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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3~19
새해 첫 주일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년에도 희망을 찾기 위해 새해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일출의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저들은 역동하는 소망을 찾으려고 지리산에도 오르고 태동하는 기운을 받으려고 최동단인 정동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우리 상내백교회 성도들은 더욱 강렬한 소망의 빛을 주시는 ‘의로운 태양’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와 연말연시를 성경통독으로 보내었습니다. 신약을 다 읽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구약을 또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는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다 참석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2 가장 중요한 첫 순간에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며 첫 시간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복되고 황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의로운 태양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의 축복은 시편 73편 28절을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의 시간인 것입니다. 새해가 밝아 온다고 해서 저절로 희망이 찾아오겠습니까? 매년 반복되는 일출을 본다고 해서 새로운 소망이 생기겠습니까? 참으로 가슴 가득한 진정한 소망과 평화는 의로운 태양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남으로써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역사의 방향은 완전히 다르게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기준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기원전, '비포 크라이스트(Before Christ)' 라고 할 때 우리가 B.C.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전. 그리고 주후를 A.D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데 주후를 말할 때는 우리가 주후라 하지만 원래 주후가 아닙니다. '에프터 크라이스트(After Christ)'가 아닙니다. A.D.라고 하는 것은 '안노 도미나이 (Anno Domini)'라는 뜻인데, 안노(Anno)라고 하는 말은 '해'라고 하는 말이에요. 년, 해 그런 뜻이고 도미나이(Domini)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영어로 옮기면 '인 더 이어 오브 아우어 로드(In the year of our Lord)' 그것이 A.D.예요. 예수를 기준으로 해서 주 전, 주후가 아니고 주전은 주전이지만 주후는 주가 다스리는 해, 즉 우리 주님이 주관하시는 해, 이런 뜻이 A.D.예요. 예수의 나라, 예수가 다스리는 세계, 예수가 다스리는 세계가 이렇게 연장되고 더 확장된다는 그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죽음에 속한 것을 낡은 것이라고 하고 계속적으로 생명에 속한 것을 새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좋아하는 보석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집이라든가 혹은 여러분이 차고 있는 시계라든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딱 내 손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낡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한 번 탔다 내리면 중고입니다. 오늘 사고 내일 팔아도 중고차입니다. 그건 중고차 시장에서 팔리는 거예요.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옛날에 속합니다. 낡아집니다. 그런고로 옛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에 속한 것을 보세요. 여기 좋은 시계가 있고 여기 콩이 한 줌 있다고 생각합시다. 이 콩과 시계, 시계가 비싼 거지요. 수십만 원짜리. 상대가 안돼요. 시계는 아주 비싼 것이지만 그것은 낡은 것이예요. 그러나 콩은 땅에다 묻어놓으면 싹이 나고 다시 생명이 솟아오릅니다. 그런고로 살아있는 것은 새 것이요 죽은 것은 낡은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살아 있는 것은, 생명적인 것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생하고 다시 생명을 출산하고 다시 성장하고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계속적으로 더 새로워지는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것은 썩어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죽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옛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낡은 것입니다. 이렇게 새것과 낡은 것을 분별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건 자연적 변화나 시간적 개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명, 오로지 창조적인 역사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특별히 중요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보편적 개방적 의미의 말씀인‘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누구든지'라고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부자냐 가난하냐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젊었느냐 늙었느냐,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상관 안 해요. 어제냐 오늘이냐고도 묻지 않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고 그리스도밖에 있는 것은 다 낡은 것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선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새것 됨의 조건은 오직 하나,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예수 안에, 그리고 엔토 크라이스트, 오직 그리스도, 이렇듯 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구속받은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이미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순간 나도 부활했어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항상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일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나는 이미 어제 죽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노라 라고 선언하고 그리스도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비로운 생명의 속성을 새것이라고 말하며, 새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깨끗하게 장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신비로운 속성을 간직한 자입니다. 동시에 그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다 이제 새것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것으로부터의 완전힌 자유. 옛 속성, 옛 습관 그 낡은 모든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를 선언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각과 의식, 감성, 모든 면에서 낡은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릴 때 그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요 새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원 나무에 붙어 있으면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그래서 내 진액을 받아서 네가 존재한단다. 말씀 안에서 존재한단다. 내 생명력 안에 네가 살아있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마치 나무 가지가 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으면서 그 나무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 진액을 받아서 존재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로운 생명적 관계를 가르쳐서 새사람,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하게 됩니다. 동시에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은 바로 성령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그로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하는 그런 신비로운 성숙, 이러한 생명체를 새사람, 새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다시 본문 성경에서는 아주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새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첫째, 재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은 목적이 새로워집니다. 오늘 15절 말씀을 보시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함이라. 목적이 바꿨어요. 혹 방법은 아직도 옛날 사람일 수도 있어요. 혹 미흡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때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목적이 그리스도를 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목적은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해서 이 목적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빌립보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내가 선택한 이상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철학도 아닙니다. 내가 세운 이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목적이 아니고 그가 나를 포로로 해서, 완전히 강권적으로 체포해서, 내 길을 돌려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그런고로 내 목적은 내 것이 아니에요. 그가 만들어주신 것이고 그가 강권적으로 세우신 목적이요. 그 목적을 내가 내 것으로 삼고 기쁜 마음으로 쫓아가노라 그랬어요. 억지로가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이것이 새사람이요.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목적이 확 바뀐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그리스도께로 향할 때,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 분을 위할 때 비로소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동력입니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사느냐 하는 겁니다. 새 피조물은 그 삶의 힘이 그 원동력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삶의 힘이 무엇입니까? 욕심, 혹은 증오심, 시기, 질투, 경쟁심, 어떤 사람들은 복수하는 마음, 어떤 사람은 죽고 싶어도 억울해서 못 죽어. 억울해서라도 살아야겠어. 발악하면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그 힘이 어디에 있느냐, 미워하는 마음이예요. 질투하는 마음이예요. 어떤 사람은 이 경쟁심이 강해가지고 경쟁자가 없으면 숫제 아무 것도 못해요. 이기려고 바득거릴 때만 제대로 되어요. 이거 빼놓으면 없어요. 그 사람하고 싸우고 이기려고 하다가 그 사람 죽어버리면 나도 죽어버려요. 도대체 당신의 삶의 동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걸 알아야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오늘 본문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도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사는 거예요. 미움으로 사는게 아니예요. 억지로 사는 것도 아니예요. 사랑에 취해서 살아요. 사랑에 끌려서 살아요. 이 사랑이 바로 생명력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 여기에 취해 가지고 나아갈 때 새사람이죠. 이 사랑의 줄이 끊어질 때 우리는 다시 저 깊은 수렁으로, 옛사람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고요. 새 피조물은 16절에 보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체 대로보고 육체대로알지 아니하노라" 즉 신령한 세계에 살아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의 세계,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지혜의 세계,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는, 영적인 세대를 말합니다. 영이 지배하고 영이 주관하는 영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신령한 가치관에 살고 또 사명에 삽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화목할 뿐만 아니라 화해케 하는 피스 메이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미워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누구라도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한 당신은 옛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오직 화평, 모든 사람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또 화해되지 못하는 세상에 들어가서 피스 메이커로 화목케 하는, 화목을 만드는 그런 직책을 가지고 오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선포되는 복음을 내가 받아들일 때, 믿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이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갖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매일 말씀을 듣고 성령에 충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만들어 가는 해산의 고통입니다. 종교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성품보다 큰 영향력도 없고 성품보다 더 큰 힘도 없습니다. 변화는 사실 논리적이기보다 심리적입니다. 왜 이렇게 변화가 힘들까요?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됩니다. 감동을 주고받는 성숙한 성도들이 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귀한 비전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새 해, 새 환상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날 때 이 시대가 변화됨을 믿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각자의 사업장과 가정과 자녀들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주신 본분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