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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부 두 분을 모시고 이남장으로 밥먹으러갔어요. 막내 이모님이
항암치료 중이라 코다리 대신 내장 탕으로 의기투합했어요. 85.000원에
고아와 과부 4명이서 배가 불렀으니 이만하면 가치 있는 가성 비입니다.
차 한 잔을 마시러 오는 길에 이모가 34세에 청상이 돼서 70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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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4월생 용띠 다큐멘터리'를 간증 하는데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주며 공감의 시간을 갖었어요. 이모님이 우연히 대장암을 발견
하고도 정말로 리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네요. 꿈에 남편이 보이더니
암 선고를 받았고, 당장 피보험자가 되어 보험료 부담에서 벗어났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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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 치료도 견딜만 했고 머리털도 몸무게도 그대로랍니다.
통장에 몇 천만원이 들어오면서 이것이 웬 떡인가 했답니다.
이모님 말을 종합해보면 생활고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돈뭉치가 떨어져서 차도 새로 뽑고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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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을 누린다고 해요. 과거 둘째 명섭이 눈 돌아갔을 때
'한길 교회' 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줬고 코에서 피가 나오더니
명섭이가 나았다는 것 아닙니까? 할렐루야! 우리 어머니까지 목격
자로 그때의 느낌을 보충 간증해 주었는데 꼭 뭐에 홀린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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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뒤편 카페에 도착해서도 2시간짜리 '이것이 인생이다'가
이어졌어요. 과부생활 40년은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을 지 말해
뭐합니까? 명석이 신 유치료로 시발된 토웃킹어바우트가 어머니
로부터 두 아들이 아파서 굿을 한 얘기까지 옮겨갔어요. Re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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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언제든 당신이 작정하면 눈물을 펑펑 쏟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해도 어머니가 진호를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새끼를 위해 뭐든 하는 것 같아요.
이모가 저랑 열두 살 차이 갑장입니다. 저는 이모의 50년을 모두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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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어요. 4살 때(1967)16살 이모를 처음 보았고 답 십리 뚝 방 촌(벌집)은
'喪中'이었어요.아마도 장례를 치르기 위해 6남매가 모두 모였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나이로 4살, 진호가 젖먹이 입니다. 말이 2살이지 한 돌
지난 피 덩이였을 겁니다. 중랑천 뚝 방길 돌계단을 내려갔고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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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방을 밟자마자 오열을 했어요. 제가 천방지축 나대다가 할아버지
주검으로 철퍼덕 엎어진 기억이 또렷합니다. 무안해서 울긴 했지만
무섭진 않았어요. 그때 막내 삼촌이 14살 중학생이었는데 깡패 형에게
가죽허리끈으로 팬티만 입고 맞는 광경을 보고 큰 삼촌은 무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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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라고 생각했어요. 삼촌은 왜 동생을 그렇게 무식하게 팼을까요?
저는 누나만 둘 있다가 동생이 생겨서 너무 좋았어요. 그렇잖아도
남자는 여자를 지켜야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내 동생 진호는 내가
꼭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다짐을 했어요. 제 행동이 남달랐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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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네 다세대 주택에 살 때 창의 엄마가 저를 골려먹으려고 지나가는
강냉이 장수를 불러 애기(진호)를 줄 테니까 강냉이 10원어치를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강냉이 장수가 능청스럽게 그릇으로 튀밥을
퍼줬고 창의 엄마는 돈 대신 아기를 건네주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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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는 강냉이를 다 내팽겨 쳐버리고 땅바닥에 벌렁 누워 엉엉
울었어요. 그 후로도 몇 번 쯤 골려먹던 창의 엄마는 왜 그랬을까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창의 엄마는 중앙교회 집사님이었고 저를 맨
처음 교회로 데리고 간 고마운 분이었어요. 아들만 세 명(광희, 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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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이었던 창희 엄마는 누구라도 여름성경학교에 다녀오면 강냉이를
주곤 했을 것입니다. 담양에는 대표적인 교회가 '담양 읍 교회'와 '중앙
교회'가 기억이 납니다. 저는 라면 땅 타먹으러 크리스마스 때나 여름
성경학교 때 아주 가끔 읍 교회를 나갔어요. 절친 일도네 패밀리가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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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언 장로, 삼촌 박 금호 목사, 어머니 권사, 성신이 누나피아노 반주,
안신이, 성도, 형도, 이름만 봐도 은혜롭지 않습니까?
칠칠 상회를 하던 일도 어머니께서 제가 교회를 간다고 하면 헌금
50원이나 백 원을 손에 쥐어주셨어요. 서너 번 헌금을 안 내고 까먹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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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도 찜찜해서 예배를 참석하곤 했어요. 오늘날 우리 집에 목사, 장로,
권사까지 다 나왔는데 그 복음의 씨는 남 초등학교 앞 말더듬이 창의
아줌마이었고 교회는 진호보다 제가 먼저 나갔다는 걸 주용이 아빠는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막내 이모 이야기 하다가 옆으로 빠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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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이모는 21살 때 선을 보았고 영암 이모부를 만나러 나갈 때
하얀 고무신을 잘 닦아 놓은 제게 선듯 거금 20원을 줬습니다.
내 생에 첫 용돈이란 걸 받고서 이모는 부자구나 생각을 했어요.
제가 8살 9살 무렵 왕십리 종합상가는 70년대 산업화의 요새로 핫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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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셋째 이모가 섬유제품(옷)공장을 하였고 육남매의 값싼
노동력을 밑천으로 둘째, 막내 이모까지 같은 공장에서 숟가락을 얹고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부터 고1 여름방학까지 10년 동안 방학
때마다 상경을 하였고 외가에서 살았어요. 한 번은 셋째 이모네 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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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면서 그 집 애들(준섭, 창섭,지은)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모가 옆집
아저씨랑 쓰레기 문제로 다퉜어요. 이모부가 구원투수로 나갔는데 그
집 남자에게 한방에 K. O를 당했어요. 저는 공장까지 단박에 달려가
일렀고 막내 이모부가 달려와 싸움을 끝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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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컸던 이모부가 상대 남자 멱살을 쥐고 흔들자 싸움이 싱겁게 끝
났어요. 아마도 셋째 이모가 깡패 오빠를 불러 복수를 다짐했을 것입니다.
이후로 몸값을 톡톡히 받은 것으로 압니다. 셋째 이모는 가난한 큰언니네
자식인 우리들을 절대로 공짜 밥을 먹여주지 않았어요. 둘째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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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까지 식모로 부려먹었고 저도 상전 집 애들 데리고 다니며 열라 종
노릇을 했어요. 어머니는 당신 자식을 어떻게 동생 네에 식모로 맡길 수
있었는지 저는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오늘날까지 셋째
이모네랑은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이유가 된 것 같아요. 그 시절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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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이 비일비재했어요. 셋째 이모는 20대에
기반을 잡고 평생을 알부자로 살았는데 이모가 참 부지런했고 똑똑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맨 손으로 기반을 잡았고 자양
동 아파트는 5,000에 사서50억을 만들었으니 무려 100배가 넘게 올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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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현재 우리나라에 몇십 억대 부자가 30만 밖에 안 된다니 셋째
이모는 대한민국 상위 5%로 반세기를 산 것입니다, 식구들의 눈총 쯤은
아랑 곳 하지 않았고 혼자살기의 진수를 보여준 이모는 지금도 여전히
행복할까요? 딱새 이모 행복해?
2.
70년대에는 정부에서 이것저것 하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혼식 분식, 조기
청소, 산불 조심, 반공방첩 표식 달기, 심지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하질 않나 예방주사에 용의 검사까지 지침이 내려왔고 그것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 북한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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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제가 70-80년대에 했던 일들을 거의 답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동네 대중교통 3005번이 5,900원에 수유 동을 간다는 것을 아시나요?
1시간 쯤 걸린 것 같습니다.오전이라 아직 문들을 열지 않은 상가들이 대부분
입니다. ‘삼양 극장 살던 시절’이 떠올랐고 순대 국 한 그릇 사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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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위치를 물어봤는데 젊은 이모가 친절하게 잘도 가르쳐줍니다.
신일학교 앞 육교도, 건너 "노바 양복점"도 재다 없어졌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소원 약국’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동네를 알 것 같은 꼰대에게
삼양 극장자리가 어디냐고 묻자, 빌라로 바뀌었다면서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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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사람들은 왜 다들 친절한 것이여? 극장이 있었던 그 위치에서 사진을
한 방 찍고, 제가 거주했던 막내 이모네 집을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40년
기억이라서 가물가물합니다. 저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 외가에 맡겨졌는데
셋째 이모가 살았던 왕십리는 여름기억이, 그리고 삼양 동은 겨울의 추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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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입니다. 그때는 길거리에 호떡집이 많았고 극장에도 유명한 가수들이
리사이틀을 많이 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저는 방학 때마다 오긴 했어도
3-4년쯤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딱지 치러 왔던 그 계단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정겨워서 올라가봤는데 노숙자 양반이 있네요. 막내 이모는 양말봉재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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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잘 나갔습니다. 외삼촌들이 별 볼일 없어서 할머니가 혼자서 사셨는데
많이 무섭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막내 이모네 집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이모네는 우리 큰 누나가 있어서 가끔 호떡도 사주고 백 원을
주기도 했으니까요. 봉재공장에는 누나들이 열 명쯤 있었고 중간에 꼭 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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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떡 볶기 같은 간식을 먹기 때문에 저는 삼양 시장까지 가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지금 보니 삼양 시장은 없어져버렸고 대형마트가 있습니다.
70-80년대 섬유산업을 일으킨 일등공신이 가리 봉 동이나 가내 공업
들이었습니다. 물론 일부몰지각한 사람들이 공순이라고 놀리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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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기계가 서거나 하면 큰 삼촌이 오기도 해서 이래저래 저만 수지
맞는 날입니다. 7,8년 후 제가 입대를 했고 첫 휴가를 맞을 무렵엔 저희
어머니께서도 아예 서울로 이사를 오셨는데 제가 왼쪽 팔의 문신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기자, 어머닌 막내 삼촌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고 제 팔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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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제거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요새 같으면 레이저 한 방이면 간단한
것을 그땐 살을 일일이 메스로 절개를 한 후 꿰맸습니다. 제가 ‘형님’으로
산 세월이 얼만데 제 몸이 깨끗한 것은 그때 고생을 한 탓입니다.
그때 내가 수술한 병원이 그대로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은 여러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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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었을 것입니다. 병원이 있는 상가에 들어 가봤더니 떡볶이 집이 있습니다.
가판에 (구)삼양시장이라고 쓰여 있는 문구 때문에 들어가서 떡 복기를 주문
했습니다. 늙은 이모는 아마도 그때는 새댁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40년 전
얘기를 꺼내자 노가다 하던 사내들이 복개 천을 한지도, 시장 없어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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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훨씬 넘었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열심히 합니다. 나오면서
봤는데 낡은 전기 박스가 헝클어 있는 것이 아마도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40년 동안 다 봤을 것입니다. 어머니 팔순 때 막 네 이모가 입원을 해서
참석을 못했는데 이번 추석에는 꼭 좀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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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장남 석훈 이는 삼양 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팔순 때 몇 살이냐고 물어
봤더니 41살이랍니다. 아니, 벌써 네가 불혹이라고? 저 나이 먹는 줄은 모르고
놀라서 미안합니다. ‘응쌍팔’에서 선보였던 도봉-방학-창 동-쌍문-수유-미아-
대지극장까지 20-2번 길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대지극장로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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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동쪽으로 개발이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미아에서 택시를 탔는데 미아리
고개에서 정체입니다. 샛길로 빠져 돈암 동 성신여대 길로 나오다가 전에 개척
교회 하던 ‘이강미술학원’이 있나하고서 고개를 열심히 고생시켰는데 못
찾겠습니다. 거리가 한참 남았고 만 요금이 벌써 6000입니다. 전철로 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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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욕하지 마시라. 1구간 기본요금이 1350원, 20년 전보다 1000원
올랐습니다. 동묘에 사람들이 그 닥 많지 않았는데 저는 이곳에 오면 일단
마음이 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 15년 다녔다고 알아봐주는 상인
들이 있습니다. 커피 마시고 밥 먹고 눈꽃 빙수에 얼마만의 소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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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소비는 돈이
없어지는 것 빼고 내 돈을 주면서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질리지 않고 매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3.
20-2번이 다녔던 안방학동에 70년 후반 첫 발을 딛었고 이후 군 입대
전후까지 살다가 제대 후에 당구장을 했던 곳입니다. 응쌍팔에 언급될 때
몹시 반가웠는데 오늘 택시 몰고 왔습니다. 제일 먼저 구 태평양 패션을
지나 원 약국 앞까지 한 번에 찾아왔을 때 30년을 버텨준 약국이 제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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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극으로 건드립니다. 당구장은 없어져버렸고 ‘도깨비 시장’은 제대로
된 시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조카 준이 녀석이 태어난 곳이고
진호랑 아버지 빼고 모두가 기억하는 곳입니다. 이때 마이클잭슨의 ‘빌리진‘
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였을 때인데 저는 이 동네 아이들과 미아리 동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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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라인 볼을 치다가보니 당구장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준석이랑 우진이 녀석은 뭣들하고 사는지 궁금합니다. 부동산 하던 의중이
녀석은 돈 많이 벌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아 방학 초등학교 뒷길로 달리는
데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 이런가 합니다. 기억에 방학 초등학교 뒤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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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주 묘가 있는 곳까지 전에는 구릉지였고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서울에 이런 시골이 있나 할 정도로 1급수가 흘렀고 호랑나비에 고추잠자리
그리고 파랑색 버들치가 관상용처럼 헤엄치던 저 푸른 초원이었습니다.
저는 촌놈 티내느라고 목욕을 못해봤는데 아이들이 간혹 멱을 감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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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도 기억이 납니다. 신접살림을 차린 막내 이모가 나랑 띠 동갑이던
석훈이(42)를 이곳에서 낳았으니 무조건 40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연산 군 묘는 못가보고 사진 몇장으로 정의 공주 묘를 돌아봤습니다.
정의 공주는 드라마 세종에서 잠깐 본 것 같은데 크게 인상적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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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습니다. 본관은 전주이고 세종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소현 왕후 심 씨
입니다. 5대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제7대 세조의 누나가 됩니다.
햇살이 너무 좋아 차 세워두고 등산가는 저 세월 좋은 사람들 따라가고
싶은데 입금을 채워야하니 여기서 그만 돌아가야겠습니다.
2021.11.15.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