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를 뒤흔든 거대 전쟁의 시작
612년 1월 수나라 113만 3,800명의 군대는 고구려에 대한 총 공격을 감행했다. 수나라 원정군에게 군량미를 수송하는 자들은 그에 두 배나 되었다. 수양제가 이끄는 6군을 포함해 30군은 탁군(북경 지역)에서 출발하는 것만 무려 40일이나 걸렸다. 각 군(軍)은 서로 40리 간격을 유지하며 출발했는데, 이들의 행렬이 무려 1040리(416㎞)에 걸쳐 있었다. 20세기 이전까지 세계 역사상 보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수나라 대군이 출동하자 주변 국가들도 긴장했다. 돌궐은 수나라의 빈틈을 엿보았고, 신라는 고구려의 후방을 칠 준비에 나섰고, 백제는 신라의 허점을 찾기 바빴다. 고구려와 수 두 거인의 틈에 낀 거란은 숨을 죽이며 정세를 살피기 바빴고, 말갈은 고구려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왜국과 서돌궐 등 주변나라들은 이 전쟁의 추이를 예의주시했다. 동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거대 전쟁은 어떻게 왜 시작된 것이었을까?
고구려 전성기를 가져온 국제질서
5〜6세기 동아시아는 화북지역에 자리한 북조(북위-동위:서위-북제:북주), 화남지역에 위치한 남조(송-제-양-진),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유목제국(유연-돌궐),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를 차지한 고구려가 서로 세력균형을 이룬 가운데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유연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고, 바다 건너 남조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대립할 상황은 아니었다. 고구려와 가장 많은 긴장관계를 유지한 것은 4대 강국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북조였다. 북조는 유목제국과 사이가 나빴고, 남조와는 중화(中華) 문명의 정통성을 다투었다. 따라서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와는 무력 충돌을 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천하의 지배자라고 여긴 남조와 북조의 황제들은 인접국가의 임금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고, 그들의 사신을 조공사신으로 여겼다. 북위 황제가 고구려 임금을 책봉하였지만, 고구려 문자명왕은 북위 사신의 접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5〜6세기 남북조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는 실질과 명목 사이에 큰 괴리가 있었다.
북위는 고구려를 만리장성 동쪽의 세계를 마음대로 통제하는 나라로 인정하였고, 남조에서도 고구려를 국력이 막강하여 통제할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겼다. 고구려에 파견된 북위 사신의 관위(官位)는 남조에 보낸 사신과 동등한 고위급 관리였다. 북위가 외국 사신에게 주는 저택에서도 고구려 사신은 남조 사신에 이어 2위로 대접받았다. 489년 북위는 남조(제나라)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등하게 대접하여, 남조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남북조로 나뉜 상태에서 중화문명 중심의 일원적 천하질서는 통용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유연과 남조(송)를 연결해 북위를 압박하는 등 5〜6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다원적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힘을 쏟으며, 4대 강국의 하나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요동치는 국제질서
581년 북주의 외척이던 양견이 개창한 수나라가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화세계를 통일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550년 이후 유목세계의 지배자였던 돌궐은 북중국을 나누어 다스렸던 북위와 북주로부터 한때 조공을 받으며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582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된 후, 북중국을 지배한 수나라와의 관계가 역전되고 말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584년 이후 대체로 수나라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590년(또는 597년) 수나라 문제(양견)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위협해왔다. 고구려가 진나라 보다 인구가 많은가 영토가 큰가를 물으며, 고구려에게 제후국으로서의 충성을 요구했다. 증대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한 명목상의 정치적 우위를 실제적인 우위로 확인받고자 했던 것이다. 다원적 세계질서의 지속을 원하는 고구려에게, 수나라는 일원적 세계질서를 강요했다. |
첫댓글 누구는 요동분토신 운운하면서 1차 고수전쟁에서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음에도 고구려가 항복했다고 하더군요.ㅋㅋ
드디어 고-수 전쟁에 한 발을 내딛으셨군요.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