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樂善齋)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익공(翼工)집이다.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창덕궁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헌종 12년(1846)에 건립한 것으로 본 건물에 접속된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등 3개의 건물을 총칭하여 낙선재(樂善齋)라 부르고 있다. 정문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낙선재 남행각(南行閣) 12칸에 설치되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뒤로 낙선재가 있다. 정면 6칸 중 우측 한 칸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누마루가 되었고 몸채는 장대석 기단 위에 방형(方形) 초석과 기둥을 한 일반적인 주택풍으로 세워졌다. 즉 기둥 위 주두(柱頭) 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틈에 도리를 얹었으며 창방(昌枋)과 도리받침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웠고 창방머리는 초각(草刻)하였다. 누마루는 사다리꼴 높은 석주형(石柱形) 초석 위에 방주(方柱)를 세우고 머름창방 위에 사분합을 달았다. 누마루의 아래 분구(焚口) 있는 주변은 불규칙한 선의 모자이크 장식이 독특하며 주간의 문짝의 무늬가 다양하다. 집 뒤로는 큰 석재로 쌓아 만든 화계(花階)가 있고 굴뚝과 각 단의 꽃나무, 괴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원(造園)이 뛰어나다. 낙선재에 연접한 석복헌은 역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안사랑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3급 장대석 기단에 계단이 둘 설치되어 있다. 사다리꼴 초석 위에 방주가 섰다. 전면의 주간에는 세장(細長)한 장지문이 달렸는데 그 중 중앙 1칸은 머름을 하여 낮고 문살 모양도 다른 문과 다르다. 건물 주위로 행각이 둘렸으며 밖으로 외행각(外行閣)이 나 있고 이것이 수강재에 이어진다. 수강재는 15칸 규모이며 5량 가구(架構)의 홑처마 단층기와지붕을 한 건물이다.
창덕궁 남동쪽에 들어앉은 낙선재는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1847년 왕권을 강화하려고 세운 건물이다. 그는 '선을 즐거워하다'는 전각의 명칭처럼 새로운 기운이 이곳에서 솟아나길 바랐다.
이듬해 헌종은 낙선재 옆에 경빈 김씨의 처소인 석복헌(錫福軒)을 지었고, 정조가 서재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수강재(壽康齋)까지 묶어 세 건물이 서로 통하게 했다.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는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세웠다. 궁궐 건축에는 드문 사대부 주택 형태의 가옥으로 지어졌으며 단청(丹靑)을 하지 않아 수수한 느낌이다.
정식으로 혼인한 왕비보다 후궁인 경빈 김씨를 좋아했던 헌종은 1849년 그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처럼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낙선재는 궁궐 전각이 아니라 사대부 주택처럼 설계돼 수수한 느낌을 준다. 질박해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건물의 빛깔이다. 낙선재에는 여러 색으로 칠한 무늬인 단청이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장식은 매우 화려하다. 낙선재 지붕에는 서까래를 이중으로 설치한 겹처마가 있고, 문살과 창살의 문양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또 낙선재와 석복헌 사이의 담에는 거북 등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귀갑문(龜甲文)이 들어가 있고, 기둥에 걸린 편액인 주련에는 청나라 문인인 옹방강과 영화 등이 쓴 글씨가 새겨졌다.
내부 누마루와 온돌방 중간에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문인 만월문(滿月門)이 있으며, 아궁이 앞에 놓인 벽은 얼음이 깨진 것 같은 빙렬문(氷裂文)으로 장식됐다.
특히 낙선재 뒤뜰에는 계단 형태의 꽃밭인 화계(花階)가 있는데, 봄날이면 모란과 병아리꽃, 앵두나무꽃이 피어 색의 향연을 펼친다.
기이한 모양을 띤 돌과 '금사연지'(琴史硯池)라는 글자가 음각된 작은 연못도 눈길을 끈다.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는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이 세웠다. 궁궐 건축에는 드문 사대부 주택 형태의 가옥으로 지어졌으며 단청(丹靑)을 하지 않아 수수한 느낌이다. 담장의 귀갑문은 임금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한다. kjhpress@yna.co.kr
낙선재와 뒤뜰을 공유하는 석복헌은 ㅁ자 집으로 행각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어 분위기가 다소 폐쇄적이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빈 김씨를 받아들인 헌종은 석복헌에 다산을 기원하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 예컨대 마루 난간의 박쥐와 호리병 조각, 출입문 옆에 있는 포도 문양이 다산의 상징물이다.
수강재는 조선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뒤 기거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 터에 신축한 건물이다. 본채는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는데, 기둥과 서까래에 단청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창덕궁 낙선재 권역은 조선 왕실의 명맥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곳이다. 고종이 갑신정변 직후 집무소로 사용했고, 국권을 빼앗긴 순종이 1912년부터 머물렀다.
해방 이후에는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와 영친왕비, 덕혜옹주가 모두 낙선재에서 살다 숨을 거뒀다. 영친왕비가 1989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나면서 낙선재는 살림집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고, 1996년 19세기 말 모습으로 복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