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근대사[아유타야왕조]
13세기경 태국 북부 산악지역중원으로 진출한쑤코타이(Sukhothai) 왕조 (1238~1378) :10세기경부터 타이족들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태국의 광대한 평야에 정하게 되자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3세기에 타이족은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북부의 란나타이 왕국(타이유언족), 쑤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태국 중부의 쑤코타이 왕국(샴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의 랑싼 왕국(라오족) 등 태국계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이와같이 13세기에 출현한 타이족의 여러 소왕국중 가장 번성함과 동시에 태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왕조의 기틀을 형성한 쑤코타이 왕국은 태국 역사상 정통 왕조로 1238년 타이족 일파의 수장 퍼쿤 방끌랑타우와 퍼쿤 화므엉이 크메르 왕국의 쇠퇴를 틈 타 북서부의 주요 거점인 쑤코타이를 정복하여 건국한 나라이다. 쑤코타이 왕조는 제 3대 람캄행(Ramkhamhaeng)왕(재위 1277~ 1317)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람캄행왕은 크메르 문자를 변형시켜 타이문자를 발명하고 스리랑카로부터 소승불교를 도입하였다. 또한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안정적으로 주변국가를 복속 현재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람캄행왕의 사후 14세기 중반부터 쑤코타이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1378년 아유타야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아유타야(Ayuthaya) 왕조(1350~1767) : 쑤코타이 왕조가 점차 쇠퇴해가자 주변의 속국들이 모두 독립,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아유타야 왕국이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Uthong(Ramathibodi 1세)이 롭부리 지역에 1350년 건국한 나라이다. 14세기 말 주변국가를 복속시켜 왕국의 기반을 조성하고 1378년 Borommaracha 1세는 쑤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아유타야 왕조는 무역이 번창하여 서양 제국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9대 뜨라이록까낫 왕 때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갈만까지 통치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한편 16세기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인근의 미얀마와 잦은 전쟁으로 쇠약해지던 아유타야는 마침내 1569년 3년간의 미얀마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도를 점령당하고 미얀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레쑤언 왕은 1600년까지 미얀마군 완전히 축출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다시 아유타야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미얀마 군이 1765년 침공하여 아유타야 왕국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아유타야 왕국의 멸망으로 태국은 정치적 분열 및 혼란기를 겪었지만 딱씬이 톤부리 왕국을 세우고 미얀마를 축출 타이왕국을 재통일했다.
톤부리(Thon Buri) 왕조(1767~1782) : 아유타야 왕조가 망하고 미얀마 군의 공격 속에서 딱 지방의 성주이던 프라야 딱씬(Taksin)이 짜오프라야강 하구 서안 톤부리에 도읍을 세우고 잃었던 아유타야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미얀마군을 축출했다. 딱씬왕은 이전의 아유타야 왕국의 정치제도나 사회신분을 그대로 세습하고 치앙마이를 정복하는 등 타이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딱씬왕은 정신이상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게되고 딱씬왕 1대로 톤부리 왕조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대신 딱씬의 부하 장수였던 짝끄리 장군이 왕으로 추대되어 방콕으로 천도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짝끄리 왕조(랏따나꼬신 왕조)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랏따나꼬신(짝끄리) 왕조(1782~현재) : 1782년 딱씬 왕의 부하였던 짝끄리(King Yot Fa Rama I, 1782-1809), 장군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왕을 처형하고 도읍을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면서 현재까지 왕조가 지속되고 있다. 라마 3세때(Nang Klao, Rama III, 1824-51) 남동쪽으로 캄보디아 북으로 라오스까지 영토를 넓혔다. 19세기 들어 군주들이 유럽 국가들에 이권을 주고 그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태국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태국은 그 동안 유지해오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영국(1855년 보우링조약), 미국(1856), 프랑스(1856) 등 몇몇 서구열강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해외유학을 장려하였으며 도로건설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근대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쭐라롱껀 왕(라마 5세 재위 1868~1910)은 랏따나꼬신 왕조(짝끄리 왕조)시대의 사회변혁뿐만 아니 왕권을 더욱더 강화하여 절대주의 국가를 만드는데 정성을 쏟았으며 사법, 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였다. 또한 자국의 영토를 서구열강의 지배 속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집요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상당한 영토를 빼앗긴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양도했으며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방에 있던 속국을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1917년에는 연합국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라마 5세부터 추진된 국왕에 의한 근대화는 마침내 진보적 사상을 지닌 많은 관료와 군인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진보파 그룹은 자신들을 길러준 왕의 권력을 부정할 만큼 세력이 강해지고 왕족 전제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져 1932년 6월 24일 무혈혁명을 일으켰다. 인민당이 주도한 이 혁명에 의하여 태국은 절대군주제에서 벗어나 12월 10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왕은 새로이 입헌군주로서 국가 통합의 상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사이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입헌군주 시대 :태국은 마지못해 2차 세계대전에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1942년 피분 총리 정권하에서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1944년 8월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1945년 8월 16일 대영?미 선전포고는 일본의 무력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태국내의 친일파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에 자진해서 손해배상을 해주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에는 유엔에 가입하였다. 1946년 6월 10일 등극한 지금의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 왕)는 정치적 실권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계속되는 쿠데타에 의해 권력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현재까지 흔들림없는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태국에 유럽인들의 영향력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였지만, 프랑스의 그리스인 밀정 Constantine Phaulkon의 처형으로 한낱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 18세기 미얀마가 다시 침입을 해왔으며 1767년 오랜 포위공격 끝에 아유타야를 함락시키고 완전히 파괴시켜 버렸다. 시암 인들은 곧 단결하여 미얀마 인들을 몰아내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1782년 수도를 현재 방콕의 강 건너편에 있는 톤부리(Thonburi)로 옮겼으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차끄리(Chakri) 왕조가 라마 1세(Rama I)에 의해 세워졌다. 19세기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시암은 독립을 유지했다. 유럽 열강들의 서로 적대적인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였으며, 몽꿋(Mongkut; 라마 4세)왕과 출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V)왕은 열강들의 식민정책을 통하여 이득까지 챙겼다.
1350년 우통왕자[Prince of U Thong]가 아유타야지역에 아유타야[Ayuthata]를 수도로 아유타야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아유타야왕조는[1350 - 1767] 417년간 고근대 태국의 최대 번영을 하게된다 쑤코타이 왕조가 점차 쇠퇴해가자 주변의 속국들이
모두 독립,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아유타야 왕국이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Uthong(Ramathibodi 1세)이 롭부리 지역에 1350년 건국한나라이다.
14세기 말 주변국가를 복속시켜 왕국의 기반을 조성하고 1378년 Borommaracha 1세는 쑤코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아유타야 왕조는 무역이 번창하여 서양 제국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
하였다.
9대 뜨라이록까낫 왕 때에는 말레이 반도와 벵갈만까지 통치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중국의 쿠빌라이칸의 버마[현 미얀마] 바간의 점령이후 쇠퇴하던 버마가 16세기에 재통일되고 통일 버마군이 아유타야를 침공
하고 버마와 잦은 전쟁으로 쇠약해지던 아유타야는 마침내 1569년 3년간의 미얀마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도를 점령
당하고 미얀마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나레쑤언 왕은 1600년까지 미얀마군 완전히 축출하고 아유타야 왕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다시 아유타야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버마군이 1765년 침공하여 아유타야 수도는 파괴되었다.
아유타야가 결코 흡수하지 못했던 치앙마이가 1556년 미얀마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1569년에는 아유타야가 함락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멸망으로 태국은 정치적 분열 및 혼란기를 겪었지만 딱씬이 톤부리 왕국을 세우고 미얀마를 축출 타이왕국을
재통일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수코타이까지 통합하였다.
아유타야는 2세기 동안 현 타일랜드의 번영을 지탱할 가장 번성된 문화와 역사를 갖고 뛰어난 힘을 발휘했다.
크메르는 시암 영토 밖으로 밀려 났으며, 크메르의 수도인 앙코르는 정글 속에 유기되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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