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7월 30(금요일)일은 나의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음력으로 6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큰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6살) 용진이를 데리고 기영이 차로 대전을 가기로 하고 공주형님에게 헌 자전거 한대를 갖다주기 위해 잡으로 오라고 했다. 4시30분에 자전거를 차위에 싣고 출발을 했는데 마침 휴가철이라서 피서객의 차로 고속도로가 꽉 막혀 오산까지 평소는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1시간 반을 걸려 빠져 나갔다. 기영이가 피곤해서 졸립다고 해서 내가 운전을 했다. 망향 후게소에서 잠간 쉬고 공주로 빠져간다는 것이 북공주에서 내려야 하는데 남공주까지 가서 되돌아왔다. 전번에 북공주톨게이트로 빠져 나갔는데 이 톨게이트가 늦게 개통되어 안내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공주 중형을 모시고 대전에 7시 30분에 도착을 해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기영이 식구와 함께 둘째 딸 현희네 집을 갔다. 집식구가 마련해주는 반찬을 갖다 주려고 들렸다 기영이네 식구는 처음 가보는 집이었다. 케이크를 사가지고 갔다. 기영이가 축복하는 기원을 했다. 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올라오는 길에 들르러 하였는데 제사를 지내고 나면 너무 늦을 것 같아 갔다가 돌아왔다. 밤에 그냥 올라가기로 했는데 기영이가 밤운전을 하기 어렵다고 해서 제사를 10시에 지내고 12시 경에 현희네 집에 가서 올라왔다.
제사의 축문은 내가 지어 읽었다. 그 축문은 다음과 같다. 제주가 장조카이기 때문에 큰형님이 제주였던 상황과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
증조할아버지 축문
금년 음력 6월 19일은 양력으로 2010년 7월 30일입니다. 또 한해가 가서 할아버지의 기일을 맞이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5년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저의 어머님, 세 분의 삼촌과 숙모, 그리고 당숙 내외분, 기영이 내외가 아들 용진이를 데리고 참석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손자로는 국진이와 용진이가 모두 참석한 셈입니다. 일년간 저의 대소가는 큰 일이 없이 무사히 지냈습니다. 금년도 예년처럼 더위가 심하지만 제 때에 비가 와서 그래도 기후는 좋은 편입니다.
지난 3월에는 인천 앞 바다 백령도 남쪽에서 우리 군함 천안호가 북한 괴뢰의 어뢰 공격을 받아 46명의 해군들이 전사를 당했고,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구제하려다가 민간어선이 침몰되어 그에 탔던 6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 하고 말았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을 규탄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북한의 후원자를 자칭하는 중국의 반대로 이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천안함 침몰사고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조사에 참여하였고, 50일간에 걸친 과학적인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좌파성향인 참여연대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이 조사가 의심스럽다는 조작된 의혹을 인터넷으로 외국에 보내 국제적 망신을 샀습니다. 그리고 동해에서 한미연합해상훈련을 대대적으로 했고, 이에 대해 중국과 북한은 강경책을 쓰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북한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하여 국제적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언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예측을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거나 저녁에 T.V. 뉴스를 보고 나서야 아 오늘도 무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이 땅에 전쟁이 위협이 없는 시기가 올런 지 알 수가 없습니다. 휴전선 가까이에서 근무하던 건영이가 곧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금년에 저의 집이 수용되어 저와 막내 숙부는 이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할아버지의 제사는 이번이 마직막인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인자하신 성품을 오늘 제사 전에 숙부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대소가가 일년간 또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영령께서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과일과 음식을 정성껏 차려 놓았고 평소 좋아하시던 술을 손자들이 모두 한잔씩 올리니 흠향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음력 2010년 6월 19일 효증손 형순 올림
내가 작년에 말해서 이번 제사부터는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함께 모셨다. 장조카가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셨다. 장조카가 祭榜(제방)을 써 놓기는 했는데 붙여야 하느냐고 묻기에 붙여야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방 옆에 놓게 하였다. 제방은 신위와 제주의 관계를 밝히는 할아버지의 명찰과 같은 것이고 할머니의 영정도 없기 때문에 함께 제방을 붙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1925년에 돌아가셔서 영정사진조차 없다. 영정을 준비한 것은 할아버지를 우리가 친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 손자 용진이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가는 차 중에서 물었는데 인정이 많고 수염이 나셨다고 하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해주지 못했다. 영정을 보니 고조할아버지를 친견하는 것 같았다. 용진이는 절을 두번 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이 절을 하기 전에 먼저 두번 절을 올렸다. 나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왜 분향을 하는가, 첫 술잔이 강신이라는 것 등 절차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축문을 내가 읽고 나서 나는 곡을 했다. 이는 할아버지가 기제사 때에 슬피 곡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나 혼자 곡을 하곤 한다. 또 장소가 외딴 집이라서 곡을 하기에 환경이 적절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용진이는 내가 눈물이 났는지를 살펴보았다.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제사는 복을 비는 좋은 길례인데도 곡을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슬픔이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섯살 먹은 용진이는 술잔을 내리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할어버지의 고손자인 국진(큰형님 손자), 용진이 까지 모두 헌주를 하게 했다. 아이들이 제사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깊게 들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큰형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한 잔씩을 올리게 하는 가풍이 조성되었다.
음복을 하는데 공주 중형이 식도염과 위염으로 술을 끊었다고 드시지 않고 다른 사람은 운전때문에 한잔씩 했다. 그래서 나는 서너잔을 마셨다. 음복을 할 때에 용진이게도 조금의 술을 먹게했고 무엇이든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으라고 했더니 산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아마도 산자가 가장 신기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제사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 기영이가 다신 현희네 집에 가서 아침 일찍이 가자고 해서 다시 갔다.
다음날 아침 5시에 일어나 두 시간만에 올라왔다. 오는 도중 입장 휴게소에 들려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기영이는 야구공을 쳤다. 3세대 가족이 여행의 즐거움을 20분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영이 집에 도착하여 우리는 넷이 단국대학교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30분간 했다. 운동장은 잔디로 깨끗하게 만들어졌다. 어린 용진이는 400미터 트랙을 두 바퀴 거뜬히 돌았다. 나는 겨우 한 바퀴를 돌았다. 고향나들이가 손자때문에 모처럼 즐거운 걸음이 되었다. 돌아와서는 용진이와 바둑 한 수를 두었고, 한자 '人和'라는 것을 쓰게 했다. 和자를 쓰는데 순서가 맞지 않아 바로 잡아 주었다. 벼화 변에 입구, 벼화는 나무목 위에 잎이 하나 빗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음식을 가려먹지 않게 했다.
첫댓글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릅니다.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자라나는 후손들이 배우고 따라가겠지요.
가풍도 자연스럽게 형성이 될테고...
보기드문 가정의 모습입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