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을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의 삶을 묘사합니다. 현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미래적으로는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 희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까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에 빠져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못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하물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9~10절을 보겠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본문을 교리적 메시지로 읽으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교회 내의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포용적 메시지로 읽는 현대 신학자들은,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애쓰는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한 것으로 읽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와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은총과 생명을 대비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12~14절을 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죄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죄의 기원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시작되어 그 결과로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죄론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해석될 수 있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부모가 바르게 살면 자식도 바르게 살게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부모가 막 살면 자식의 인생 역시 비틀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울의 논리는 그런 세상의 이치를 설명한 것일 수 있다고 로마서를 포용적인 의미로 읽는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를 강해할 때 창세기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신화의 기록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기록을 사실의 기록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바울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도, 성서의 기록자도, 그 시대의 아들이며,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화의 시대를 넘어 과학과 합리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신화시대의 기록을 절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한국 교회에는 그런 기초적인 이치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습니다. 개신교의 본향인 서구 세계에서는 이미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로마서에 대한 이런 열린 해석, 포용적인 해석이 아직도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거의 선포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18~21절을 보겠습니다.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20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로 사람을 지배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가 인류를 사로잡았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은총이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이 본문 역시 교회 안에만 적용되는 배타적인 메시지로 읽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하늘을 우러러 흠 없이 살고자 애쓰는 모든 의인들에게 적용되는 포용적인 메시지로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