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년 강희제의 세번째 원정 당시의 여건들을 살펴 보자면, 대승을 거둔 직후라는 점을 생각했을때 생각보다 그리 좋은 편은 되지 못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부대들은 여전히 식량 보급의 어려움이 시달렸고, 말들은 지쳤으며, 수레는 다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가르단은, 비록 가축은 매우 적었지만, 안간힘을 써가며 5천명 이상을 또다시 모으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옹긴으로 나아갔고, 여기서 하미로 진격하거나, 아니면 티베트로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양구는 가르단을 막기 위해 국경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가르단은 내부 분열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조카 단지라와 향후 계획을 의논했고, 본인은 하미로 진격하기를 원했으나 단지라는 알타이로 가자고 했습니다. 러시아인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약탈하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가르단이 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긴 하나, 실상 가르단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2천여명의 병력이 갈라져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려고 떠났고, 가르단은 1천여명이 좀 넘는 처량한 병력에, 천막, 피복, 식량의 부족에 시달렸씁니다.
가르단도, 가르단의 부하들도, 자신들이 가야할 목적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빼면 말입니다.
가르단은 사막을 정처없이 배회했고, 말도 극소수만 남았을뿐 소와 양도 떨어졌습니다. 많은 부하들이 이 외로운 늑대를 버리고 체왕 랍탄에게 동조하거나,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강희는 체왕 랍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단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르단을 인간세계에 남겨둘 수 없다. 그가 그대의 영지로 흘러 들어오거나 하미로 달아나면, 그대는 그를 잡아 참수하고 그 머리를 내게 보여라. 그것이 그대의 충성을 증명할 것이다."
또 자신을 속인 가짜 달라이 라마 ─ 제파 샹게 가초에게도 경고했습니다. 강희는 가짜 달라이 라마인 제파 대신, 판첸 라마(Panchen Lama)가 티베트 인들의 신앙을 통치하게 하고, 티베트에 있는것으로 알려진 가르단의 딸과 함께 제파는 베이징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가르단이 티베트로 보낸 서신이 청나라 관리에게 압수당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편지에서 가르단은 전투의 손실을 보고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티베트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사원에서 경을 읊어준다면, 내가 곤경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0월이 14일 되었고, 강희는 다시 한번 원정의 개시를 알렸습니다. 이번 원정의 '테마' 는 오르도스로 나서는 '사냥 원정' 이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가르단에 재앙적인 타격을 날리고, 동시에 전몽골에 청나라의 강인함과 부유함을 과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강희는 매우 느긋한 속도로 움직였고, 양 10만 마리가 뒤를 따랐습니다. 산시도어사 저우스황은 원정을 단념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루한 가르단은 이미 절망적인 곤경에 처하였으니, 곧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다시금 사막으로 가시지 않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닝샤의 총병관 왕화싱은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황제가 좋아하는 사냥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강희는 거절했습니다.
"가르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사냥하는것은 사소한 일이고 가르단을 사로잡는것은 긴급한 일이다. 사냥 계획을 취소하고 말들을 쉬게 한 다음 가르단을 사냥하는 것이 어떤가?"
실상을 보자면 가르단에 대한 원정 자체가 사냥이었으니, 그보다 자잘한 사냥들은 이 사냥꾼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양떼 ─ 양 7만 마리, 소 1만 6천 마리 ─ 가 있는 대행령은 몽골인들의 정신을 뺴놓기 충분했습니다. 황제는 피양구의 지친 부대와 만났고, 그들의 용기와 끈기를 칭찬하면서 휴식을 취하도록했습니다.
이제 강희에게 있어 가장 단순한 전략은, 가르단이 고립된 곳에서 굶어죽는것을 바라보며 편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르단의 조카 단지라가 곡식을 얻으려 옹긴을 습격했지만, 심각하게 약화된 그들은 패배를 맛보았을 뿐입니다. 매일매일 가르단은 약화되고 있었고, 기다리고만 있어도 승리는 자명해보였지만, 황제는 진격하고 싶어했습니다. 하미까지, 그것이 안된다면 최소한 닝샤까지. 피앙구는 부대가 너무 지쳤다는 이유로 파견했는데, 그때 가르단이 보낸 사절, 겔레이구잉이 항복 조건을 상의하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피양구는 이것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겔레이구잉을 잡아서 돌려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만났고, 고두를 한 겔레이구잉은 준가르가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사죄한다고 맹세했습니다.
"우리 준가르는 무지했습니다. 우리는 할하의 부와 여자들을 탐했고, 하늘의 뜻이 공정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입니다. 이제 많은 준가르인들이 항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군주는 할하족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강희는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은 옳다. 그대는 외국인이지만, 실로 이치를 이해하고 있다. 가르단은 무지하다. 그는 나의 은총을 거절했다. 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항복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따른다면 준가르 귀족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겔레이구잉은 가르단의 편지를 강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부처는 인간이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통일한 모든 위대한 칸들은 저희처럼 달라이 라마의 삼보(三寶)를 숭배합니다. 이는 알탄 칸 이래 할하의 일곱 기가 달라이 라마의 후원자가 된 이유입니다. 구시 노문 칸 이래, 우리 올로드 네 부는 항상 달라이 라마의 후원자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따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젭종단바 쿠툭투나 자삭투 칸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의 대표를 존경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엄청난 분란을 야기했습니다. 나의 명분은 정당하지만, 나는 황제의 은혜에 굴복하려 합니다.
나의 명분은 정당하지만, 나는 황제의 은혜에 굴복하려 한다. 가르단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것을 알고 있었고, 항복해야한다는것도 알고 있었으나, 이 말에서 보여지듯, 자신이 죄를 저질렀고 잘못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신들과 부하들은 가르단에게 엄청난 압박을 넣었습니다. 항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단은 그들의 압력을 누르기 위해 항복 제안을 강희에게 보냈으나, 실상은 백성들은 진정시키며 겨울을 보내고, 코코노르의 왕공들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수단에 가까웠습니다. 어찌되었건 강희는 항복을 받아들인다고 말하였으며, 기다렸습니다. 이 말에 다다두후라는 인물이 군의 보급이 다 떨어져가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을 하자, 강희는 그를 곧바로 처형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것이 죄목이었지만, 진짜 죄목은 가르단의 사절 앞에서 보급의 어려운 형편을 실토한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가르단의 상황이 훨씬 심각하기는 했지만, 겨울 내내 오르도스에서 대군을 지탱할 순 없었습니다. 날씨는 춰어지고, 강희는 사랑하는 아들을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겔레이구잉이 떠나자 강희는 회군의 뜻을 밝혔고, 청나라 군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3차 원정에서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가르단은 코코노르나 티베트로 달아나지 못했고 수천의 준가르인들이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저 불굴의 적수를 남겨두고, 베이징에서 호화로운 음식이나 먹으며 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가르단의 항복 제안 따위를 전혀 믿지 않은 것입니다. 돌아오자마자, 강희는 다시 4차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정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형편없이 약해진 가르단을 사소한 도적 쯤으로 여겼고, 적당한 부하 장교를 보내면 토벌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강희는 이상할 정도로 가르단에 대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수십만의 대군이 격돌하며 제국을 멸망의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그 오삼계의 난에까지 비유헀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하미의 벡(伯克)이, 가르단의 14살 짜리 아들, 셉텡 발주르를 잡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제 가르단은 후계자까지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강희는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했지만, 가르단은 자신의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강희는 이것은 하늘이 청에게 준 선물이며, 이제 오륙백의 병력밖에 남지 않을 가르단에게 '강력한 군사적 실체' 를 보여준다면, 그 병사들은 모두 가르단을 버릴 것이라며 자신의 원정을 합리화했습니다.
가르단은 닝샤에서 1,600km 떨어진 알타이 산맥에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세력은 너무나도 약해졌고, 청군은 지나친 대부대를 편성하는 대신 부대를 가볍게 유지하여 빠른 속도로 진군 할 수 있었습니다. 적은 병력들이 빠르게 진격했고, 여러차례의 원정으로 가야 할 길과 필요한 준비들도 이미 능숙해졌습니다.
3월 26일. 황제는 사로잡힌 가르단의 아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건장한 체격을 한 14살의 소년은 슬프고 놀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에서, 엄청난 역사적 거인의 앞에 끌려나오는 가혹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강희는 냉엄하게 물었습니다.
"너의 아비가 항복할것 같은가?"
소년은, 공포에 질렸지만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강희는 그 아들을 작고 못난 인간 정도로 간주했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교사 제르비용은 소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움 속에서도, 잘 견뎌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은 베이징으로 보내졌습니다. 아버지를 사로잡으면 부자를 같이 처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미의 벡이 가르단의 아들을 보낸것은 또다른 호재를 보였는데, 그 하미의 벡이 체왕 랍탄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본래 체왕 랍탄은 하미의 벡에게 가르단의 아들을 인계받아 가르단과의 분쟁에서 가장 커다란 무기로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체왕 랍탄 대신 청나라에게 그 아들을 바치자, 분개한 체왕 랍탄이 쳐들어올까 두려움에 빠진 하미의 벡은 청나라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청 제국의 통치권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동북의 끝에서 일어난 만주족 정권이, 이제 튀르크계 오아시스를 자신의 지배 영역으로 포함시킨 것입니다. 몽골 제국 시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코코노르는 제국의 통치권 아래를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외방 오랑캐'들의 항복이었습니다.
제아무리 강희라고 해도, 티베트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는, 전몽골을 진동시킬 행위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파 샹게 가초는 그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두려움에 빠져, 가르단과의 모든 협조를 부인하고 황제를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동일시 여겼고, 황제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에 크게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문' 인 가르단의 딸이 청나라로 소환되지 못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가공할 권위에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제파는 위대한 달라이 라마 5세가 1682년에 죽었고, 임종 전에 환생을 이야기 하면서, 후계자가 모든 준비가 될 때까지 이를 비밀로 하게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달라이 라마 후보는 15세이고, 다음 해 말에 공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비밀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왕 랍탄이 그 후보가 누군지 알고 있음으 들어났고, 강희는 제파의 기만 행위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며 전몽골에 달라이 라마의 사망과 그 뒤에 이어진 사기극의 실체를 고발해버렸습니다. 이는 청나라에 이익이었습니다. 가르단은 자신이 달라이 라마의 명령으로, 그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했는데, 그 명령은 달라이 라마가 아닌 권력을 찬탈한 섭정의 손에 이루어진것이 아닌가?
결국 제파는 모든 저항을 그만두고 가르단에 대한 다른 지지를 전부 철회하면서 엎드렸습니다. 강희는 섭정의 죄를 용서하고 몽골족간의 평화를 중재하는 모습을 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티베트, 코코노르, 체왕 랍탄을 모두 일시적으로 항복시킨 후, 그는 자신의 본래 목적에 나섰습니다.
'인간 사냥' 의 길이었습니다. 적수인 몽골적은 이제 형편없이 약해졌고, 본래부터 유목민족이라기 보다는 능숙한 '수렵 민족' 인 만주족은, 이제 준가르 몽골족을 사냥감 정도로 여기며 추격을 개시했습니다. 4월 17일에 이르면, 강희는 베이징에서 51일 떨어진 닝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닝샤의 낙타
닝샤는 관개 시절이 괜찮았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운 것이었습니다. 강희는 지방의 엘리트들에게 백성들이 부담을 지지 않는 선에게 군대를 지원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 가운데 대활약한것은 어성룡(於成龍)이었습니다. 그는 알타이 산맥까지의 식량 보급 계획을 세웠고, 황허 강을 따라 3천석을 실어 나르고, 낙타와 짐수레로 운반하며 1천 2백여리 떨어진 곳까지 운반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그는 강희와 피양구가 가르단을 격파한 2차 원정에서도 악전고투를 벌였습니다. 피양구등은 보급 부족에 시달렸지만, 어성룡의 보급 노력이 아니었다면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한나라 초기의 위대한 명재상 소하(蕭何)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난 후, 한 청나라 장수는 단지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우리가 아니다. 바로 곡물 수송 총책 어성룡이다."
이 말에 단지라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떨구었다고 합니다.
강희는 닝샤에서 머물면서 대규모 수송 작업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최전방에서 사막을 활보하던 사령관이 보급관으로 역할을 바꾼 결과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일의 능률을 떠나서 강희는 이것을 못 견뎌했고, 아들에게 자신이 은과 곡식을 보급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불평을 투덜거렸습니다. 이때에도 그는 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보냈지만, 그때부터 무언가 이상해졌습니다. 이때의 편지부터 아들의 냉담함에 대해 무언가 의심해가는 태도를 비운 강희의 모습이 나왔던 것입니다.
강희는 이렇게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그가 닝샤에 도착한 직후 여러 보고서가 올라왔고, 이는 가르단 내부의 파멸적인 의견 불일치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가르단이 천막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단지라와 또다른 지도자 우르잔자브가 가르단에게 비난을 퍼부어댔던 것입니다.
"그대는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데 실패했다! 우리는 끝까지 그대를 따랐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항복하느냐, 혹은 죽느냐. 길은 두 갈래다."
그러자 가르단을 아직까지도 편드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욕했습니다.
"번영을 누릴때에는 칸을 찬양하더니, 역경에 처하자 칸을 버리는것인가?"
이렇게 파멸적인 대화가 오고간끝에, 단지라는 청나라의 사절을 자신의 천막 안으로 초청했습니다.
"황제가 나에게 은총을 베푼다면, 나는 항복하겠소."
이제 가르단은 오직 3백여명만 주위에 남았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비쩍 마른 말 한마리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강희는 가르단이 이제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있다고 보았습니다.
곧 피난민들이 또다른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가르단의 진영 가까운 곳에서 대포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르단이 더 서북쪽, 알타이 산맥으로 들어갔다고 전했습니다. 소식을 들으면, 가르단이 단지라와 결별, 이제 고작 백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97년 4월 4일. 카라우스 호와, 홉도 사이에 있는, 아차 암타타이에서.
가르단은 의문으로 둘러쌓인 마지막, 그의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숙적이 사망할 무렵, 강희는 귀환을 준비했고, 45일이 지난 6월 2일. 그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피양구는 단지라의 사절들에게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르단이 어느날 아침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피양구는 화를 내며 이를 왜 더 빨리 전하지 않았느냐고 말했고, 단지라 쪽 사람들은 말들과 사람들이 너무 지쳐 움직일 수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들에 말에 따르면, 가르단은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준가르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신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강희는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르단이 병으로 죽었거나, 자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고, 이는 완전한 독살 ─ 타살로 여겼습니다. 강희는 자신의 견해를 아들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피양구와 면담한 이후 모든 발표에서는 가르단의 자살설로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그렇게 끈질기고, 투쟁일 계속한 가르단이 자살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그는 열렬한 불교의 신자였고, 그는 자살을 선뜻 선택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가르단이 뇌졸중 등으로 급사했을것이라고 여깁니다. 혹은 천연두로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가르단 내부의 무서운 무견 불일치등을 보면, 가르단이 독살당했다고 해도 이상할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황제의 권위에 거스른 가르단이 두려움에 빠져 자살했다고 여기는 편이 더 편리한 법입니다.
이러한 이치로, 강희의 편지등을 제외한 청실록등의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황제가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가르단의 자살을 예견했으며, 결국 가르단이 자살하여 벌을 받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나, 그 방대함으로 2차 가공이 불가피하게 어려워진 친정평정방략(親征平定朔漠方略)등의 기록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어찌되었건, 강희는 결국 목적을 이루고 7월, 4일 위풍당당하게 귀환했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에서는 차하르 몽골의 반란을 물리치고,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정복하고, 러시아인들의 조공을 받고, 이제 몽골의 위협을 완전히 없앴다면서 "자고로 어떤 황제도 이와 비견할 수 없다." 며 강희를 칭송했습니다. 가르단이 이제 '완벽한 패배자'가 되자, 역으로 청나라 관료들은 가르단을 이전처럼 별볼일없는 부랑자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슬림 오아시스, 부하라, 투루판, 카자흐를 포함한 서부 1천 2백여개 도시를 함락하고, 할하 기의 수많은 병력을 패퇴시킨 대단한 군사적 천재로 추켜세웠습니다. 그런 천재를 격파한 셈이니, 강희의 위신이 더 올라갈것은 자명했습니다.
이제 판결이 뒤를 이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거의 모든 관료들과 죄수들은 사면을 받았고. 가르단과 접촉이 있던 고위 라마 한명은 처형되었지만, 관련 있는 200여명이 넘는 라마들은 모두 용서를 받았습니다. 항복한 준가르 족은 차하르 몽골의 기로 편입되었습니다. 가르단의 진영에 가담한 무슬림들은 사형되었습니다. 어성룡은 승급되었고, 피양구는 1등 공작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관용적인 처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르단 본인은 예외였습니다. 가르단은 이제 죽었고, '인간 세계' 에서 그는 완전히 퇴장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그리고 강희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르단의 시신마저 ─ 오삼계와 마찬가지로 ─ 모조리 태우고, 시신을 베이징의 형장에 전시한 후, 뼈를 갈아 길거리에 뿌리기를 원했습니다. 머리를 성벽에 걸어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그 후에 할하 49기에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리하여 가르단의 영혼이라는 '오염 물질'을, '인간 세상' 이 아닌 '모든 세계' 에서 완전히 없애기를 원했습니다. 가르단의 아들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가르단은 이미 몸이 타 사라졌지만, 단지라는 그의 머리와 재를 간직했습니다. 가르단과 대립한 단지라는 이제 가르단의 유해를 티베트로 가져와 ─ 그 영혼의 관장자이자 안식처였던 ─ 달라이 라마에게 넘겨주고자 했습니다. 단지라는 체왕 랍탄에게 자혀고, 체왕 랍탄은 가르단의 유해를 넘겨받았습니다. 청나라 사절은 그 유해를 넘겨주고, 체왕 랍탄이 가지고 있는 가르단의 다른 가족들도 인계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그 재가 도착하면 가르단의 아들 셉텡 발주르와 함께 처형하고자 말입니다.
하지만, 가르단과 원수 중의 원수였던 체왕 랍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에겐,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몽골의 관습을 설명하며, 가르단의 가족에게 자신은 '어떠한 적의'도 가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르단은 죽었고, 그의 아이들은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가르단의 재를 강이나 들판 ─ 몽골인들의 고향에 뿌릴 생각이었습니다.
청나라 사절은 "반란자의 가족은 모두 죽이고, 시신은 받아내야 하며, 모두 완전히 없애야 한다." 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체왕 랍탄이 가르단의 유해를 넘기기로 거부한다면, 그를 조공 관계에 반하는 제국의 적으로 여길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체왕 랍탄은 심한 질책을 받자 유해를 넘기는데에는 동의하였지만, 가르단의 가족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가르단의 부하들도 가만히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들이 서쪽의 카자흐 족을 치는데 힘이 될것입니다.
강희는 이때쯤 되자 분노가 상당히 누그러졌습니다. 그는 가르단의 부하들이 남는것은 허락했고, 대신 가족들은 베이징으로 보내도록 요청했습니다. 체왕 랍탄은 그들을 보냈습니다.
1698년. 가을. 만주족, 몽골족, 한족들은 가르단의 뼈가 바스라져 바람에 뿌려지는것을 보기 위해 베이징의 연병장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가르단의 아들은 사면 받았고, 황제의 호위대에서 1등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내까지 얻었으며, 1701년 가르단의 딸이 도착하자 같이 살 수 있었습니다.
준가르 몽골측에서 보자면, 가르단은 가족이었습니다. 가르단과 대립한 체왕 랍탄의 입장에서도 말입니다. 그들은 대립했지만, 이는 가족의 일입니다. 가르단이 '상징적' 으로라도 지속될 수 있다면, 준가르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나라 황제의 입장에서는 가족으로서 가르단의 역할을 박탈하고, 그를 일종의 범죄자로 취급하며 뼈를 부수고 의례를 통해 인간세계, 물질 세계에서 모조리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가르단 외에 그의 나머지 추종자에게는 가족의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마지못해 따랐다' 는 원칙이 최고 지도자급을 제외한 거의 모두에게 적용되고, 대부분은 사악한 가르단에게 속은 순진한 사람들로 간주되어 용서를 받았고, 심지어 가르단의 최고 부장들도 사면받고 급기야 관직까지 하사받았습니다. 가르단의 아내와 아이들도 용서 받았습니다. 가르단의 몸과 영혼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없어져 잠재적인 오염 가능성마저 모두 제거되자, 역설적으로 그와 관련된 나머지 사람들 모두는 정화되어 다시 인간 세계로 편입될 수 있다는 식입니다.
강희는 분명 가르단의 준가르를 굴복시켰고, 마침내 그를 제거했으며, 최종적으로 그의 존재를 지워버렸습니다. 할하 몽골은 청제국의 판도에 포함되었고, 이는 영토적인 면에서 엄청난 진일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준가르의 끝은 아닙니다.
첫댓글 의외로 강희제가 잔혹하네 라고 생각할 무렵.. 역시 다들 용서하는군요. 그나저나 같은 유목민족출신이라 그 두려움을 잘 알아서 이렇게 집요하게 없앤 걸까요.
워낙 스피드가 빨라 잡기 힘드니 불과 몇만명이나 심지어는 몇천명이라고해도 수억을 거느린 황제의 필생의 호적수군화.진짜 대단.근데 유목기마에 너무 특화해서 오늘날에는 별볼일 없는 존재.저거와 똑같다가 나중에 정식국가로 트랜스폼한 터키가 대단
오스만 투르크는 오히려 청이랑 매치하셔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