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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6장 1-24절
1 자녀(子女)들아 너희 부모(父母)를 주(主) 안에서 순종(順從)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恭敬)하라 이것이 약속(約束) 있는 첫계명(誡命)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長壽)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子女)를 노(怒)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主)의 교양(敎養)과 훈계(訓戒)로 양육(養育)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誠實)한 마음으로 육체(肉體)의 상전(上典)에게 순종(順從)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者)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行)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主)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8 이는 각(各) 사람이 무슨 선(善)을 행(行)하든지 종이나 자유(自由)하는 자(者)나 주(主)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上典)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恐喝)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上典)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外貌)로 사람을 취(取)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10 종말(終末)로 너희가 주(主)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能力)으로 강건(强健)하여지고
11 마귀(魔鬼)의 궤계(詭計)를 능(能)히 대적(對敵)하기 위(爲)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肉)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權勢)와 이 어두움의 세상(世上) 주관(主管)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惡)의 영(靈)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취(取)하라 이는 악(惡)한 날에 너희가 능(能)히 대적(對敵)하고 모든 일을 행(行)한 후(後)에 서기 위(爲)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眞理)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義)의 흉배(胸背)를 붙이고
15 평안(平安)의 복음(福音)의 예비(豫備)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防牌)를 가지고 이로써 능(能)히 악(惡)한 자(者)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消滅)하고
17 구원(救援)의 투구(投球)와 성령(聖靈)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聖靈) 안에서 기도(祈禱)하고 이를 위(爲)하여 깨어 구(求)하기를 항상(恒常) 힘쓰며 여러 성도(聖徒)를 위(爲)하여 구(求)하고
19 또 나를 위(爲)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福音)의 비밀(秘密)을 담대(膽大)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爲)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使臣)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膽大)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나의 사정(私情)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兄弟)요 주(主) 안에서 진실(眞實)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2 우리 사정(私情)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慰勞)하게 하기 위(爲)하여 내가 특별(特別)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平安)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兄弟)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변(變)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者)에게 은혜(恩惠)가 있을지어다
에베소서 6장 주석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1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자녀들아. 사도는 남편과 아내에 관한 주제에서 자녀에 관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참조 골 3:20).
주 안에서. 이 구절은 “부모”보다는 “순종하라”를 수식하기에, 자녀가 영적인 범위 안에서 필요충족보다는 원칙 때문에 순종해야 함을 확인시킨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솟아나는 순종을 하라는 것으로(참조 1:1 주석), 인간의 명령,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게 내리는 명령에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할 수도 있다. 부모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행 5:29). 부모는 자녀를 도덕적으로 오도(誤導)한 데 책임을 져야만 한다. 부모는 자녀의 양심의 각성을 존중해야만 하며, 그래야만 자녀가 “주 안에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순종하라.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에게 취할 관계를 표현한 “복종하라”는 말(5:22)보다 더 강한것으로, 다른 종류의 관계를 가리킨다. 성경 전반에 걸쳐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가장 큰 악에 속한 것으로 취급된다(참조 롬 1:30; 딤후 3:2). 자녀의 순종은 합당하고 옳은 것이다. 태어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의 아기가 가장 무력하기에, 여러 해 동안 부모의 친절과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자녀의 순종 없이 규율 바른 가정생활이 있을 수 없는데, 이는 아이에게는 어떤 경우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는 하나님에게도 분명히 불순종할 것이라는 사실인데, 이는 그 아이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훈육과 근신을 전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순종”이라는 단어가 일부 현대인의 귀에는 달갑게 들리지 않겠지만, 분개하며 순종을 “통제”로 여기는 자들은 최근 청소년 범죄가 급증한 데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만 한다.
옳으니라. 혹은 “지당하니라.” 이것은 순종을 해야 하는 주요 이유로 주어진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천연계의 순리에 순종이 어울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순종을 명령하시고, 부모에게는 순종받을 권리가 있으며, 순종은 자녀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골 3:20에서 순종은 “주 안에서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인간관계는 천연계와 마찬가지로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정당하게 요구한다면 부모에게 순종함이 옳다는 사실은 부모의 통제가 부족한 가정들의 역사를 통해 역으로 입증된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2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공경하라. 참조 출 20:12 주석. 여기서 말하는 공경은 생각으로만 하는 존경이 아니고 실제적인 순종이다. 이 원칙에 관한 하나님의 해설이 마 15:4~8에 기록돼 있다. 공경은 결과적으로 순종을 낳는 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마땅히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이렇게 공경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존경하는 정도에서 부모 중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이 공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공경에는 청년이 장년에게 보이는 작은 배려, 부모의 말과 판단에 대한 확신, 가문과 청렴에 대한 충절이 포함된다.
첫 계명.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기도 하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십계명 중에서 특별히 약속이 주어진 첫 계명이며, 그런 점에서 아주 독특한 계명이다. 둘째 계명에 주어진 약속(출 20:6)은 전반적으로 모든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해당하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축복이 약속돼 있다.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3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한 약속입니다.
네가 잘 되고. 비록 바울이 축어적(逐語的)으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신 5:16에 기록된 다섯째 계명이 이 진술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울 때 더 행복해지며, 자녀와 부모 모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울 때 더 행복해진다.
장수. 다섯째 계명에는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적용됨이 분명하다. 여기서 바울은 그 약속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것으로 언급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행 17:25) 장수 역시 축복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인생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도 있다.
순종으로 이뤄진 건전한 가정생활이 사회와 국가의 복지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온건과 근면과 자제 그리고 육체적 및 영적 건강을 증진하는 다른 모든 덕성을 의미한다. 바울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선포할 뿐 아니라 천연의 법칙을 언급하고 있다. 생명을 단축시키는 악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4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아비들아. 이 용어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포함하는 통칭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훈육에 대한 일차 책임은 대개 아버지에게 지워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따라야 할 권면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방임하는 편이라면 아버지는 엄격해지기 쉽다.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에게 요구하는 순종을 도덕적인 기초 위에 세우려 한다면 이 하지 말라는 권면은 필수이다. 골로새서에 나오는 평행 구절에는 이 권면에 대한 이유를 “[그들이]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고 제시한다. 현재 부모의 권위가 그토록 쇠퇴한 것은 때때로 부모가 자녀, 특히 원치 않았던 자녀에게 부당하고, 짜증나고, 모질기까지 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너무도 자주 자녀는 가정의 “평화를 저해하는 자”, 즉 골칫거리로 간주된다. 자녀가 분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일부 부모가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해 외적인 순종을 얻어낼지 모르지만, 그것은 공경과 존경을 희생하여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의. 자녀를 주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려면 부모가 주는 “교양과 훈계”는 주님에게서 얻어야 하며 그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며,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가장 진지한 책임이다.
교양. 헬라어 파이데이아(paideia), “훈육”, “교훈”, “징계함.” 파이데이아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주의 징계하심”을 묘사하기 위해 히 12:5~11에 사용된다. 고전 11:32와 고후 6:9에 나오는 동사 파이듀오(paideuo-)의 용례와 비교하라. 주님의 징계함과 교훈과 훈육이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듯이(계 3:19), 부모의 징계함과 교훈과 훈육도 그래야 한다.
훈계. 헬라어 누쎄시아(nouthesia), “생각나게 하다.” 이 단어는 말로 하는 훈계 형태의 교훈이나 훈육을 의미한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 누쎄시아가 나오는 곳은 고전 10:11과 딛 3:10뿐이다. 동계어 동사인 누쎄테오(nou-theteo-)는 롬 15:14; 골 1:28; 살후 3:15 등에 나온다. 교육제도에는 어떤 목적이든지 모두 경고를 위한 여지가 있다. 훈계는 아이가 바른 길을 갈 때는 격려가 되고, 그릇된 길을 갈 때는 경고가 된다.
일부 교육자들은 아이가 스스로 신앙의 개념과 확신을 형성하도록 놔둬야 하는데, 이는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라고 신중하게 주장했다. 이런 논의는 불합리한데, 이는 아이가 일종의 종교적 관념 없이 자란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나 보호자가 자녀를 진리로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들에게 오류를 가르칠 것이다. 이 문제에는 중립이란 없다.
양육하라. 헬라어 엑트레포(ektrepho-, 참조 5:29 주석).
설교보다 더 큰 능력(골 3:20,21)―부모들이여, 하나님이 그대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대들의 가정을 하늘에 있는 가정의 표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잘 보호하라. 그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하라.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은 사랑의 황금 사슬로 연결되어야 한다. 잘 정돈되고 잘 훈련된 한 가정은 세상에 있는 모든 설교보다 기독교의 능력을 나타내는 데에 더욱 큰 힘이 있다. 자녀들이 부모들을 어떻게 모방하는 가를 실제로 깨달으면 부모들은 모든 말과 행동을 삼가할 것이다(원고 31, 1901).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5 종이신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같이, 육신의 주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종들아. 헬라어 둘로이(douloi), “노예들”, “종들”(참조 롬 1:1 주석). 이 표현은 바울이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로마 세계 전역에 존재했던 노예제도와 노역에 관한 권면을 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다(참조 고전 7:21, 22; 골 3:22~25; 딤전 6:1, 2; 몬 1장; 벧전 2:18~25). 노예제도는 고대에 이교도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존재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 부자연스러운 풍습을 특별히 정죄하지는 않았지만, 구약과 신약 모두에는 때가 되면 근절될 것이라는 원칙이 선언돼 있다(참조 신 14:26; 고전 7:20~24; 몬 1장 주석).
두려워하고 떨며. 이것은 주의와 열성을 많이 기울이라는 의미로 바울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구절이다(참조 고전 2:3; 고후 7:15; 빌 2:12).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책임을 맡을 때 사용된 것으로, 본 절에서는 상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배려를 해야 하는 종의 책임을 가리킨다. 종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법률상 주인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임무에 대해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성실(Singleness). 헬라어 하플로테스(haplote-s, 참조 롬 12:8 주석). 상전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때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중성”(doubleness)이란 겉으로는 기쁘게 하려는 것 같지만 가능하면 언제든지 올바른 봉사를 회피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종은 자신의 노역이 부당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구실을 들어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이 적절하다고 합리화하려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옳은 것이기에 바르게 행하는 것은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원칙이다.
육체의. 골 3:22에도 나타나는 이 구절은 상전에게 육신적으로 노예됨과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충성함을 구분한다. 인간의 노예제도는 몸을 구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은 결코 예속시키지 못한다. 바울은 말하자면 여기서 육체의 봉사는 요구할 수 있지만 정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인간의 노예제도의 한계를 밝힌 것이다.
순종하기를. 상전과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따름으로써 제국 안에 있던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 노예는 상전인 상류 계급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엄청난 수의 노예들은 나름대로 사회 전반에 힘을 발휘할 선교 단체를 형성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노예와 주인이 진정한 형제가 됨으로 사회적, 종교적 혁명이 진행됐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하듯. 종은 상전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했다.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6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과 같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눈가림. 이곳 말고 이 단어가 이렇게 번역된 곳은 골 3:22뿐이다. 종이 상전에게 눈가림, 말하자면 고용주나 상전이 지켜볼 때만 일하고 싶은 유혹을 특별히 받기 쉽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 일하면 일꾼의 품성은 타락한다. 그래서 충성하고 정직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이다(참조 대하 16:9).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와는 반대됨(참조 갈 1:10; 살전 2:3, 4). 육신의 상전은 사실 그대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가림으로도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심령의 동기를 놓치지 않고 보는 분을 위해 일하고 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아첨과 속임수 같은 수단을 자주 이용하면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자존심 있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종들. 혹은 “그리스도의 노예들”(참조 롬 1:1 주석).
하나님의 뜻.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마음을 다하여” 행한다면(참조 골 3:23), 가장 비천한 일도 고귀하게 여기게 된다.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7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단 마음. 이 단어는 “성실한 마음”보다 질적으로 훨씬 나은 봉사를 의미할 수 있다. 상전의 복리와 사업에 진정으로 관심을 쏟는 종은 이미 의무의 짐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신분에 근접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주의 사업에 부름받은 종은 “주께 속한 자유자”이다(참조 고전 7:22 주석).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이 새겨진 이런 원칙들로 인해 노예제도는 결국 소멸됐으며, 소멸 전까지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구원을 누렸다. 부여받은 단 마음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그 어떤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
주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확신은 자신의 노력이 하나님에게 가납됨을 아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생애로 이끄는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된다. 순교자는 이런 확신 가운데 화형을 당하고, 노예도 그 확신 때문에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끈기 있게 참았다. 그러나 순교자의 용기와 노예의 인내로 핍박자와 상전의 부당 행위가 고쳐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당 행위에 대해 하나님에게 답변해야만 한다.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8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저마다 주께로부터 상급을 받게 됨을 여러분은 알아 두십시오.
각 사람이…행하든지. 상급을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은 종의 “단 마음”과 헌신의 결과이다. 부정어로 표현된 동일한 진리에 관해서는 골 3:25을 참조하라.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이 구절을 고전 12:13; 갈 3:28; 골 3:11과 비교하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고(행 10:34) 그분의 판단은 편파적이지 않기(시 98:9)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 없이 누구에게든 내린다. 하지만 종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천국의 상급을 하나님에게 받는다는 견해일 것이다.
받을 줄을. 마 25:21과 비교하라. 성경에는 상급에 관한 약속들이 많다(마 5:12; 16:27; 눅 6:35; 롬 2:6~10; 히 10:35; 계 22:12 등).
앎이니라. 종은 자신의 생애와 행위를 하나님이 굽어 보시며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받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위대한 영적 확신은 모든 신자의 유산이다.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9 주인이신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 그들을 위협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요,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과 주께서는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 두십시오.
상전들. 회심한 자로서 자기의 신령한 지식의 분량대로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이 있는 노예 주인이 존재했다고 여기에서 분명히 지적한다. 빌레몬이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참조 몬 1장 주석). 상전의 의무로 화제를 돌린 바울은 그들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종의 경우처럼 때가 되면 노예제도라는 악습이 사라질 것이라는 원칙을 진술한다(참조 신 14:26 주석).
이와 같이 하고. 이것은 바울식 황금률이다. 바울이 종에게 상전에 대해 품으라고 권면한 것과 동일한 정신을 상전도 종에 대해 품어야 한다. 어떤 상전도 바울의 조언이 종들에게 반역을 권유한 것이라고 불평하지 못했다. 사도는 종에게 하나님의 눈이 굽어보고 있음을 알고 양심적이고도 충성되게 행동하라고 하면서, 상전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의 권익이 상전의 마음속에 우선순위가 될 것이며, 종을 올바로 대우함으로 상전은 하나님도 섬기게 될 것이다(참조 골 4:1 주석). 바울이 주로 노예제도를 다루고 있을지라도, 그가 말한 내용 모두를 현대 사회의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갈을 그치라. 종의 처우에 관하여 특별한 지침이 히브리인에게 주어졌지만(레 25:39~43; 신 15:12~14; 렘 34:14), 인간관계에 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많은 것이 기대됐다. 복음의 길은 사랑의 방식인 반면에 공갈은 공포와 완력을 의미한다. 공갈은 대개 무자비함의 시초이기 때문에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권력과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어느 지도자에게나 굉장한 도전거리이다. 이는 지도자가 단지 봉사받기만 바라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경고와 훈계를 할 때 자제력과 그리스도인의 자애를 발휘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은 회심한 생애의 첫 증거 중 하나이다.
저희와 너희의 상전.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종과 상전 모두 한 상전에게 충성할 의무를 지고 있다. 이 사실은 상전이 종을 다룰 때 영향을 끼칠 것인데, 이는 어떤 불의든 벌을 받게 될 것이고 동일한 주인을 모시는 모두는 동료 종들이기 때문이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 헬라어 프로소폴렙시아(proso-pole-psia). 문자적으로 “얼굴을 취함”(참조 롬 2:11 주석; 골 3:25). 하나님은 외형이나 계급이나 지위에 영향받지 않으실 것이다.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0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종말로. “그 밖에는” 혹은 “그 밖에 관해서는”(참조 빌 3:1; 4:8; 살후 3:1). 바울은 서신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연합에 대한 신학적, 영적 기초를 언급했고,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이 연합을 실제적으로 성취하는 것에 관한 지침을 주었다. 이제 그는 그런 언명(言明)의 실천 가능성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이런 덕성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주 안에서. 이 주요 구절은 본 서신에 여러 형태로 약 30회 등장한다(참조 1:1 주석). 여기에 승리하는 비결이 있다. 그분 안에 거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하면 실패한다(요 15:4~7). 그분의 은혜는 우리에게 족하다(고후 12:9).
능력. 바울은 교회를 압도하기 위해 집결하는 거대한 악의 군대를 묘사하려고 한다. 교회가 믿음으로 전능자의 자원과 연합하지 않는다면 싸움은 원수의 편이 모든 면에서 유리하여 승산이 전혀 없을 것이다.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1 악마의 간계를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마귀.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 참조 4:27 주석). 우리의 싸움이 단지 사람과만 하는 것이라면 전신 갑주가 그다지 필요치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귀의 궤계와 교활함에 맞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해 마귀가 쓰는 방법이 교묘하여 언제나 사람의 최대 약점에 집중된다는 것이 드러났다(마 4:1~11; 참조 고후 2:11; 엡 2:2; 4:27; 벧전 2:11; 5:8). 속임수보다 공개적인 적의를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여느 방법으로 무장해도 그리스도인 용사를 쓰러뜨릴 교묘한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의 갑주가 고안된 것이다.
궤계. 헬라어 메쏘데이아이(methodeiai), “술책”, “속임수.”
능히. 우리는 하나님의 갑주 없이는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전신 갑주. 헬라어 파노플리아(panoplia), “완전 무장.” 이곳 말고 이 단어가 신약에서 사용된 곳은 13절과 눅 11:22뿐이다. 바울의 사상과 병렬을 이루는 곳은 사 59:16, 17이다. 이사야의 말씀이 바울의 비유적 표현의 출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바울이 여러 해 동안 로마군에게 묶여 있음으로 로마군의 갑주에 대해 숙지했기에 이런 표현을 썼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갑주가 하나님에게 속한 이유는 그분이 장비의 각 부분을 제공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엡 6:14~17). 우리는 갑주를 입고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도록 요청받는다. 갑주를 만드신 분이 그 효능을 보증한다.
입으라. 바울은 자주 “입으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롬 13:12, 14; 고전 15:53, 54; 고후 5:3; 갈 3:27; 골 3:10; 살전 5:8). 여기에 나온 개념은 신자를 위한 보호용 갑주를 입으라는 것이다.
완전 무장은 필수적인 것―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가오는 큰 사열을 대비하여 완전 무장을 하고 서 있기를 바라신다(원고 63, 1908).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혈과 육. 참조 히 2:14; 마 16:17; 고전 15:50; 갈 1:16.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가운데 원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닌데, 이는 교회가 언제나 악인들에게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악한 간계에서는 물론 지능에서도 사람을 능가하는 영과 권세, 즉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를 향한 공개적인 반역의 대오에 정렬한 사탄의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싸움에는 특정 지역이나 지상의 관심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우주를 포함하는 우주적인 의의가 담겨 있다.
정사…권세. 롬 8:38; 엡 1:21 주석을 참조하고, 엡 3:10; 골 2:15와 비교하라.
이…세상 주관자들.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본문상의 증거는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라는 독법을 증명한다. 롬 8:38 주석을 참조하라. 분명히 바울은 개별적인 악한 영들, 즉 세상에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요 12:31; 14:30; 16:11에서 사탄을 묘사한 “이 세상 임금”이라는 구절과 비교하라. 마귀의 실재성은 계시자에게도 분명했다(계 2:10; 12:10).
하늘에 있는. 참조 1:3 주석. 이 구절의 생략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를 언급할 수 있다.
악의 영들. 더 정확하게는 “악의 영적 군대[“부대” 혹은 “세력”].”
보이지 않는 권세들과 싸움(고후 11:14; 계 12:17 주해 참조)―(6:10-18 인용)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고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는 두 세력이 있다. 이 양편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늘 천사들의 감화를 받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흑암의 권세들의 교묘한 공작들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대리자들과 조화를 이루기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행하여야 한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에게는 아무 틈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계속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원수가 우리를 정복할 것이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되었다 할지라도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해서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는 열렬한 기도의 필요가 없어진 것이 아니며, 기도가 응답되도록 부지런히 그분과 협력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고 하는 그의 도구를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신다(원고 95, 1903).
정사와 권세를 향한 싸움―(겔 28:17; 계 12:7-9) (시 17; 단 10:13; 고후 2:11; 갈 5:17; 계 16:13-16 주해 참조)―인간이 악한 천사들의 숫자를 알 수 있다면, 그들의 계략과 활동을 알 수 있다면 교만과 경박한 언동이 휠씬 적을 것이다. 사탄은 마귀들의 왕이다. 그가 다스리는 악한 천사들은 그의 명령을 행한다. 그들을 통하여 사탄은 온 세상에 그의 대리자들의 수를 늘려 나간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을 배후에서 교사한다.
어둠의 정사와 권세가 숫자도 많고 활동도 지속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용기가 꺾이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과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시험을 피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고문하기 위하여 일개 군대를 파견하는 사탄은 인간의 지혜나 힘만 가지고는 퇴치할 수가 없다.
주께서 사탄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사탄은 진리에 서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는 한 때 아름답고 광명한 빛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대하여, “네가 아름다우므로 네 마음이 교만하였다”고 하셨다.
사탄은 다른 천사들을 교사하여 반역하게 하고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서 추방당한 후에 그는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악을 행하기 위하여 악의 세력들을 한데 규합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을 자극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쫓겨난 후에 하나님의 작품들을 해침으로써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심어놓은 반역의 표준 둘레에는 각 시대의 악한 일꾼들이 진치고 있다. 악한 천사들은 악한 사람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항하여 전쟁을 하고 있다.
사탄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에다 그의 품성을 재현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창조되자 마자 곧 사탄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살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야 하는 곳에 그의 인을 찍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다 선망과 증오와 야망을 주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 흑암의 왕국을 세운 자요, 그 왕국의 지도자요, 왕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기를 원하였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어두움 가운데서 부정과 속임수로 일을 해 내려오면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 왔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다 그의 보좌를 세워놓고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할 경배를 그가 가로챈다(원고 33, 1911).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히 1:14)―만일 우리에게 거룩한 천사들의 봉사가 없다면 우리가 어떤 위치에 버려져 있을지를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대를 만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 일하고 있는 악한 천사들과 함께 하는 흑암의 권세자들의 왕이다. 우리는 모두 다 “우리의 싸움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는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자는 누구며 어둠의 왕의 깃발 아래 서도록 택함을 받은 자는 누구인가? 거의 온 세상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온 세상은 흑암의 왕을 그들의 지도자로 택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깃발 아래에 서자마자 곧 그들은 악한 천사들과 연합하였다. 악한 천사가 마음을 지배하든지 하나님의 천사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지배하에 맡기든지 흑암의 권세 아래 맡기든지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 대군 미가엘의 피묻은 깃발 아래에 있는가? 아니면 흑암의 권세의 검은 깃발 아래에 있는가?
우리는 영혼의 원수를 저항하기 위하여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흑암의 권세를 대항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그 싸움을 인간의 충동이나 그의 능력에 맡겨두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준비되어 있다. 만약 인간을 제 홀로 버려두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원고 1, 1890).
경계 근무 중인 신실한 파수꾼들(시 34:7)―선한 천사도 있고 악한 천사도 있다. 사탄은 속이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항상 대기하고 있다. 그는 사람을 미혹하여 불순종의 넓은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매혹적인 것을 다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그릇된 감정으로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께서 정로를 가리켜 보이시려고 설치해 놓으신 길 표지판에 그의 거짓 표식을 설치함으로써 지계표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다. 하늘의 천사들이 임명되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고, 구원얻을 후사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다스리는 것은 이들 악의 대리자들이 모든 빛줄기를 가리워서 영혼들을 어둡게 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사람도 타고난 악의 성향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죄를 깨닫게 할 때 악을 행하던 사람은 회개하고, 자복하며, 죄를 버려야 한다. 충실한 파수꾼들이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키고 있다(원고 8, 1900).
계속 교전 상태에 있는 천사들―만약 휘장이 걷히고 각 사람이, 사탄의 매혹적인 간계로부터 땅의 거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부주의한 태도로 인해서 사탄의 전략에 말려들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의 가족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면 그들은 자만심이나 자기 과시의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늘의 군대가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승리를 쟁취하려고 사탄의 대리자들과 계속 교전중임을 볼 것이다(원고 32, 1900).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러므로. 즉 12절에 묘사된 싸움의 특성 때문에.
전신 갑주. 참조 11절 주석. 절반만 무장한 군인은 경솔함의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잘못된 안전의식을 지니고 나가기에, 적군은 무장되지 않은 부분을 분명히 찾아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부분에서 취약하며, 종종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대 강점으로 여긴 특성이 유혹을 받을 때 최대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슬이 가장 약한 고리 때문에 강하지 못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의 가장 약한 품성 때문에 강하지 못하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다양한 적군과 여러 가지 육에 속한 약점을 고려한다면, 완전 무장 외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취하라.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사용 가능하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입으라고 권유받는다. 군대가 전장에 나아가기 전에 완전히 준비해야만 하듯이, 그리스도인도 마귀와 싸움을 치르기 전에 모든 영적인 방어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패배할 것이다.
악한 날. 이것을 교회가 악의 군대와 치르는 마지막 대쟁투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정관사가 사용된 것(「제임스왕역」에는 “the evil day”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은 이 개념을 지지한다. 더 일반화시켜 “악한 날”이라는 용어를 전투가 특히 치열한 날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이것은 전투를 준비할 목적으로 모든 일을 다 행한 것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그리스도인이 전투하는 동안 자신의 최선을 다한 것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에게 받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특권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갑주와 능력 없이는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지만,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 없이도 승리할 수 없다(참조 산상보훈, 142).
서기 위함이라.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확신 가운데 안심할 수 있다.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오.
그런즉 서서. 전신 갑주의 각 부분이 기록된 순서는 로마군이 갑옷을 입는 순서일 것이며, 따라서 개념상 논리적으로 연결성이 있다. 이 은유는 지금까지 기록된 가장 심오한 글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진리. 즉 추상적인 진리. 이는 헬라어 본문에 관사가 없는 것을 통해 암시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개인의 정직을 넘어서는 것으로, 심령에 거하여 적용되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고전 5:8; 고후 7:14; 11:10; 빌 1:18과 앞서 본 서신의 5:9에 나오는 이 단어의 유사한 어감과 비교하라. 예수의 질책이 바리새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의 위선 때문이었다(마 23장). 진리와 고결함, 즉 지적이고 도덕적인 면이 종교 영역에서 우세하지 못하다면 어디에서 우세하겠는가?띠고. 허리에 차는 띠는 군인의 동작을 방해할 수도 있는 군복을 하나로 묶어 준다.
의.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를 두르는 그리스도의 의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고, 원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충성에 적용하는 이들도 있다. 둘 다 성공적인 전쟁에 요긴하기에, 바울은 양자 모두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의의 정의에 관해서는 롬 1:17 주석을 참조하라.
흉배. 사 59:17; 살전 5:8과 비교하라. 흉배가 군인의 심장을 감싸듯이, 의는 신자의 생명을 보존하고 신령한 생애의 “중추 기관들”을 보호한다.
의의 흉배―우리는 모두 다 전신갑주를 입고 서 있어야 한다. 주는 우리를 그의 군병들로 택함으로써 우리를 높히신다. 그분을 위해서 용감하게 싸우고, 모든 거래 관계에서 의롭게 행하자. 영혼의 싸움에는 모든 일에 정직한 것이 필수적이다. 그대가 자신의 성향을 누르고 이기려고 애쓸 때 성령께서 그대를 도우시사 모든 행동을 용의주도하게 하실 것이며, 그대로 하여금 원수에게 진리를 헐뜯을 기회를 주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힘으로 의를 보호하는 그대의 흉배를 붙이라. 그것을 착용하는 것은 큰 특권이다. 이것이 그대의 영적 생명을 지켜줄 것이다(청년 지도자 1901. 9. 12).
우리를 보호하려고 가까이 서 있는 천사들―우리가 하늘의 무장을 하고 있으면 원수의 공격이 우리를 이길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실 것이다(리뷰 1905. 5. 25).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5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평안의 복음. 사 52:7과 롬 10:15에서 “발”과 “평안의 복음” 선포가 밀접히 연결돼 있는데, 그것은 활동 곧 복된 소식의 기별을 전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전투에서 취할 불굴의 정신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한 복음은 선포해야 할 복음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진지를 구축한 복음이다.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전사가 평화롭고 굳게 설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고무적인 사상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롬 5:1). 특별히 복음은 사람이 죽을 필요가 없다는 복된 소식이기에, 잔인한 원수와 대치 중인 전사에게는 반가운 말이다. 그는 복음의 핵심이자 평안의 요인, 곧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위에 굳게 서 있다.
예비한 것. 혹은 “준비.” 바울의 비유에서 샌들은 전사가 달려가기보다는 굳게 서 있도록 해 주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묘사는 사 52:7의 묘사와는 평행하지 않다.
신을 신고. 로마 군인의 다리는 정강이 받이로, 발은 샌들로 덮여 있었다. 샌들은 거친 땅에서 하는 동작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했다. 공격에 견디려면, 확실한 발판이 있어야만 했다.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더 정확하게는 “모든 것에 더하여.”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는 이것과 “모든 것 가운데”라는 독법으로 엇갈리게 나타난다.
믿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 믿음은 화전(火箭)을 막기 위해 올리는 방패처럼 능동적이지만,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기도 하다. 어떠한 유혹의 영향을 받더라도 확신을 회복해 싸움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더욱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방패. 로마군의 방패는 가죽을 씌운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목제 방패였다. 그것은 세로 약 120센티미터, 가로 76센티미터였고, 몸을 충분히 가릴 만큼 컸다.
악한 자. 악한 사람 혹은 공격하는 군대의 수장인 악한 자 마귀.
화전. 고대의 화살은 때로 화살촉에 삼과 역청 같은 가연성 물질을 발라 화살촉을 점화시킴으로 무엇에 꽂히든 불이 붙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는 불 같은 유혹에 어울리는 영상(映像)이다. 불 같은 유혹은 공포, 낙담, 초조, 불결한 생각, 질투, 분노 혹은 그 외 다른 악의 형태를 띨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높이 들린 방패처럼 그 유혹들을 막아서 불꽃을 사르고 아무 해 없이 땅에 떨어지게 한다.
소멸하고. 믿음은 유혹의 화살을 가로막아 영혼 속에서 죄가 되지 못하도록 한다. 유혹과 원수의 모든 공격이 신령한 몸의 취약한 부분에 다다르기 전에 맞서야 한다.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구원. 살전 5:8에서는 투구가 구원의 소망이라고 불린다.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관련된다(참조 롬 8:24 주석).
투구. 머리는 의지와 지성이 자리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성령의 검. 갑주의 다른 부분들은 방어용인데 반해, 이것은 방어와 공격 겸용이다.
말씀. 헬라어 레마(rhe-ma). 발언되고 말해진 것을 가리킴(참조 5:26 주석).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절을 당시에 존재했던 성경 말씀에 국한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에 신약은 제작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역경을 헤치며 낸 길은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든 것이다.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8 온갖 기도와 간구로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또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며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모든 기도와 간구. 기도와 간구라는 두 단어는 빌 4:6; 딤전 2:1; 5:5에서도 함께 나타난다. 빌 4:6에서는 간구와 함께 감사도 기도에 첨가된다. 감사와 중보는 효과적인 기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이다.
무시로…기도하고. 문자적으로 “어느 때나 기도하고” 혹은 “모든 경우에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권고와 비교하라. 기도는 또 하나의 무기가 아니라, 전신 갑주를 입고 싸움을 싸우는 정신, 즉 태도이다. 바울은 여기서 기도를 부단한 마음의 상태, 하나님과 교통을 지속하는 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참조 눅 18:1; 빌 4:6; 히 4:16).
성령 안에서. 참조 롬 8:26, 27 주석. 우리의 의도가 최선이더라도,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주 어설픈 판단력과 숨겨진 편견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낸다. 뒤를 돌아보아 성령이 기도를 교정해 주신 것, 말하자면 기도의 의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 형태로 기도를 그분에게 올리신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기도 중 일부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판명됐던 적이 얼마나 흔하며, 우리가 구한 것을 결코 받지 않은 것으로 인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가!
깨어. 참조 마 24:42 주석; 마 26:41.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기도에 힘쓰는 목적은 마치 보채는 아이가 내켜 하지 않는 부모에게서 원하는 것을 결국 얻어내는 것처럼 고집을 부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에 힘쓴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간구자를 위해 하실 수 없는 일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기회를 드리는 간구자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참조 눅 18:1~8 주석).
여러 성도를 위하여. 문자적으로 “모든 성도에 관해서.” 성도는 기도와 교제로 서로 후원해야 한다. 우리는 성도가 공통으로 겪는 고난을 함께 나누고 기도로 그들을 후원하지 않는다면(참조 벧전 5:9), “그리스도 안에”(참조 1:1 주석) 있기란 불가능하다. 아마도 로마에 수감된 고령의 사도는 곧이어 부탁하려는 요청을 생각하면서 성도의 교통이 더 한층 긴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엡 6:19).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19 그리고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잇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문자적으로 “나에 관하여.” 영웅적인 전사가 자신의 필요에 대해 감동적으로 언급한 이 말에는 겸손히 다른 사람에게 이해와 후원을 구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 중보기도가 필요했으며 자주 그 필요성을 표현했다(롬 15:30; 고후 1:11; 빌 1:19; 골 4:3 등).
말씀. 헬라어 로고스(logos). 문자적으로 “말씀”, “기별”(참조 마 10:19, 20; 요 1:1; 고전 12:8).
주사.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은사에 의존했다(참조 고전 12:8 주석).
입을 벌려…담대히. 참조 3:12 주석. 예수는 “입을 열어” 큰 권세로 그분의 나라의 원칙들을 선포하셨기에(마 5:2), 바울도 유사한 능력을 원했던 것이다. 그의 기별이 조롱받기도 하고 적대시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했다.
비밀. 이 표현은 본 서신에 여섯 번째로 등장한 것이 된다(1:9; 3:3, 4, 9; 5:32; 참조 1:9 주석). 바울은 한때 이방인에게 감춰졌지만 이제는 계시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참조 딤전 3:16).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0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이 일을 위하여. “이 일에 관하여.”
쇠사슬에 매인. 틀림없이 이것은 죄수의 오른쪽 손목을 군인의 왼쪽 손목에 사슬로 묶는 관습을 가리킬 것이다. 어떤 조건 하에 죄수는 감옥 밖에 있는 숙소에 거하도록 허용되기도 했다. 베드로가 두 군병 사이에서 잘 때 그 두 명과 함께 묶여 있었음이 분명하며(행 12:6), 바울에 관해서도 유사한 장면이 기록돼 있다(행 21:33).
사신이 된. 헬라어 프레스뷰오(presbeuo-, 참조 고후 5:20 주석).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조 19절 주석.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1 사랑하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내가 지내는 형편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알릴 것입니다.
나의 사정. 바울은 본 서신의 독자들이 자신의 수감 생활에 관해 더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추측한다(참조 골 4:7).
일꾼.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 “사환”, “종”, “집사.”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서는 집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참조 엡 3:7; 막 9:35 주석).
두기고. 그는 행 20:4; 골 4:7; 딤후 4:12; 딛 3:12에도 거론돼 있다. 그는 로마의 아시아 도(道) 출신으로(행 20:4), 에베소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도는 그를 크게 신임하여 최후 순간까지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으로 보인다. 그들 사이에 깊은 애정이 꽃폈음이 분명하며, 두기고는 숙명적이면서도 영광스러운 바울 생애의 마지막 기간 내내 “진실한 일꾼”이었다. 두 번째 수감 기간에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에 다시 보냈다(딤후 4:12).
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2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또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고 나는 그를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우리 사정.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고, 여기서는 로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포함시켜 이야기한다.
위로.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의 복리에 관해 얼마나 염려하는지 알았기에,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어떻게 기쁘게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서 지나친 불안감을 덜어주기를 원했다.
보내었노라. 참조 에베소서의 서론; 골 4:8 주석.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아버지 하나님…그리스도. 참조 엡 1:2 주석; 딤후 1:2; 딛 1:4.
평안. 이 축도를 보면 사도가 시작 기도에서 사용한 말이 떠오르게 된다(참조 1:2 주석).
믿음을 겸한 사랑. 이것은 믿음과 연합된 가장 넓은 의미의 사랑으로서, 믿음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이르러 온다. 믿음을 겸한 사랑을 심령에 부어 주는 분은 성령이시다(롬 5:5).
형제들. 즉 “그리스도의 몸”(엡 4:12) 안으로 함께 들어온 신자 공동체.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변함없이. 문자적으로 “썩지 아니함”(참조 고전 15:42). 이 마지막 말에서 바울은 영원한 실재로 주의를 이끈다.
은혜. 바울의 독특한 서명(참조 고후 13:14; 갈 6:18 등).
아멘. 본문상의 증거(참조 20쪽)는 이 말의 생략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말은 기자와 독자의 정서와 조화된다.
24절 뒤에 나오는 추신(“두기고가 로마에서 기록하여 에베소인들에게 보냄”이라는 추신-역자 주)은 초기 필사본에 나오지 않으며, 본래 영감받은 기록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