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일제강점기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 노래들이 불렸습니다. 많은 경우 미국의 민요 혹은 찬송가가 개사되어 활용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는 조지아 행진곡을 들 수 있습니다. <조지아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북군)의 승세를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곡입니다. 작곡가는 헨리 워크(Henry Clay Work)이며, 셔먼(William T.Sherman) 장군의 조지아 주 관통 진격을 성원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세계적으로 많이 전파되었고, 특히 일본에서는 찬송가로 개작되어 널리 불렸습니다. 현재 기록으로는 1900년 일본의 미다니 다네키치(三谷種吉) 목사가 <모두 전진하라·‒皆進め>라는 찬송가로 개작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 현재 찬송가 393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과 동일합니다.(노복순, “항일가요의 가사 결합양상과 특성: 조지아 행진곡 활용 곡을 중심으로”, 동양학 제84집, 2021, 158쪽)
이 노래가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 널리 퍼졌으며, 다양한 버전으로 개작되었습니다. 1920년대 <야구가>로도 개작되었고, 다시 방정환에 의해 <어린이날 노래>로도 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항일 독립운동 노래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1906년 개성(송도)에 설립된 사립학교 한영서원(韓英書院)의 교가도 조지아 행진곡을 차용했습니다.
참고로 한영서원은 당시 개화 민족지사 윤치호가 미국 감리교의 위임 아래 설립한 학교로서, 윤치호의 원래 의도는 한국 농업진흥과 민족산업 형성을 목표로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미국 남부 흑인들의 희망이었던 터스키기 학교(Tuskegee Normal and Industrial Institute)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강명숙, “윤치호와 미국 남감리교 선교”, 사학연구 제124호, 2016, 151쪽). 윤치호는 미국 남부 조지아 에모리(Emory) 대학에서 유학한 바 있어, 특히 조지아 행진곡에 익숙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윤치호는 신민회 활동 관련 105인 사건으로 체포 감금되었고, 이 학원의 교사들도 애국 창가집 제작과 교육 혐의로 역시 처벌 탄압받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한영서원은 1917년에 송도학교로 개명하였고, 해방 후에는 인천으로 옮겨 지금 구(舊) 송도 옥련동에 송도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지아 행진곡 곡조는 널리 애창되었고, 일찍이 신흥무관학교 교가로도 채용됩니다. 주지하듯이 신흥무관학교는 구한말 강제병합 전후로 우리 독립운동 지사들이 염원을 모아 만주 서간도에 설립한 학교로서 독립운동의 원천과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다시 추가합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그 시절 앞산 뒷산이 마주 울리도록 우렁차게 교가를 부르며 조국 광복의 맹세를 거듭했다고 합니다.(길태숙, “재만조선인 항일투쟁노래의 과거와 현재적 의미”, 동방학지, 2008, 91쪽).
신흥무관학교 교가 가사는 단지 한 학교의 ‘교가’에 국한되지 않고, 민족 자존, 독립의 열망, 청년들에 대한 고취를 담고 있어 민족 진영에서 ‘항일노래’로 많이 공유되었습니다. 다른 가사로 바뀌어 ‘독립군가’로도 널리 불려졌고, 임시정부의 공식행사에도 합창되었습니다.
아래 신흥무관학교 교가 가사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불렸던 독립군가의 가사를 소개합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곡조 조지아행진곡)
1.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을 품에 다품어 / 젖먹여준 이가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던피가 우리피줄에 / 좔좔좔 결치며 돈다
2.
장백산 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맡기고 / 종설움 받는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 우리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운다
3.
칼춤추며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 새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소리질러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떳다
제2절과 3절은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1절에는 생소하고 고풍스러운 낱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서북으로 흑룡(黑龍) 태원(太原) 남(南)에 영절(濘浙)에 / 여러 만만 헌원(軒轅) 자손 업어기르고
아마도 북쪽으로는 흑룡강 만주 벌판, 남쪽으로는 양자강 하류 넓은 유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훤원 역시 중국 전설의 황제를 말하고, 그 자손이란 곧 중국인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결국 이 부분은 고대 한민족의 강역이 가장 넓었던 고조선을 상기시키며, 고조선이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원류라는 자부심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 섬 중 어린 것을 품에 다품어 / 젖먹여준 이가 뉘뇨
동해 섬 중 어린 것은 일본을 가리키고, 그를 품어 키워준 것은 곧 문명 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한민족이 고래로 일본의 은인이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
다음으로 1920년 상해 임시정부 3.1절 기념식, 즉 대한민국 독립선언 일주년 행사에서 불렸던 <독립군가>의 가사도 소개합니다. 이 가사는 민족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동휘(李東輝) 국무총리는 독립선언 1주년이 되는 오늘까지 조금도 광복하지 못함으로 “이 행사를 외국인의 집에서 거행하니”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며 오열했으며, 손정도(孫貞道) 의정원 의장의 축사에 이어 학생 일동이 비분에 찬 음성으로 <독립군가>의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를 불렀다고 합니다.(김명섭,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관 기념행사와 항일노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0집, 2024, 190쪽)
<독립군가>(곡조 조지아 행진곡)
1.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이천만의 우리 동포를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 싸우러 나가세
2.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 나 죽으면 독립군의 충혼이 되니
청년아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 싸우러 나아가세
3.
대포소리 앞 뒷산을 들들 울릴 때 / 원수진을 쳐서 파할 담력을 내어
정의의 날랜 칼이 빗기는 곳에 / 이 길이 너와 나로다
4.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가 / 수천년 원수무리 쓸어 내어라
잃었던 조국강산 광복하는 날 / 만세를 불러보세.
아래에는 이러한 항일노래의 원 곡조인 <조지아 행진곡>, 찬송가로 개작된 <우리들의 싸울 것은> 그리고 항일 민족 노래로 개사된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독립군가>가 영상을 차례로 올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보충설명을 덧붙입니다.
<조지아 행진곡> https://youtu.be/H-jtYT5COvU?si=zJa9Q9XLZXUDylvK
찬송가 <우리의 싸울 것은> https://youtu.be/LkUrUBpj1SU?si=dLHavUXOkKNcBSlq
<신흥무관학교 교가> https://youtu.be/FI0Sd5UF8U8?si=Mlt1WXcNK69e3pd2
<독립군가> https://youtu.be/3g8Pnsky1e8?si=6vC86Ev-Y1HZMKvS
- 추가설명 : 신흥무관학교와 이회영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군사적 기반은 두텁지 못했습니다. 1940년 광복군이 설립될 때까지 임시정부는 정치적 대표조직이었습니다. 그러면 항일독립운동의 군사적 주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항일 독립운동의 군사조직은 여러 계통이 있지만, 그 가장 오랜 연원은 신흥무관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지하듯이 신흥무관학교는 구한말 일제 강점이 임박한 시기 이회영 이시영 가문이 그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식솔들이 모두 이전하여 세운 독립운동 기관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명운이 꺼져가던 때 최대 민족운동 조직이었던 ‘신민회’ 지도자들이 국외 독립운동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결의하였고, 당대 최고의 가문이자 ‘삼한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들은 이회영의 주도 하에 가문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정합니다.
다음은 가족회의에서 이회영 선생의 발언이었다고 합니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世德)이 이 시대의 으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근심을 같이 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李丁奎·李觀稙, 友堂李會榮略傳, 을유문화사, 1985, 175쪽; 한시준,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0집, 9쪽 재인용)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세워져 1920년 문을 닫을 때까지 3500여명의 인재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후에 민족운동 군사조직의 주축이 됩니다. 1920년 전후로 만주에서 수립되어 임시정부의 군사 부문을 담당하였던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도 신흥무관학교 교관 혹은 학생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서로군정서의 독판(督辦)과 부독판이었던 이상룡과 여준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들입니다. 사령부 사령관 이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입니다. 북로군정서의 교관 이범석도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이었고, 그 외에 주요 간부들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후 청산리 전투에도 대거 참여하게 됩니다.
일제의 초토화 작전(‘경신참변’)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북만주 남만주에서는 무장 투쟁이 지속되었고, 역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북만주의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재만)’의 군대)은 이청천이 총사령으로 이끌었고,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조선혁명당(재만)’의 군대)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김학규가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한때 임시정부 세력을 능가하였던 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여러 졸업생들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던 것입니다. 김원봉 등 의열단 단원들은 이후 다시 중국 국민당의 핵심 군간부 배출 기관이었던 황푸군관학교에 대거 입학하여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후 조선의용대로 발전하여 관내 최대의 무장독립운동 진영이 됩니다.
1940년 임시정부도 마침내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조선의용대가 의열단, 그리고 민족혁명당의 당군이었다면,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군대인 국군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 광복군의 주요 간부들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이청천은 광복군 총사령, 신흥무관학교 학생이었고,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제1지대장,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이범석은 제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김학규는 제3지대장을 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