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도심을 걷다.
허지수
그저께 금요일 많은 비가 내려서 토요일에 실시하는 대구 도심투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밤잠을 설쳐가면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토요일 날씨는 엄청 좋다 못해 덥기까지 했다. 오늘이 바로 수업시간에 들었던 ‘인디안 썸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 봄 날씨! 날씨까지 받쳐 주는 답사! 비온 뒤의 산뜻한 공기! 답사하기에는 최적의 여건이다.
정작 답사는 오후 2시부터 시작하는데 아침부터 부산을 떤 덕에 일찌감치 경상감영 공원에 도착했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없다. 벤치에는 나이 든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삼매에 빠져 있다.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둘러봤다. 풍광이 낯설지 않다. 몇 년 전에 와 봤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심결에 지나쳤는데 오늘 하나하나 구경하면서 걸으니 그 때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반가이 인사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때마침 공연도 하고 가마 타는 사람도 있고... 외국인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그런 곳이다. 조선시대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난번에 왔을 때는 알지 못 했을까?
경상감영공원은 조선 선조 때 경상도 지역을 다스린 감영이 있던 자리로, 그 터를 보전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1910년부터 1965년까지는 이곳에 경상북도 청사가 있었고, 도청이 옮겨간 후 1970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대구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앙공원’ 이라 불리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감영공원 자리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집터였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대구의 정기는 최정산(앞산)-삼봉산(수도산)-연귀산(제일여중)-아미산(보현사)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보았다. 아미산에서 천보 떨어져 있는 이 자리가 ‘하루에 천 냥’이 들어오는 명당이라면서 집터를 잡았다. 경주와 상주에 있던 감영을 대구로 옮기면서 조정에서는 두사충의 집터에 관아를 짓고 두사충에게는 계산동 일대의 땅을 줬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선화당과 징청각이 남아 있고,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그밖에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 분수, 돌담, 자갈이 깔린 산책로,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이 있다.
먼저 선화당은 대구 유형문화재 제1호이며 경상감영의 정청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34년(1601)이 곳에 건립된 건물이다. 그 후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세 차례의 큰 화재로 불탔으나 순조 7년(1807)에 새로 지었고 1970년에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관아 건축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귀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두 번째로 본 것은 징청각이다. 징청각은 1972년에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경상감영에서 관찰사의 처소로 쓰던 건물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구군의 군 청사라고 교수님께서 설명하신다. 관찰사의 처소는 내아로 서쪽에 따로 있었다고 한다. 징청각은 경상감영을 대구로 옮겨올 때 선화당· 응향당 ·제승당 ·응수당 등 여러 채의 건물과 함께 지어졌다. 선화당과 함께 대구에 남아 있는 관아 건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
징청각 뒤 북쪽 담을 따라 많은 관찰사들의 선정비가 서 있다. 선정비는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다. 관직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잘 다스렸을 때 도민들이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이다. 이는 그 사실을 심사하여 주사가 상황을 전달한 다음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우게 하였다.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시대별 비석의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경상감영공원에는 단독으로 세워진 하마비라는 비석도 있었다. 이 비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 앞에 서 있던 것으로 병마절도사 이하는 말에서 내려 출입하라는 뜻의 표석이다
경상감영공원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렸던 곳은 대구근대역사관이었다. 이 건물은 원래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 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분류되는 이 건물은 단순하게 처리한 전면부의 장식과 수평선을 강조한 지붕 슬라브의 처리가 특징적이며 원형이 잘 남아있어 2003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대구도시공사로부터 기증받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고 2011년에 개관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의 모습을 모아둔 곳으로 1층 밖에 구경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다. 나중에 2층도 한번 가봐야겠다.
경상감영공원을 나와서 중앙로를 건너 동성로로 진입하니 답사 객이 많이 불었다. 길 가던 시민들도 따라오면서 연신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특히 서울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다닌다는 학생들이 우리보다 더 관심이 있는 듯 교수님 곁에 착 달라붙어 턱 밑에서 열심히 메모한다. 괜히 무엇을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질투가 나려한다.
진골목으로 갔다. 진골목은 골목이 길다는 뜻으로, 경상도 말은 ‘ㄱ’를 구개음화시켜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기 때문에 ‘긴 골목’의 뜻이 된다. 지금은 차도 지날 수 없는 좁다란 골목길이지만 예전에는 부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당시 높은 천장과 아름드리 기둥이 있는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재는 음식점으로 바뀐 집이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미도다방은 유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어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고, 정소아과는 1937년에 지어진 대구최초의 양식주택이었다고 한다. 건물도 지금에 비하면 옛날식 건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현재 도시 같지 않고 TV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 동네의 모습이다. 밤에 지나가면 무서울 거 같기도 하였다.
진골목을 빠져나와 형형색색의 염매시장 떡 가게들을 가로질러 발길을 관덕정으로 향했다. 관덕정은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치던 도시청이었고 앞에는 큰 연병장이 있었다. 연병장은 경상도의 중죄인을 처형하던 처형장이기도 하였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최후를 맞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인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그때 사용한 ‘황새바우’란 형구가 기념관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8개 정도 남아 있다는데, 이 형구를 관덕정에 기증하신 분이 김재원씨라고 오석으로 된 받침돌에 크게 새겨져 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교수님이 기증했다고 했다. 입수에서부터 기증까지 과정을 설명해주셨다. 어렵사리 구한 귀중한 역사 유물을 필요한 곳에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교수님은 서슴없이 해내셨다. 역사유물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연구하도록 제공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교수님은 이를 실천하셨으니 작은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장한 일을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약령시로 갔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한약 냄새가 솔솔 났다. 옛날의 이곳은 조선 제일의 한약재 시장이었다. 봄, 가을 약령시가 서면 중국, 일본, 만주, 오끼나와 등지의 외국 상인들까지 와서 붐볐다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지만 현재는 명맥 유지에 급급한 것 같다. 한약재만이 아니라 떡집, 한복 같은 업소도 많고 곳곳에 문 닫은 곳도 보였다.
약령시에서 위로 올라가니 옛 제일교회가 나왔다. 지금은 박물관처럼 자리 잡고 있다. 교회 건물을 덮은 담장이 때문인지 으스스한 기운이 감돈다, 새로 지은 제일교회는 동산병원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제일교회 맞은편의 교남YMCA건물 옆으로 돌아서 이상화 고택으로 갔다.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우리 정서를 언어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민족 시인이다. 1940년대의 모습으로 복원된 집 안에는 이상화가 쓰던 물건과 사진들, 그의 생애를 정리한 글 등이 눈길을 끈다. 이상화는 위암을 앓다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이 고택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맞은편에 있는 서상돈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 근대문화를 담고 있는 유서 깉은 곳이다. 이곳은 그가 40대부터 살기 시작한 집이라고는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서상돈은 여기서 살지 않았고 복원 자체도 잘못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아파트 개발로 사라질 뻔했던 고택이 이 정도로나마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 다음에 간 곳은 계산성당. 내가 신명고등학교를 다녀서 시내를 나갈 때면 항상 봐왔던 곳이다. 그러나 여기가 그렇게 의미 있는 곳인지는 몰랐다. 그냥 성당이구나 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오늘에서야 계산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계산성당은 100여 년 전 대구에 처음 들어선 서양식 건물로서 우리나라 전체로는 세 번째 영남지역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고딕양식 성당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구 동산동 현재 제일교회 담을 따라 200m 정도 오르막길에 90계단이 있다. 이곳은 내가 신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3·1운동 기념행사 때면 전교생이 단체로 올라가기도 해서 익숙한 곳이다. 그때 생각이 다시 떠오르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이것은 3·1운동 길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 3·1운동 때는 이곳을 지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계단을 세워보니 딱 90여개였다. 사람과 손수레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독특한 돌계단으로 1박 2일의 강호동이 2010년에 전국에 소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돌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동산언덕이 나타난다. 이곳은 학창시절 때 많이 놀러온 곳으로 그 때의 추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영화 촬영도 하고 결혼사진도 많이 찍는 유명한 장소였다. 연인끼리 오면 정말 예쁜 곳!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푸른 담쟁이덩굴로 덮인 100여 년 된 건물들이 많아 청라 언덕으로도 불리는 동산이다. 또 한 이곳은 100여 년 전 대구 기독교가 싹트고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동산이기도 하다. 지금은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100여 년 전 동쪽에 있는 산이란 뜻의 동산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작은 산이었다고 한다. 원래 동산은 달성 서씨 문중의 산이었으나 1899년 미국인 출신 선교사들이 사들였다고 한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동산이 그들에게는 병원을 세우고 선교사 주택, 정원. 학교를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으로 보였던 것이다. 1903년 병원은 동산 언덕으로 옮겨갔고, 1905년 종합병원으로 거듭 났으며 1931년에는 일자형 적벽돌 쌓기로 3층 건물이 지어졌는데 바로 지금의 동산병원 구관이다. 외관이 잘 보존돼 있는 이 건물은 2002년 근대건축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걸어 다닌다고 조금 힘들긴 하였지만 대구에 살면서 한 번도 가지 못했던, 무심코 지나쳤던 곳을 오늘에서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어 보람 있는 하루였다. 대구에 살면서 왜 이런 곳을 몰랐는지 후회스럽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을 왜 그땐 알지 못했을까... 이제라도 그 가치를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