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조선에의해서 지워진 고려의 흔적은 등봉이 아닌 하북성 천진 일대에 있었다.(후기)
이지역은 대륙에서 어느 지나 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적이 없는곳 입니다.
이전에 어느 재야학자께서 하남성 공의가 고려의 개성이라고 주장하신 적이 있지만 주변지명 그리고 <유개경록>에 기록된 여러 산명 및 지리를 볼때 이곳이 開城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드는곳입니다.
황하 아래로 낙수가 흐르고 숭산(五嶽의 하나로 河南省 登封縣 북쪽에 있으며 中嶽 또는 嵩高라고도 함)이 있으며좌우로 숭산이 잇는데 우측 지맥을 중악이라하며 한국발음으로 숭산이지만 지나발음으로는 송산입니다.
중악의 산자락아래에 中岳廟 라 이름지워져 있는 성채가 보이는데 설명으로는 宋나라시대의 건축물이라 하나 좌측 산자락에 관성대(천문대)가 존재합니다.
왕경내에 역법,천지운행을 보고 왕조의 길흉과 모든 정사에 도움이되는 일들을 바로 왕궁에 첩보하는것이 천문대의 주임무로 그 비중은 막중한데 송아라의 수도가 開封으로 알려져있는데 직선 거리로 128 킬로미터로 천문관측 결과를 송왕실에 바로 보고하는데는 너무 먼거리이며 이웃한 洛陽은 한때 당나라의 수도였기도 한데 직선거리로 60킬로미터로 이곳 또한 즉보 체제에 있어서 그 왕조의 궐지 또는 왕궁지라고 보기 어렵다.직선거리도 멀지만 주 도시와의 중간에는 산으로 되어있어 실제거리는 3-4배가될것으로 보기때문이다.
중악묘로 바뀐 유적의 크기는 대략 가로 140미터 세로 660미터 정도로 측정되었으니 실제 초기에는 그 정도의 크기에서 후기에는 무려 3중성 구조로 발전되었던것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동북으로 하북성 개주(복양시) 또한 그리 멀지않다 그곳이 개성이라면 옛 기주 지역에서 발흥했다는 고려는 冀州(하북) 인지 祁州 (하남)인지 불분명해지나 두지역 모두 산동을 컨트롤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崧山이란 지명에 中岳이란 지명이 서로 합하여져 松岳이란 지명이 만들어졌을수도 있겠다는 개인적 생각이다.현재의 숭산은 대륙 5대절경 지역으로 바위에 소나무로 뒤덮힐만큼 소나무가 많다. 이지역이라야만 거란이 남하하여 고려와 대치한 지역이 가까와 한때 개경이 거란에의해 함락당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만큼 산서남부,섬서성 동부에서 내려온 거란의 세력과 대치한 대진국 역시 하남동남 潢水에서 거란과 대치한적이 있다.
건물들은 명나라시기에 중건또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위해 개축되었을것이라 추정합니다. 전돌양식으로 명나라 양식으로 판단이 됩니다.
<송악>으로 비정되는 지리 기록과 군사지도와 위성사진을 비교해서 보기로 합니다.
을축(乙丑)일 이른 아침에 방교수(房敎授)를 붙들고 연경궁(延慶宮)의 구지를 찾으니 곧 고려 태조 즉위한 2년에 창건한 것이다.북으로 숭산(嵩山)을 의거하고 남으로 용수산을 끼고 낙하(洛河)가 그 동쪽으로 돌고 벽란(碧瀾)이 그 서쪽으로 쏟아지니 참으로 천부(天府)라 하겠다.
세상이 전하기를,“맨 처음에 술사의 설(說)에 혹하여 지맥(地脈)을 끊으려 하지 않은 까닭으로 산세를 따라 벌집[蜂房]처럼 되었다.”고 하는데, 난간과 서까래를 아로 새기고 경요(瓊瑤)로 결구(結構)한 것은 모두 벌써 땅속에 묻혀 버리고 다만 두어 마장 주위에 무너진 계단과 부스러진 섬돌이 위아래로 종횡해 있는 것만이 보이며, 만여 그루의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싸늘한 구름이 나돌고 가시덩굴과 우거진 풀은 이미 여우 토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말에서 내려 운제(雲梯)를 더위잡고 올라가니 마치 봉새가 목을 움츠리고 날아가려고 하는 것 같은 곳은 건덕전(乾德殿) 유기(遺基)이다. 면세(面勢)가 통창하고 넓어서 정히 그 땅과 상치하니 세상이 만월대(滿月臺)라 칭한다.동편은 동지(東池)였는데, 지금은 논이 되었다......
<유송도록>에서 인용

등봉시 모습

▲ 윗 위성 사진은 하남성 등봉의 송악과 지형

▲ 위 한반도 개성의 지형(에는 동남에 임진강이 있다)과 서로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북방을 막고있는 초소산 (북부水庫)은 현재 지명 ...

지나식으로 재건축 한것으로 보인다.

준극전의 모습

1064년 북송에서 조성했다는 사대철인상 ..천여년 동안 야외에서 녹도 슬지 않았다...?

대전

준극전

천중각

준극전

관성대
운영자 심제
첫댓글 해주의 숭산에 관해 찾아보면서 해주가 혹시 개봉근처에 있다가 하북으로 이동한게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그럼 자연적으로 개경이 원래는 심제님이 찾은곳 근처에 있다가 제가 찾은 하간의 동쪽으로 이동한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개경의 원래 지명인 부소갑에서 부소라는 지명을 찾다가 요사에서 부소가 바로 진나라태자이며 그가 머문곳에 부소라는 지명이 남았음을 알수있었습니다. 그는 만리장성을 쌓다가 동생에게 살해되었죠 그러니 진나라 만리장성이 끝나는 부분근처에 아마 부소라는 지명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 봅니다. 요사에도 영정하 근처에 부소라는 지명이 남아있더군요 진나라장성이 요동까지 쌓았다고 하니
요사에는 영정하일대가 원래 요동인데 요서군으로 바뀌었다고 자세히 적어놓았더군요 아마도 진나라장성의 끝나는 부분역시 영정하중류일대가 아닌가 합니다. 한나라가 다시 더연장하여 영정하하류가깝게 쌓아서 거란지리도처럼 장성이 길게 나있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부소라는 지명은 하간의 동쪽에서 하간의 서부일대에 널리 퍼졌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니 개경의 위치를 포괄적으로 파악한다면 하간의 서부일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요사와 송사 원사에 따르면 개경의 위치는 아무래도 하남으로 보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주가 만일 이동했다면 원래 개경의 위치는 하남이었다가 하북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겠지요
고려 태조 왕건의묘가 사천성 성도에 있습니다.친절하게도 관광안내원이 설명을 해줍니다.물론 왕건을 좋지못하게 설명합니다.고려의 수도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입니다.
스크랩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