' 잠이 안 와서요... 바람 좀 쐬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뚱뚱한 경관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 잠이 안 와서? 참 네 . 아 그래 잠이 안 와서 이 추운 날 바깥에 싸돌아 댕긴다 이 말이여? 뭔 지랄이여 그게 '
비웃던 경관은 말을 이었다.
' 너 어디 살어? 사는 곳이 어디여 너? '
뚱뚱한 경관이 계속 비아냥거리며 반말을 내 뱉자 J는 화가 치 밀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상대는 경찰들이 아닌가? J는 손가락으로 아무데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기 OO동에 살고 있습니다.'
뚱뚱한 경관은 갑자기 무슨 느낌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J에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고는 옆에 서있던 무전기를 가진 놈에게 말했다.
' 이 놈 뭔가 수상해. 야 이놈 신원 파악 좀 해봐.'
그러자 무전기를 갖고 있던 놈이 J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무렇게나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J는 덤덤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다.
'주민등록번호?'
경관의 짧은 질문에 J는 주민등록번호를 천천히 말했다. 이후 키 큰놈은 무전기에 버튼을 몇 번 누르고 상대방이 나오자 J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줬다. 그리고 잠시 동안 대기 상태였다. 뚱뚱한 놈은 차 에 슬며시 등을 기대고는 담배를 피우며 J를 쳐다보고 있었고 두 놈은 말없이 서 있었다. 한 동안 조용하던 무전기에서 칙지직 거리는 잡음이 몇 번 들리더니 사람소리가 잡음과 함께 다시 섞여 나왔다. 키가 큰놈은 무전기에 대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이후에 교신을 끊은 놈은 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뚱뚱한 경관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J의 신상조사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뚱뚱한 경관은 J를 바라본 상태에서 키 큰놈의 보고 내용을 물끄러미 듣기만 했다. 그리고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잘 닦은 구둣발로 짓뭉개버렸다. J는 조용히 그들에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뚱뚱한 경관은 짧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아무 말도 없이 경찰 차에 다시 육중한 체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경찰 차에는 다시 시동이 걸리고 헤드라이터가 켜졌다. 키가 큰놈은 지금의 상황과 다른 내용에 교신을 짧게 한번 하다가 경찰 차로 다시 들어갔고 뒤를 따라 작은 놈이 마지막으로 차에 탑승했다.
' 날도 추운데 그만 청승 떨고 집에 들어가요. 괜히 의심받지 말고...'
조금 열린 창문으로 말 없던 조그만 놈이 J에게 한 마디 내 뱉었다. 그리고는 경찰 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J는 조금씩 작아져 가는 경찰 차의 빨간 후미 등을 바라보았다. 경찰 놈들이 시비를 걸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어차피 놈들이 걸고넘어질 이유가 없었기에 J는 방금 전의 상황에 덤덤했다. 하지만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조금 전 상황을 되 집어 볼 때 반드시 그 경찰관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끓어오르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경찰 차는 강변을 따라 이동하다가 우회하여 강변 옆에 가로수가 있는 도로를 다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만일 차가 그대로 도로를 타고 움직인다면 지금 J가 서 있는 위치에서 직선으로 가까운 거리가 된다. J는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던 손을 주머니에서 뺏다. 그리고 경찰 차를 향하여 있는 힘껏 달려갔다. 눈밭에서 한 쪽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지만 곧 J는 제대로 중심을 잡고 뛰었다. 경사진 방수 벽에 요철을 두 서너 개씩 뛰어 넘어가며 도로로 올라가자 때 마침 경찰 차가 가까이 다가왔다. J는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J가 뛰어오는 것을 보았는지 경찰 차는 가던 길을 멈추고 정지했다. J는 가쁜 숨을 고르며 차 옆으로 걸어갔다. 차에 창문이 천천히 열리고 아까 무전기를 들고 있었던 경관이 고개를 반쯤 내밀었다.
' 무슨 일입니까? '
J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 저기요.. 혹시... 몇 시부터 순찰을 하셨죠? '
키 큰 경관은 J의 말에 의아해 했다
'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이 주변지역에 순찰을 몇 시부터 돌았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J가 다시 물어보자 그제야 말뜻을 이해했는지 경관은 말을 이었다.
' 아마.. 한 10시경부터 순찰을 시작했어요. 헌데 무슨 일로 그걸 묻습니까? '
' 그렇다면.. 혹시 이 주변에서요.. 한 쉰을 넘어 보이는 나이에 지져 분해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막일인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나요? '
' 예? 막일 인부요? '
그는 어느 정도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음.. 글쎄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잘들 생각해보세요. 아마도 분명히 목격했을 겁니다. 분명히 이 근처예요'
키 큰 경관은 옆에 앉아있던 동료 경관들에게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J가 말한 사람을 보았는지 물어 보는 것이었다. 경관이 묻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경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그는 J에게 말했다.
'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순찰을 도는 것은 여기만 도는 것이 아니고 도시 전체를 돌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그렇게 평범한 인부 한 사람을 유심히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죠. 근데 무슨 일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죠? 무슨 일인지 알아야 저희가 도와줄 것 아닙니까? '
경관이 말하고 나자 J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J를 바라보는 경찰관들에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한 동안 침묵하던 J는 약간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
J가 말하자 경관은 의아한 눈빛으로 J를 바라봤다. 고개를 돌려 J를 바라보던 앞좌석에 다른 경관들도 마찬가지에 눈빛이었다.
키 큰 경관 옆자리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뚱뚱이가 갑자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마도 앞에 있는 운전석에 대고 뭐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 큰 경관이 차 유리를 닫으며 J에게 말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문제가 있으면 경찰서에 직접 오셔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
경찰 차는 J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J는 멀어져 가는 차에 후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J는 상체를 앞으로 반쯤 굽힌 상태로 도로바닥주변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주의 깊게 찾던 J는 손으로 움켜쥐기에 약간 큰돌을 찾았다. 오른 손으로 돌을 움켜쥔 J는 상체를 뒤로 젖히는가 싶더니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던졌다. 도로 주변에 가로등 보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던 돌은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찰 차의 뒤 쪽 유리에 정확히 부딪혔다. 급작스레 경찰 차가 멈추고 안에서 고개하나가 튀어나오더니 J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욕을 했다. 그리고 차에 방향을 J쪽으로 급히 돌렸다. J는 몇 발짝 뒷걸음치다가 이내 몸을 돌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도망치던 J는 경찰 차가 바짝 다가오자 방향을 바꿔 주택가 골목으로 빠졌다. 경찰 차도 급커브를 그리며 우회하여 골목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미끄러운 빙판 탓에 골목의 방향보다 머리가 많이 돌아가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J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점 점 좁고 후미진 골목사이를 빠르게 도망쳤다. 어느 정도 깊숙이 골목길만 따라 도망쳐 들어온 그는 가로등 빛이 비추지 않는 곳의 쓰레기 봉투더미에 몸을 가려 그대로 앉아 있었다. J가 앉아 있는 곳에서 조금 멀리에 붉은 색과 파란색의 불빛이 교차되며 골목길 담벼락 사이로 몇 번씩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 동안 앉아 있자 불빛과 반복되는 경찰경적도 멀리 자취를 감추며 사라져 갔다.
경찰들이 주위에 없다는 것에 안심한 J는 몸을 일으켰다. 꾀나 앉아있던 모양인지 발바닥에서 전기가 약간 흘렀다.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던 J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골목 밖으로 향했다. 골목 밖에서 다다른 그는 머리를 반쯤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분명 경찰은 주위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길을 따라 이동하기에는 위험성이 컸다. 그리고 이 주변에서 오래 맴돌다가는 언제 잡힐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J는 강 건너 북쪽동네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골목들을 따라 다시 강가로 이동하여 아까 돌을 던졌던 도로를 조심히 넘어 강 사이에 작은 연결 다리를 넘었다. 다행 이도 경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온 도시를 순찰하는 그들이기에 언제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강을 넘은 J는 강 주변에 좁은 논길을 따라 걸었다. 별로 눈에 띠지 않는 곳이고 가로등이 없는 곳이기에 이동하기엔 적합했다. 하지만 꽤나 길이 험해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논길을 따라 어느 정도 걸어가다 J는 잠시 멈추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도시를 바라봤다.
눈 덮인 하얀 도시의 밤 . 모든 야경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 그 불빛들 속엔 꽤나 많은 수의 성당 십자가들도 있었고 그것보다 더 많은 가로등들도 있었다. 잠든 이들의 도시... 결코 깨지 않을 것 같이 보이는 도시.... J는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러자 뿌옇게 투영된 실눈사이로 도시의 각각의 모습들이 점차 연결되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의 불빛은 더욱더 강해져 길게 뻗어나갔으며 그와 반대로 눈 내린 도시는 하나의 하얀 덩어리로 합쳐졌다. 그 흰색의 덩어리위로 차가운 공기가 뿌옇게 드리워져 있었다. J에게 마치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보였다. 깨어날 것 같지 않는 거대한 생물. 그 거대한 것은 수많은 사람을 품고 있으리라.
J는 반쯤 타다 남은 담배를 끄고 서 있던 자리에서 쭈그려 앉아 양손을 이용하여 논두렁 사이에 바닥을 헤쳤다. 그러자 크고 작은 자갈들이 집혔다. J는 그런 자갈 중에 적당한 크기의 것을 모아서 한 쪽에 모아 놓았다. 그렇게 바닥을 몇 분 정도 헤집고 다니자 제법 많은 돌이 모였다. J는 그 돌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두꺼운 파카를 입은 것이 다행이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몇 개의 돌밖에 넣을 수 없었지만 파카의 주머니는 꽤나 널찍해서 비교적 많은 돌을 집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갈을 주머니에 채우고 나자 몸이 조금은 무거웠다. 돌을 다 집어넣자 J는 발걸음을 옮겼다. 논길을 따라 이동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더니 아파트 단지로 이어지는 대로를 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작거리며 이동하던 J는 대로 옆에 있는 가로등을 쳐다봤다. 그러다 히죽 웃더니 주위를 살폈다. 대로변에는 차도 지나가지 않았고 사람에 기척도 없었다. 무엇을 하던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확인한 J는 바지 주머니에서 한 개의 돌을 꺼냈다. 그리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돌을 움켜쥐고 가로등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자 조용하던 대로의 바닥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떨어져 아스팔트 위로 펴졌다. 파편들은 불빛을 받아 노란색으로 아스팔트 위에서 반짝였다. 그렇게 떨어지는 가로등의 유리 파편 소리가 J에게는 나쁘지 않게 들렸다. 마치 연주자와 관객이 없는 어두운 무대에 있는 피아노의 건반에 작은 구술이 굴러가듯이 그 소리는 작고 경쾌하게 들렸다. J는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더 빼냈다. 아까 보다 약간 큰돌을 꺼낸 J는 다시 한번 옆에 있는 다른 가로등에 돌을 던졌다. 그리고 멀리 있는 반대편 차선에 가로등에도 돌을 던졌다. 오늘따라 운이 좋은지 아니면 유난히도 정확한 운동신경이 발휘된 것인지 던지는 족족 목표를 향해 정확히 부딪혔다. 그때마다 물리적인 힘에 반응하는 자연현상들에 둔탁한 외침이 작고도 경쾌하게 조용한 대로에 펴져 나갔다. 대로는 아파트단지 까지 꽤나 길게 직선으로 뻗어있었다. J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주머니에 돌들이 몸에 부딪혀나는 소리가 났다. 군 복무시절 본 이동사격을 하는 전차처럼 J는 달리면서 돌을 던졌다. 어떤 돌은 가로등의 기둥에 맞아 떨어졌고 어떤 것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명중률은 높은 편이었다. 아마도 군대에 있었을 때 전차를 타고 이 정도의 명중률을 보였더라면 군 모자에 액세서리 몇 개 붙인 놈한테 아마도 큰 상한 번 받았으리라.
천천히 한 동안 달리던 J는 아파트 단지에 거의 다 다가오자 달리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 대로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몇 개의 가로등불빛이 꺼져서인지 아까보다 대로가 많이 어두워졌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노랗고 하얗게 빛을 받은 유리알들이 싸리 눈처럼 퍼져있었다. 돌을 어느 정도 던졌는지 주머니가 아까보다 조금 헐거워졌고 몸도 한결 가벼워 졌다. 하지만 파카의 양쪽주머니엔 아직도 돌이 많았다. 잠시 서 있던 J는 그때 한 가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았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잠 못 이루고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두통에 몸서리를 쳤었는데 지금은 마치 머릿속에 나쁜 찌꺼기 하나 없는 것처럼 머릿속이 고요했다.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새벽의 찬 공기가 머리를 맑게 했을까? 아니면 너무나도 조용한 정말로 적막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이 도시의 고요함이 두통을 잠재운 것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며칠 밤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자신을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자 대로를 타고 사거리가 나왔다.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모퉁이를 타고 돌자 아파트에 가기 전에 몇 개의 상가건물이 있었다. 첫 번째 건물은 3층 짜리 건물이었다. 1층에 슈퍼마켓이 철문으로 간판을 내렸고 있었고 2,3층은 어떤 사무실 같았다. 옆에 붙어 있는 다른 건물들은 학원과 술집 등이 섞여 있었다. 불이 꺼진 상가의 창문 유리에 아파트의 윤곽이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상가보다 조금 지대가 높은 곳에 아파트 놀이터가 있었다. J는 먼저 놀이터에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아파트 단지 내 멀리서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유유히 지나갈 뿐 이렇다할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J는 파카 주머니에서 몇 개의 적당한 돌을 꺼냈다. 그리고 오른손이 원활하고 빠르게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왼손만으로 그 돌을 움켜 줬다. J는 먼저 첫 번째 건물 2층 오피스를 처음으로 하여 학원과 호프집 창문에 연달아 빠르게 돌을 던졌다. 넓은 유리가 돌에 부딪혀 부서지자 꽤나 큰소리가 나며 연속적으로 유리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유리 안으로 파고든 돌은 내부에 무엇인가에 다시 부딪혔는지 재차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J는 놀이터 길을 이용해 아파트 단지로 뛰어 들어갔다.
단지 입구에 1단지로 들어온 J는 주차장에 주차되어있던 차들 뒤에 붙어 건물입구 맞은 편에 있는 경비초소를 살폈다. 초소 내에 약한 파란 불이 새어져 나오고 있었다. 몇 발짝 더 앞으로 걸어가서 초소를 바라보자 경비를 서고 있는 노인이 TV를 켜 놓고 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J는 다시 주머니에서 돌을 꺼냈다. 그리고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 돌들을 움켜 쥔 채 오른손으로 빠르게 연달아 돌을 던졌다. 워낙 층수가 높은 아파트이기 때문에 J는 직선으로 큰 각을 그리며 최대한 높이 던졌다. 그러자 7층인지 6층인지 모를 한 집의 베란다 유리창이 깨졌고 그 다음으론 취침 등이 연하게 켜져 있는 4층 유리가 깨졌다. 다른 돌은 굉장히 높게 던진 탓에 베란다 근처도 못 가서 그대로 떨어졌다. 떨어진 유리 조각들은 조경으로 심어 논 잔디에 떨어졌다. 그래서 소리가 작게 들려서 인지 경비는 자기 관할구역에 유리창을 깨는 사람이 있는 지도 모르고 그대로 졸고 있었다. 경비가 그대로 졸고 있자 J는 내친김에 주머니에서 돌을 더 꺼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한 개.. 두개 .. 이번에는 너무 높지 않은 곳을 택했기에 정확하게 베란다 창문을 연달아 작살낼 수 있었다. 신이 난 J는 주머니에서 돌을 또 꺼냈다. 그리고 다시금 목표를 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까 돌을 던진 취침 등이 켜져 있던 4층집에서 밝은 불이 켜지더니 사람 하나가 창가에 어른거렸다. 부랴부랴 파자마에 겉옷을 대충 걸친 그 사람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J를 바라보며 욕을 해댔다. 아파트에 사람이 욕을 해대자 J는 안되겠다 싶어 냅다 도망을 쳤다. 1단지에 아파트를 벗어난 J는 2단지로 뛰었다. 하지만 J는 급작스레 발길을 돌려 아파트에서 주변에 공단으로 빠지는 길로 뛰었다. 아까 욕을 하던 사람이 필시 경비한테 연락을 할 것이고 경비는 다른 단지의 경비에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아파트를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온 J는 공단을 거쳐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가 많이 뛰어 다닐수록, 그가 많은 건물의 창에 돌을 던질수록 그의 주머니는 가벼워 졌다. 얼마나 뛰어다니며 돌을 던졌던가? 그래서 얼마나 많은 닫힌 창문을 박살냈던가? 잠든 도시가 정말로 민감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로 잠자는 거대한 생물에 털끝하나라도 건드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고요함 속에서 그들은 나 와 풀숲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찾았으리라... J는 생각했다. 어느덧 짙은 푸른빛의 새벽 하늘 너머에 땅과 하늘이 맞닿는 부분에 밝은 빛이 섞이고 있었다. 돌 하나를 원룸 거실 창문에 던지고 도망쳐온 J는 잠시 멈추고 상체를 숙였다. 턱 밑까지 올라온 가빠진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한 동안 헉 헉 거리던 J는 숨을 고르고 주머니를 다시 뒤졌다. 돌에서 나온 흙들이 손톱에 꼈다. 파카 주머니에서 마지막으로 돌 하나가 남아 있었다.
J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고 던질만한 곳을 찾았다. 왼편으로 벽에 둘러 사여 있는 교회가 보였다. 교회의 높은 담벼락에는 담쟁이 넝쿨이 휘감겨 있었다. 교회 반대편에는 2층 짜리 빌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빌라옆 쪽으로 난 골목에서 두 사람이 J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이 그들에 얼굴을 어루만지자 J는 그들이 새벽에 쓸데없이 배회하는 동네 양아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 둘의 나이는 젊어 보였고 깍뚝설은 기름진 머리에 발목으로 올수록 통이 작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을 J는 조준했다. 그 들이 J에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조준 … 발사 … . 직선으로 날린 돌은 왼쪽에서 담배를 물고 걸어오던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순간 당황한 놈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반응이 늦어서 돌은 놈의 왼편어깨 쪽으로 부딪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은 뒤로 나뒹굴어졌다. 다른 한 놈이 쓰러진 놈을 한번 쳐다보더니 놀란 눈으로 J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 마디 욕을 내 뱉으며 J에게 달려오며 주먹을 날렸다. J는 몸을 낮춰 놈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배에 묵직한 한 방을 선사했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펀치를 맞은 놈 은 그대로 길바닥에 넘어졌다. 쓰러진 놈을 바라보고 있는데 J의 등뒤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돌아보는 순간 얼굴과 머릿속에서 별들이 춤을 췄다. 잠시 뒤에 사리분별을 하니 자신이 쓰러져 있었고 배 위에 아까 돌 맞고 쓰러진 놈이 무거운 체중으로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놈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코와 입가에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뭔지 알아볼 겨를이 없었다. 계속해서 얼굴과 머리에 강한 충격과 함께 순간순간 주먹이 보였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물가물 그 와중에 오른 손이 ,방금 전 까지 신나게 돌을 던지던 오른 손이 무언가 해결할 것을 찾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결국 J의 오른 손은 눈 바닥 속에서 단단하게 얼어붙은 굵직한 각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두웠던 하늘에 여명이 트고 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비추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과 달빛에 의존하여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기 앞 산 너머 새어나오는 은은한 여명은 이미 가로등과 달빛보다 더 넓게 퍼져 사물에 색과 윤곽을 집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냄새가 났다... 그리고 혀끝에서 그 뜨뜨미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맡아보고 또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피를 흘리며 한 동안 누워 있던 J는 코피를 소매 끝으로 주섬주섬 닦았다. 하지만 시간이 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코피는 계속 흘렀다. 하지만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피... 그 살아 있다는 냄새.
J는 몸을 일으켰다. 몸이 몹시 피곤해져 졸음이 몰려 왔다. 밀려드는 피로에 몽롱한 눈이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이 맑은 기분을 느꼈다. J는 잠시 강가에 들러 차가운 강물에 피를 닦았다. 그리고 그는 지친 몸을 가누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몽롱한 시야에 사람들과 자동차가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주하고 바쁜 소리가 저 너머에서 점점 울려 펴졌다. 눈 커플에 무게가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오래도록 뛰어다녀서 힘들었을 충실한 두 다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주인의 새벽길을 위해 끝까지 혼신을 다했다.
조심스레 J는 집에 문을 열었다. 이음새가 녹이 슨 쇠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리고 J는 조용히 신을 벗었다.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J의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고 창문 커튼 사이로 새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그가 보는 신문에 비춰지고 있었다.
' 어딜 다녀오는 게냐? 이 시간에... '
J의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 그냥... 잠이 안 와와서요... '
J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 나가기 전에 어두웠던 방안은 이미 창문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노랗게 빛났다. 그 빛에 J가 밖에서 돌아다니며 뭍혀온 먼지들이 나풀거렸다. J는 옷 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J는 그저 피곤하고 몽롱한 눈을 감았다.
첫댓글 두번째로 써 보는 단편 입니다.. 원래 1, 2 부로 다 완성해서 올리려했는데 1부만 먼저 완성해서 올립니다. 나중에 1,2부 전체 완성해서 다시 한번 올리겠습니다. 냉철한 감상 평 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