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알렌,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으로 시작하여 우리나라에는 미국 캐나다 호주등에서 당시 최고 엘리뜨이면서 의사 또는 신학자인 젊디젊은 선교사들이 안락하고 보장된 본국에서의 삶을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미개한 조선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펼친 의료, 교육, 선교사업은 우리나라 교육와 의료와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캐나다 여자의료선교사인 닥터 머리(Dr.Murrey)는 우리나라에서 의료선교를 펼치던 중 당시 기독여의사를 수소문하여 김애희, 차인실, 강주심 외 몇 명과 함께 ‘대한 예수교 녀의사회’라는 이름으로 기독여의사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때는 해방 후 1948년 5월, 당시 회장은 Dr.Murrey, 부회장은 김애희, 서기 차인실로 장소는 서대문에 있는 Dr.Murrey의 집에서 모였으니 그 모임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한 기독여자의사회’라는 이름으로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한 달에 한 번 모여 예배드리고 최신의학 강좌를 들으며 모임을 이어 가다가 1955년 5월 Dr.Murrey는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귀국하고 그 이후에는 김애희 선생이 회장직을 맡아 회를 이끌면서 한국 전쟁 이후 피폐해진 조국의 현실에서 무료진료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로 개척교회를 중심으로 신촌지방, 천호동지역, 양수리, 미전리, 일산 지방 등에서 소규모로 시작하였으며, 그 외 장학사업, 소록도 나환자촌과 흑산도에 구호 사업을 하는 등 활동을 하였고 점차 전국 각지의 교회를 통하여 무료진료와 구호물자를 보내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당시 대한 예수교 녀의사회의 활동은 한국 기독신보, 기독공보, 새가정, 동아일보 등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본 회원이신 여성숙 선생은 목포에 결핵치료를 위한 목포의원을 개원하여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하였으며 1965년 결핵 요양소인 한산촌 요양원을 세우고 1986년에는 무의탁 결핵환자 재활의집 ‘한 삶의 집’을 세웠으며 최근까지 본회에서 후원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의사회가 1964년 창립되고 좀 더 조직적으로 의료선교를 하기 위하여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가 1969년 발족되면서 본회에서는 의료선교협회와 협력하여 해외 의료선교에 동참하게 됩니다. 송순옥 선생은 한 달간 병원문을 닫고 방글라데쉬 무의촌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였으며 한원주 선생은 1979년부터 의료선교의원 전인치유소를 열고 무보수로 30여년간을 봉사하며 심신에 병이 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할 뿐 아니라 사회적인 자활까지 돕는 일을 하셨습니다. 강주심 선생은 초창기 창립멤버 중 한분이신데 일찍이 군선교의 중요함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어머니 군선교회를 만들어 본회에서 최근까지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군대야 말로 앳된 청년들이 군 생활에 적응하느라 몸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군대에서 만난 하나님이 이후 사회 생횔에서 바르고 건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귀한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과 달리 본 회 설립 당시는 우리나라가 해방직후이며 625동란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모든 사람이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특히 여자들은 교육에서 제외되었으나 의사가 된 여자들 특히 기독여의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의사라는 달란트와, 혜택받은 여자로서 항상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을 졌다는 마음으로 서로 뜻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그들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려고 힘써왔습니다. 선배님들의 이러한 의사로서의 이웃 사랑은 의료봉사뿐 아니라 미혼모돕기, 장애인돕기, 탈북아동돕기등, 여러분야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또한 사회문제, 북한문제, 세계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참여하기를 힘썼습니다
우리나라는 급속히 발전하여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의료보험 및 의료보장제도가 국가사업으로 정립되어졌고 의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이제 전국 구석구석에 의료시설이 들어갔으며 실제적으로 의료 사각지대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회사에 정식 취직되면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으나 비자 만기가 된 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출국하지 못하게 되면 신변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하고 더구나 의료 혜택은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본 회는 그들의 어려움이 발생함에 따라 2001년부터 그들을 진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안산중국동포교회(김윤자, 현민숙선생), 필리핀외국인노동자(조보경, 노정숙선생) 진료를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10여년 이상 남편, 자녀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진료 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위한 학교에 물심으로 지원하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2004년부터는 해외 진료에 눈을 돌려서 매년 중국, 캄보디아, 네팔, 인도 등 의료혜택을 받아보지 못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짧게나마 의료혜택을 나누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 지역 선교사와 연합하여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해외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한기독여자의사회는 기독교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모인 단체이므로 기독교인 여의사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하나의 공동체의식으로 서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회원 간의 교제와 연합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4째 주 토요일 오후 5시에 광림교회 본관1층 시온홀에서 예배드리며, 선교보고, 하나님의 사링을 실제 체험한 사람, 실천하는 사람, 각 분야에서 크리스챤으로 일하시는 분들의 간증과 강의로 더욱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예배 중에 경험하며 또한 회원 간의 친목과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그 범위를 넓히면 우리 민족이 하나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임을 알고 이 세상 누군가가 아파할 때 그것이 바로 내 아픔이 되며 아파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회원 중 최경숙 회원은 남편 최병한선생님과 함께 아이티, 네팔 지진 발생 지역등 재난이 발생한 지역에 신속히 날아가 진료를 하고 아프리카 브룬디 한센병 환자촌, 로힝야 미얀마 난민촌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가장 힘든 지역에 긍휼의 마음으로 동분서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문용자 회원은 남북보건의료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일하시며 우리 회는 이렇게 회원 각자가 하는 사업을 회 차원에서 참여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화합하고 있습니다. 이완주회원은 의료선교사로 인도에서 1년에 6개월 이상 현지 선교사와 협력하여 의료봉사하며 때마다 본회에서 보고하며 또한 우리 회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회가 돕고 있습니다. 오혜숙 회원은 한국여자의사회 봉사단장을 맡아 한국여의사회 의료봉사를 이끌고 있으며 이번 캄보디아 의료 봉사에도 우리 회 회원이 다수 참가하여 진료를 하였습니다. 유신애 회원은 그동안 탈북자 아이들을 돕는 사역에 전념하여 그 아이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모로 애쓰시며 그 중 한명은 장애를 무릎쓰고 올 평창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성영자회원은 십수년간 노숙자와 쪽방주민 무료진료를 해오고 있습니다. 한원주 회원은 지난 30-40년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으로 작년 성천상을 받으시고 아직도 9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진료하시며 봉사하시어 후배들에게 롤 모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많은 회원들이 본 회를 통하여 또는 각자 속한 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하여 많은 의료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의사이면서 여자라는 물리적 조건으로 가정일과 육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관계로 많은 회원이 참여하지는 못합니다. 항상 소수이지만 여자로서 의사라는 귀한 달란트를 받은 한 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닯아가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를 소망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또는 믿음의 용기를 내어서 모이고 기도하고 봉사합니다.
첫댓글 우리회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사역을 물흐르듯 잘 표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수고많으셨습니다!~^^
박복렬 회장님
우리회 역사를 잘 표현해주셨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