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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의 불교적 삶 안필호 (포교사/군7팀) 불교를 믿는 불자라면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언제 어느 때이건 서로 마주치고 만나고 함께하는 인연이 있을 때 모두 다 이것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아 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불교와의 만남이 있게 된 인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 다. 나는 당초에는 사실 무 종교론자였는데 불교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40 대 초반이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보면 한 18년 정도 지난 셈이다. 어찌 보면 인생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늦게 불교와의 인연을 가졌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와의 첫 인연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는 솔직 히 불교가 정말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다만 막연하게 40여년간의 내 인생 에 대한 어떤 반성 같은 것을 불현듯 느끼기 시작하여 ‘아, 나도 이렇게 평범하기 만 한 인생을 살아가지고는 안되겠구나. 이런 식으로는 내가 어릴 적부터 꿈꾸 고 동경하던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과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그러한 것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키 게 되었다. 그로부터 점차 생각을 깊게 하던 끝에 이 우주세계와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 인 실상을 밝혀 주는 진리는 결국 종교에서 찾아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 었다. 철학이나 과학등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단지 철학으 로서의 한계성 때문에 일정한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 큰 기대를 갖고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 자신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거의 백지상태였으며 불교든 천주 교든 기독교든 그저 모든 종교란 부처님이나 하느님과 같은 어떤 절대자를 신봉 하고 따르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믿다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든가 하느님의 계시가 내려지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수준에서 시작된 불교 입문은 처음엔 가족의 수명장수와 복을 빌고 부처님께 절하고 하는 아주 단순한 기복신앙에 불과하였지만, 차츰 불교경 전과 불교교리를 접하게 되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이해하고 접근하다 보니까 어 느덧 내 자신에게 불교가 가깝게 다가오게 되고 점점 불교사상에 심취할수록 다 른 서적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불교관련책자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교야말로 내가 바라던 종교요 깊이 공부해 보고 믿어볼 만한 종교 라는 신뢰감이 형성되었고 또 이것이 굳은 신심으로 다져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감내지 신심은 하루 아침에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 니었다. 내가 오늘날 이렇게 불교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기 까지는 십 수년의 상 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만큼 불교사상 자체가 철학적이면서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 다.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 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종교에 있어서 신뢰한다거나 믿는다는 것은 한치의 의 심도 없이 믿는다는 아주 새로운 의미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 없이 믿기 위해서는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그 믿음의 대상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 아니면 믿기는 믿되 다소 불 확실하고 의문점이 있어서 완벽하게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인지 잘 분별하여 알 고, 그에 따른 신중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불교를 진정으로 믿게 되기까지 상당세월이 필요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판단에 의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 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왕 종교가 범하고 있는 오류중의 하나는 어떤 의문점이 제기되었을 때에 그 에 대해서 ‘그런 것은 알 필요가 없다.’하고 얼버무리고 만다는 것이다. ‘네가 그 런 것까지 알아서 뭘 하겠느냐, 그냥 무조건 믿어라’하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 는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고 납득이 잘 가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인데, 어떻게 알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뭘 믿으라는 말인가? 이것은 크 게 잘못된 일이며, 설령 믿는다 해도 그것은 맹신과 다를바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과연 이것이 믿을만한 종교인지 아 닌지 분별해 보느라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세월이 헛되지 않아 오늘날 은 나에게서 불교의 진리를 내놓고는 다른 것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이 우주 세계에 태어난 원초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삶의 근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 해답을 불교에서 찾아낸 것이다. 과거 언제부터인가 인간이란 그저 까닭 없이 태어난 존재이고 따라서 보통 사 람들처럼 잘 먹고 그냥 잘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단순하고 편리한 사 고방식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과정 속에는 반드시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는 점이 불교에 입문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또한 불교에서 그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 불교를 깊이 믿게 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지나친 말 일지는 모르지만, 불교를 진실하게 믿는 불자들에게 있어서는 얼마 나 잘 먹고 잘 입고 오래오래 잘 사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 는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더 좋고 더 맛있는 것을 먹는다든가 더 비싼 옷을 입는다든가 더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물질문명이 치성한 사회환경에서 대부분의 생활인들은 재 물과 권력, 그리고 명예 등에 허덕이면서 정신적 가치의 탐구나 수행은 차치하 고라도 어려운 이웃들에게 선심 한 번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이 오직 자기 자신,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여유 없는 인색한 삶을 살다가 사라져 가는 현실을 본다. 또한 돌이켜 보건대 지금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삶이나 가치의 소 중함을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천육백년이 훨씬 지났으니 우리 생활의 근저에 는 불교문화가 뿌리내려 살아 숨쉬어야 마땅하리라. 사실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 화재산의 대부분이 불교 문화재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외국인이 ‘코리아’를 보는 시각은 분명 불교문화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모르고 불교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많은 한국인들을 볼 때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또한 오늘날 우리는 의식주에서부터 모든 일상의 생활자체가 온통 서구화 일 변도의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의식주 전반에 걸쳐 외국말로 상품명을 써야만 이것이 제 구실을 하게 되어있다. 의복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이나 주택의 이름을 보면, 이것이 한국식이건 외 국식이건 불문하고 거의 서양을 빙자하여 만들어 내야 훌륭한 것으로 보이고, 그러다 보니까 일상의 대화도 꼭 서양말을 20~30%쯤은 섞어가면서 말해야 그런 대로 사람대접을 받게 되는 형편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래 타고난 생김새 마저도 머리 염색이니 성형 수술이니 해서 아예 서양인 자체로 되지 못한 것을 꺼려하는 풍조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 었다. 이런 식으로 서구 일변도로 우리의 모든 것이 치달으면서 실제 우리의 전통이 나 가치의 규범이 사라져 가는 현실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깝고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만약에 불교의 진리를 조 금만 이해했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또한 우리나라 정치 사회의 각 방면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각종 비리와 부조 리를 보면 실망이 아니라 허탈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나라에 있어 각 방면의 책임자들은 권한만 있고 책임질 줄은 모르 는 것일까? 하루 빨리 올바른 가치관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책임 문제가 나왔으니 나에게 일어난 작은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한 삼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내가 직장에서 근무하던 때였고 매일의 바쁜 일정 속에서 세월이 어 떻게 흘러가는지 모른 채 어느덧 해가 바뀌는 그러한 나날이었다. 근무처가 여 의도 증권가였는데 추운 한 겨울 어느날, 나는 퇴근시간이 사뭇 지나서 여느때 처럼 차를 몰고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항상 지나치는 마포대교를 건너려고 했을 때 평소와는 달리 초입 부터 차량행렬이 길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좀처럼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다른 방면으로 빠져나갈 수조차 없었고 별 수 없이 매우 짜증스런 기분으로 도대체 그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무엇인지 불평하면서 한 시간이 가깝도록 제자리 걸 음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포대교 중간쯤에 이르자 어느 지점인가 부터는 웬일인지 앞 차량들 하나하나가 까닭 없이 꼼짝 않고 한참씩 걸려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분명 히 그들 앞에는 충분히 차량을 진행시켜 나갈만한 주행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말이다. 이를 보고 꾹꾹 참았던 불평으로부터 은근히 화가 치밀어 빨리빨리 나아가라 고 클랙션을 울리기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내 차량이 문제의 그 지점 에 이르렀을 때, 나는 처음에는 진정 영문을 모른 채 차량을 지체 시킨 원인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만큼 떨어져 있는 마포대교 난간에 웬 여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 이 언뜻 보였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그토록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 나 의아해 하면서 살펴보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름아니라 그 여자는 다리 난간 바깥쪽에서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달랑 매 달린 채 한강물 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세상을 하직할 태 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머리는 한 방 얻어 맞은 것처럼 멍했지만, 여기서는 무엇보다 신속한 판단만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 처녀가 왜 그래야 되는지의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성큼 바깥으로 나와 그 여인을 향하였을 때 그도 또한 나를 보게 되었다. 내가 그 젊은 여인의 눈빛을 보았을 때 그 눈동자 속에는 뭔가 한 많은 곡절 이 가득찬 것을 알 수 있었고, 또한 나로 인하여 자칫 그냥 떨어져버릴 위기감이 서리고 있었다. 그러한 다급함 중에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면서 그에게 다가가는 자세를 고치고 가능한 한 내 자신의 모습이 온후하 고 자비하신 관세음보살님으로 닮아져서 상대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기를 빌었 다. 그리하여 다행스럽게도 가까스로 그 여자를 붙잡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동안 차량 안에서 손에 땀을 쥐고 사태추이를 관망하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그 녀를 대교난간 안으로 무사히 끌어 올릴 수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책임과 권한의 양면성과 그 상호조화 속에 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쉽게 사용할 줄 알면서도 책임을 지는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색한 경향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앞서의 사건에 있어서도 한 여인이 강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세상을 등지려 하였다면, 그때 누군가는 어떤 방편을 써서라도 우선 그 여인을 구해놓고 볼 일 이 아니던가? 그러나 일이 잘못되면 자신이 사건에 말려들지나 않을까 혹은 본의 아니게 책 임질 일이나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소시민적인 회피의식이 앞섰기 때문에 그 많 은 사람들이 있었건만 아무도 나서지 못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불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 차이가 나는 기본적인 존재방식이 아닐까? 진정한 불자라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있어서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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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화의 가치을 이름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심 할수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