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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해석학 (時空解釋學, Space-Time Talk) (21)
공간 시간의 말 (Space-Time Talk)
張貞文 博士 著, 姜德昌 博士 譯
차 례
제 1 부 비판적 맥락
제 1 장 서론 : 문제와 방법
제 2 장 실존론적 해석과 공간 시간 언어
제 3 장 상징적 해석과 공간 시간 언어
제 4 장 언어적 상징론과 공간 시간 언어
제 2 부 분석적 해설
제 5 장 신약성서 신화 안에 있는 공간 시간 언어의 위치와 그 상징적 특징들
제 6 장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 시간 언어 그 상징적 의미
제 7 장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시간 언어
제 3 부 통합적 결론
제 8 장 하느님 언어와 그 해석학적 적용
제 6 장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 시간 언어 그 상징적 의미
ㄱ.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적 언어:
사례연구 : 3층 우주관
1) 그 역사적 정황
2) 공간 언어의 상징적 발전
3) 공간 언어의 상징적 의미
ㄴ. 신약성서 신화의 시간적 언어
사례연구 : 파루샤(재림)
1) 그 역사적 정황
2) 파루샤 언어의 상징적 발전
3) 시간 언어의 상징적 의미
제 6 장 新約聖書 안에 있는 空間 時間言語의 象徵的意味
앞의 章들에서 우리는 현대의 解釋學이 신약성서 신화 안에 있는 공간 시간언어에 대하여 제기하는 문제들과 그 신화적 언어의 특징들을 논했다.
이 진술들을 배경으로 하여 本章에서는 그 공간과 시간언어의 意味를 탐구하고자 한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일어날 수 있다. ‘도대체 意味란 무엇인지 그 의미의 성질을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意味論的理論들에 대한 길고 복잡한 論議를 해야 하는데 주1) 우리는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만을 간단히 말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意味란 傳達과의 관계에서 普遍化되는 것을 특성으로 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Urban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에 의해 표시되는 모든 것은 普遍化 되는 뜻이 있다. 어떤 싸인(標識)이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짓든지 그 이름 짓는 행위자체, 말하는 행위자체가 그 특정표지를 변형시켜 보편화한다.”주2) 이 보편화되는 것을 意味論的 意味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필수조건 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고찰해야 한다. 그것은 普遍性과 相通傳達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상통 혹은 전달, 말을 달리하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것인데 이 커뮤니케이션이 밖으로 표시되었거나 그렇게 되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모든 意味論的 意味는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달 즉 커뮤니케이션이 보편성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Sapir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다.
언어의 요소들, 즉 경험들을 표시하는 상징(symbols)들은 單一經驗自體들보다도 規定된 部類들과 연합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전달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단일 경험은 개인적 意識에 머물게 되어 전달이 전혀 불가능하다. 전달되기 위해서는 어떤 旣知의 部類과 이어져야 한다. 공동체 혹은 사회는 그 부류가 무엇인지 그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주2)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불꽃놀이를 생각해보라. 이 단어가 있기 전에 그 현장이나 사건은 그것을 처음 만든 사람의 경험일 것이다. 그가 어떤 마을에 가서 자신만이 아는 그 경험을 실험으로 보여주거나 이야기로 설명해 준다면 그 장면을 처음으로 보거나 듣는 사람들은 불이나 꽃, 불꽃, 놀이라는 그 개별적 類槪念으로 연상하게 될 것이고 불꽃놀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될 것이다.
놀이라는 類槪念을 음미해보라. 놀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화투놀이, 아이들의 병정놀이 등.. 불이나 꽃 같은 부류개념도 원시공동체에서 처음에는 그런 과정으로 알게 되고 익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部類개념이 인간의 의식에 먼저 들어와 識別하게 되고 공동체에 공감 전달되면서 보편화 되어 의미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보편성이 의미론적 의미의 필수조건인 것처럼 의미론적 의미는 전달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서 개별적 경험들은 전달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인간 공동체가 그 보편성을 암암리에 받아드려야 한다. 보편성을 상호간 인정한다는 것은 전달의 조건이다.
의미론적 고찰에 대한 이상과 같은 진술을 기본적 원리로 하고 이제 우리는 주어진 본문들, 즉 삼층우주관과 파루샤, 승천이야기의 상징적 구조를 분석할 것이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먼저 본문의 역사적 맥락들을 간단히 고찰한다.
ㄱ) 신약성서 신화의 공간적 언어
事例硏究(case study) 三層宇宙觀 (three-storied universe)
1) 역사적 정황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바와 같이 불트만이 말하는 삼층우주관은 우주가 三層으로 구성되었다는 원시적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가 하늘과 땅과 지하의 세계로 되어있다고 믿는 고대인의 신앙이다.
하느님과 천사들은 天上界에 살고 있고 地下界에는 고통이 그치지 않는 地獄이 있다. 地上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하느님과 천사들이 사탄과 마귀들을 만나게 된다. 불트만은 말하기를 이 모든 신화적 언어들은 유대교의 黙示思想과 헬라의 그노시스(靈知主義)의 구원신화들에서 왔다고 했다. 이 삼층우주관이 과학이전시대의 신화적 개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 (시 148:4, 24:2, 104:5, 창 7:11, 등)
이 우주론적 신화의 起源을 알려면 바벨론과 기타 古代近東나라들의 우주적 표상들을 읽어야 한다. 고대의 신화들은 암시적 힘으로 남아있다. 이 신화에 의하면 宇宙界는 원시적 카오스(混沌)와의 투쟁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어떤 투쟁이었던가. 천상(天上) 높음의 하느님이 ‘깊음’의 수마(水魔)를 쳐서 이기는 싸움이었다. (깊음은 Tiamat, Tehom으로, 창1:2; Rahab, Tsa.으로,창51:9이하, 시. 89:9이하, Leviathan으로도 표시, 시.104:26, 욥41:1)주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대의 표상들은 히브리인들의 신앙으로 해서 대폭 ‘非神話化’ 되었다.주6) 이에 대한 예는 ‘하늘’에 대한 히브리 신앙인의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하늘에 神의 활(弓)이 걸려있다는 생각을 이어가고 있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활개념을 무지개라고 고쳐 말한다. 바벨론은 그것을 별자리(星座)로 본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늘의 무지개를 다시는 대홍수를 보내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언약의 표로 믿었다.(창 9:12-15), 다른 고대나라문화들에서는 하늘에 걸린 신의 활을 매래에 일어날 권력자들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주7)
우리는 이 현상을 공간적 이미지가 시간적 이미지로 옮겨지는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발전은 언어적 상징론의 원리와 일치한다.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靈的인 것은 物質的인 것으로 표현되고 自然的 사건들은 時間的 이미지들로, 즉 希望과 期待라는 말로 해석된다. 이 시간적 이미지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실존론적 의미로 받아드렸다.주9) 實在에 대한 상징적 발전이 그 어떤 것이든지 히브리적 상징주의는 경험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름기둥’, ‘영광’,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진노’, 등 단어들이 모두 일상적인 삶과 일상적인 언어에서 취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깊음’, ‘스올’, ‘하늘’, 등의 공간언어에서도 나타난다. 黙示文學이 일어나면서 히브리적 상징주의는 흔히 비유적이고 空想的형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상하고 奇怪한 想像으로 표현하고 과거의 역사와 未來史를, 혹은 하늘을 몇 단계, 몇 층으로 분활하는 묘사도 했다.
위의 모든 설명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삼층우주관의 예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배경문제를 말하게 된다. 그것은 그노시스(靈知主義)에 대한 것이다.주10) 불트만은 쓰기를 “영지주의적 용어들은 삼층우주관의 어휘들이나 그 이야기와 類似하다. 삼층우주관은 아마도 이 영지주의자료에서 영향을 받았거나 취했을 것이다. 복음서 전체와 서신들 안에 그 흔적들이 보인다.”주11)
불트만의 이 영지주의적 영향문제는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켰다.주12) 우리는 여기서 그의 가설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복잡한 문제에 관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요점은 불트만이 영지주의 신화라고 말하는 ‘Urmensch'(原人)이 공간 시간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노시스 神話는 宇宙論的二元論이다. 이 신화를 간단히 소개한다.
靈魂 (인간의 본래의 自己)은 하늘 原人의 光體의 한 조각 혹은 불꽃이었다. 原初時代에 이 빛의 原人이 黑暗나라의 惡靈들의 수중에 떨어져 찢기고 분말 조각들이 되었다. 암흑의 混沌에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이 빛조각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天上의 빛세계를 모방한 것이다. 만약 이 빛조각들 하나하나가 악령들에게서 빠져나간다면 이 악령들의 세계는 본래의 혼돈으로 전락될 것이다. 그래서 악령들은 포로가 된 빛분말들을 엄중히 감시한다. 이 감시자는 인간 안에 幽閉된 불꽃(인간의 內的自己)을 집중적으로 감시한다. 악령들은 인간을 혼수상태에 빠져 잠들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 중 어떤 자는 잠들지만 다른 인간은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뜨고 있으며 자기가 옥중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옥중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늘의 큰 빛의 神은 악령들에게 잡혀있는 빛의 분말조각들을 불쌍히 여겨 이들을 구출하고자 자신의 아들을 下界에 내려 보낸다. 이 빛의 아들은 악령들에게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地上肉體의 옷을 입고 모습을 바꾸어 地上에 내려온다. 降臨하신 하느님의 아들은 빛의 조각들로 하여금 인간 自我를 되찾도록 불러낸다. 그는 빛조각들이 그들의 本鄕을 想起하여 하늘본향으로 돌아가도록 그 길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주의 악령들이 머물고 있는 하늘의 여러 遊星圈을 무사히 통과하는데 필요한 聖스러운 呪文을 빛의 조각들에게 傳授시킨다. 자기가 하느님에게서 보냄 받았다고 알려준다. “나는 牧者이다.” “나는 眞理이다.” 등.. 가르친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명을 다하고는 아버지에게로 승천한다. 이리하여 구원의 길이 열린다.
빛의 조각들은 죽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될 때 하느님의 아들이 가신 길을 가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의 임무는 산산조각이 된 빛의 조각들을 모으는데 있었다. 그가 시작한 이 구원사업은 빛의 조각들 모두가 해방되고 하늘본향으로 귀환하여 본래의 原人의 光體를 되찾을 때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世上은 終末이 되고 본래의 混沌으로 돌아갈 것이며 흑암만이 남게 된다. 이것이 흑암이 받게 될 罰이다.
위 原人神話에서 보는 대로 ‘天上界’, ‘가장 높으신 하느님’, ‘내려오시다.’ ‘하늘 본향’, ‘하늘로 돌아가는 길’, 등의 어휘들은 모두 공간과 시간언어들이다.주13)
이상의 그노시스 例話와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신약성서신화의 배경이 공간관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특히 히브리적 전통에서는 공간적 언어가 시간관계의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요소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히브리인의 신앙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外向形式(표현 expression)을 결정짓는 것은 內的實在라는 사실이다. 이런 뜻에서 Amos Wilder의 말은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조하기를 “초대교회문헌의 형식들은 확실히 이 문헌을 산출한 신앙 혹은 삶의 자리에 의한 것이다.”주14)
이제 우리는 공간시간언어의 상징적 의미를 논하기 전에 삼층우주관의 의미에 대한 상징적 意味構造를 개관한다.
2) 공간언어의 상징적 발전
(도표 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상징적 발전
공간적 의미표시 상징의
성질들
공간언어의 (非空間化)
수직적 구분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에 높이
아브라함의 품에 올림, 장엄함,
하늘 (위) 우리와 너 사이에 영광, 빛,
보좌에 앉으심 능력, 영예,
거룩하심, 변함없음,
눈을 들어 하늘을 하얗고, 순수하고
우러러 봄, 위로, 행복함, 天父의 집
천부 함께하심, 축복받음
천사, ...로부터
보냄 받으셨다,
천사는 떠나갔다, 생명, 영원한 생명
하늘로 갔다,
...로부터 여기로,
아무도 건너오지 못한다,
내 아버지에게 올라가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地上세계 ..에, 안에, .. 사이에, 선과 악,
(여기) 여기, 저기, 행복함, 슬퍼함,
희망과 절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간에 고통
깊음 사악함
아래(下) 악한, 거짖된,
무저갱 어두음, 흑암,
절망,
죄, 죽음,
지옥(아래, 下界) 아래로, 저주받음
지옥으로, 희망없음
불못에 던져짐, 영원한 죽음
음간에 내려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공간언어의 상징적 의미
위 도표는 언어발전의 법칙에 따라 신약성서 신화적 언어가 “複寫(copy)에서 시작하여 類推(analogy)로, 유추에서 象徵(symbol)으로 발전”주15)하는 것을 보여준다. 말을 달리하면 空間的표시는 非空間的 관계의 象徵으로 해석된다는 뜻이다. 이 비공간적 상징은 ‘靈的內容’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언어는 필연코 “실재를 왜곡”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삼층우주의 공간언어를 해석해 보자. 우선 위에서 본대로 공간적 표시의 어휘들이나 문구들이 性質的 언어로 비공간화 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라는 문장은 威嚴, 빛, 하얗다 등의 이미지로 된다.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옥’은 고통, 악, 죽음 등의 단어와 관계된다. 전자는 긍정적 내용이고 후자는 부정적이다. 공간언어의 비공간화 과정이 필요한 것은 언어의 普遍的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 보편화의 의미들은 인간실존의 드러냄(disclosedness)에 관계된다. 인간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自覺하는, 自己自身에게 열려있는 存在이다. 이 인간실존은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처해 있는 존재이다.
마틴 하이덱거는 인간의 이 내면적 존재에 대하여 ‘드러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인간실존의 첫 째 되는 경험은 감각적 공간세계를 意識하는데 있다. 하늘은 ‘맑고’, ‘높고’ ‘빛나다’, 그리고 ‘흰구름’, ‘광활함’, ‘장엄함’ 등을 의식하며 언어로 설명한다. 태양 혹은 다른 天體들과의 관련, 높은 산들, 臣下들보다도 높은 권좌에 앉은 임금의 高이미지 등, 여기에는 ‘높음’의 이미지가 威嚴, 權力 등의 價値언어와 연결된다. 이 어휘들은 인간의 실존을 묘사하는, 類推的이고 象徵的方法들이다. 인간은 높음, 광대함, 빛 등을 의식할 때 인간 그 자신이 대단히 矮小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어두운(도덕적 의미로) 존재라고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有限意識에는 無限하고 완전하며 행복한 상태를 성취하려는 욕망이 들어있다. 인간의 언어는 상징적 변형을 통해서 性質的 내용으로 옮겨간다. 이 성질적 내용은 인간실존의 理想 혹은 靈的目的을 함유한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논한 상징적 언어의 의미를 신약성서의 맥락에 적용하고자 한다. ‘하늘’ 혹은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라는 표현의 의미론적 문제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과 관계된다. 하늘에 계시다든가 어디에 있느냐의 언어들 모두가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외적형식의 표현들이지만 그 속의 내용은 가치와 무게를 가진 언어로, 다시 말하면 靈的내용으로 변형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 아버지’라는 신비로운 존재의 언어가 처음에는 공간적인 감각경험에서 비롯했고 그 다음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 혹은 ‘내가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들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그 표현의 상징적 의미에 우주적이고 실존론적 意義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다.’라는 어구는 이 두 次元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거의 종교적 언어들에 마찬가지로 적용 되지만 특별히 하늘에 대한 신약성서의 언어에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그리스도론적 용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문제들은 공간-시간언어를 취급하는 본서 마지막 장에서 다시 논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공간시간언어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신앙고백으로 해서 價値化되고 깊어졌으며 의미심장한 차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지옥’에 대하여 간단히 몇 마디만 언급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지옥’은 ‘하늘’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성질적 단어나 어구들은 ‘하늘’에 대한 표현과는 대조적이다. ‘깊음’, ‘고통’, ‘암흑’, ‘죄’, ‘죽음’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옥’이미지에 대한 도덕적 성격이다. 이 말은 ‘하늘’이미지의 첫 자료가 공간적 감각세계에서 취한데 반하여 ‘지옥’의 이미지 자료는 인간이 자신 안에서 알고있는 意識的 삶의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은 감정들, 의지적 행동들과 기타의 가치들로부터, 주16) 온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 삶의 이 요소들은 ‘죄의식’, ‘죄’, ‘형벌’, ‘고통’ ‘죽음’ 등의 용어들을 가진 도덕적 언어로서 상징적 변형을 하게 된 것이다. ‘힌놈의 골짜기’, ‘감옥’, ‘바다의 깊음’, ‘무저갱’ 같은 사물들의 이미지들은 그 상징적 변형을 위한 자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삼층우주관의 공간적 언어에는 우주적 및 실존론적 차원의 궁극적 의미가 있다.
ㄴ) 신약성서 신화의 시간적 언어
事例硏究 : 파루샤(Parousia)
1) 역사적 정황
파루샤의 개념은 히브리-유대적 배경에서 왔다.주17) 구약의 민중들이 국가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은 출애급이라는 ‘힘있는 행위들’에서 비롯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래에도 하느님의 그러한 구원이 더 있을 것으로 기다렸다. 이 기대가 ‘주님의 날’, ‘훗날’, ‘그 날’ 등으로 묘사되는 것을 구약의 성구들에서 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그 중간시대 동안 이 다채로운 희망언어들은 수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黙示思想과 더불어 하느님의 구원을 행할 메시야라는 인물을 믿는 신앙이 점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어난 메시야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저자들은 메시야를 다윗왕조를 회복할 자라고 말했고(솔로몬의 시, 17-18), 또 어떤 저자들에게는 메시야를 묵시적 ‘人子’,주18)라고 보았으며 메시야를 전혀 인격으로 기대하지 않은 저자들도 있다. 메시야를 정치적, 혹은 윤리적, 혹은 묵시적 사상들로 혼동 혼합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도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하느님의 종말적 개입을 믿는 신앙이다. 신약성서의 신앙은 예수 안에서 메시야가 이미 오셨다고 강조하면서도 또한 그 메시야가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렸다. 이것을 파루샤라고 부른다. 다시 오신다는 이 기대는 구약의 희망을 이어가는 신앙이다.주19)
이제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一見 서로 모순된 것 같은 두 관점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상세히 취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파루샤의 개념을 定義해야 한다. 파류샤(Parousia)는 신약성서 신화 안에 있는 대표적 시간언어이다. 그리고 이 언어는 미래적 이미지들과 관계된다. 그리스도의 再臨, 그의 마지막 심판, 마지막 날, 등...
파루샤라는 단어의 본래적 용법은 古典희랍어나 코이네 희랍에서 일반적으로 '臨在'(presence)를 뜻한다. 그러나 이 뜻이 연장되어 到來'(arrival)나 ‘오심’(coming)의 사상도 포함하게 되었다.(참고: 느 2:6, 삿 10:18, 2막가비 8:12, 3막가비 3:17); H.K McArthur는 말하기를 신약성서에서 파루샤가 24회 나타나는데 그 중에 여섯 군데는 이 단어를 넓은 의미로 쓴다고 했다.주20)(고전 16:17, 고후 7:6-7, 10:10, 빌 1:26, 2:12); 이런 관련에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나타나심 즉 계시를 논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표현하는 문제인데 여기에 희랍어副詞 ouketi 우케티(no longer, 더 이상... 아니다)가 적용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부사 oupw 우포(not yet, 아직은.... 아니다)가 未來的終末論개념에 첨가될 수 있다.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은 그 저자들이 믿는 신앙인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 안에 일어난 하나의 결정적 사건을 쓴다는 것이고 그 사건에 影響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들이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 발견된다.
하느님의 나라(막 1:15, 눅 11:20, 마 12:28), 메시야 待望이 이루어짐(마 11:2-6, 눅 7:18-23),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성령(눅 1:35, 막 1:10),주21), 귀신쫓아냄(막 3:27, 마 12:27), 우주 악령들과의 투쟁으로서의 메시야 십자가 못박힘(고전 2:8, 히 2:14),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기대가 이루어졌다는 요한복음 저자의 강조(요 5:24, 3:16, 등),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 바울사도의 사상(고후 2:15, 4: 3절 이하). 특별히 현재적 구원을 말하는 바울의 성구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 2절), idou nun kairos euprosdektos, idou nun hemera swterias;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과거에 일어났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사건만이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도 기대한다. 이미 시작된 사건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예를 든다.
그리스도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지만(눅 19:18), 사도 바울은 그훗날 알기를 사탄이 아직도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고전 7:5, 고후 2:11, 등). 한 쪽 입장에서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가 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는 아직도 그 싸움이 진행중인 것으로 표현한다. 예수의 가르침도 성격상 대체적으로 종말론적이다.(마 25:14-30, 눅 29:12-27, 마 25:1-11이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를 오실 人子와 동일시한다. 사도 바울의 미래적 구원관, 히브리서, 베드로 전 후서, 유다서 모두가 미래적 완성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요한문서들까지도 심판이 미래의 어느 날 일어날 것을 말한다. 요한문서들은 구원을 현재적 사건으로, 심판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도 말이다.(요6:39, 40, 44, 54, 8:24, 12:48, 13:36, 14:2이하).
위의 진술들을 보면 파루샤에 대한 관점들이 서로 모순된 듯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언어의 구조를 분석해 볼 것이다.
2) 시간언어의 상징적 발전
파루샤와 일반적 時間意識과의 비교
a) 일반적 시간개념 (도표 8)
끝없는 시간 -- 시간연속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전 before --지금 now -- 이후 after
-- 과거 past -- 현재 prsent -- 미래 future
--일찍이 earlier-- -- 훗날 later
b) 종말적 시간개념 (도표 9)
ouketi 우케티 oupw 우포
알파a, 더 이상..아니다(no longer) 아직..아니다(not yet) 오메가w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kairos
chronos chronos
----------> -------
(구약의 희망) (신약의 희망, 기다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작 beginning ----- 지금 now <----------> 종말 the end
파루샤 parousia
c) 파루샤 언어의 상징적 발전 (도표 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表示的 制限的 性質的 (非時間化)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劇的 含蓄的 인간적 차원 궁극적 가치 혹은
초자연적 의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님 오심의 현재적 지켜보라 구원
징조들 구원
(마 24:3) (요 5:24)
갑자기 오심 종말적 성령 주의를 기우려 새로운 창조,
(마13:) 준비하라 영생,
다시 오심의 이루어짐,
약속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대
해와 달이 빛 혹은 그리스도 안에 변함 없으심,
어두워짐 그리스도 안의 居하다, 기쁨
영광
거짖 예언자들 그리스도 안의 진리 영원한 진리
주님의
다시 오심 그의 성육 Incarnation, 마음을 굳게 하여 화해, 사랑,
우주적 변화 십자가 못박힘 그리스도를 믿음 영원한 생명
시간계속 시간 없음 기뻐하라 영원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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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간언어의 상징적 의미
위의 도표들은 파루샤 언어의 형식들이 일반적 시간언어의 형식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파루샤의 상징적 의미는 상징적 변형을 통해 발전된 보편적 언어차원에서 찾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파루샤 언어는 우주적 의미표시와 심리적 및 윤리적 요소들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파루샤 언어가 포함하는 우주적 차원들은 초자연적 사건들, 새로운 창조, 그리고 경고나 권고 등의 인간적, 내적 차원들도 있다. 이 말은 파루샤 언어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받았음을 뜻한다. 이 초기 공도체의 신앙은 성격상 그리스도론 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파루샤 언어의 궁극적 의미는 공간-시간언어를 취급하는 本章 마지막 부분에서 음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루샤 언어의 본질적 성격과 기능은 고찰해야 한다.
첫째로 파루샤 언어는 時間을 否定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형식을 持續으로, 시간으로 표시하는 다른 시간언어와는 다르다.주22) 그 時間否定의 대표적 예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는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主님되심(Lordship)을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이 이 신앙 안에 있을 때 時間界의 變化無雙하고 無常한 운명에서 力動的 意味의 차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먼저 깨닫는 것은 끝없는 시간 연속에 대한 否定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미 깊은 시작이 있고 목표가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적 삶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우리가 지금 구원의 날에 산다고 말은 하지만 현재의 삶이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축복받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크로노스’ 즉 時間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주23) 여기에 언약, 기대, 희망, 주님의 다시오심, 마지작 날, 최후심판, 마라나타(Maran-atha)라는 용어들이 있게 된다. 이 같은 미래적 차원은 우리 인생이 時間界 안에 머물러 있는 실존으로서 불가피한 질문이고 갈망이다.
우리는 超時間的 實在, 즉 永遠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주24) 그리고 육체적이며 逐字的 표현을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언어는 복합된 시간의 理想을 복사하거나 상징하기에는 너무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시간언어에는 부정적 상징요소가 강하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저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느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