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이 없어지면
조 흥 제
문구점은 공책과 필기구를 파는 가게다. 그런 가게가 없어져 간다.
나는 82년부터 ‘隨想의 廣場’난을 만들어 쓰고 싶은 것, 자료 등 모든 것을 공책에 기록한다. 검고 줄이 쳐진 큰 공책으로 눈이 나빠 두 줄에 글자 하나씩을 쓰는 큰 글자다. 필기는 볼펜심 12개 짜리를 사서 사용한다.
그래서 문방구점을 가끔 찾는데 장승배기 주위에 문방구점이 많이 없어졌다. 영도시장 안에 있던 문방구도 없어지고, 장승중학교 입구에 있던 문방구도 없어지고, 강남극장 앞에 있던 문방구도 없어지고 영도시장 건너편에 있던 문방구도 없어졌다. 장승교회 건너 편 지하나 노량진까지 나가야 한다.
그러다 2015년에 은평구로 이사 왔다. 은평구라고 다르지 않다. 문방구점을 찾아 산지사방을 헤매기도 했다. 시청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는데 주위에 문방구점이 없어 남대문 시장에 가서 사 오기도 했다. 그러다 집 근방에 큰 문구점이 생겼다. 그 문구점이 없어지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작년에는 코로나로 꼼짝을 못하여 공책을 사러 나가지도 못하다가 은행도 갈 겸 아파트 단지 앞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공책도 살겸 남대문 시장에 갔다. 미도파 백화점 건너편에서 내려 옛날 코스모스 백화점을 끼고 시공관 앞 4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올라갔다. 그 거리가 명동의 핵심이다. 충무로와 만나는 500여m의 길에 양장점, 양복점이 많았던 50~60년대에 유행을 창출하는 번화가였다. 나는 65년도에 직장이 남산 밑 남산초등학교 옆에 있었다. 집은 연희동이어서 종로2가에서 버스를 내려 가면 옆에 땅을 깊이 파고 물이 고이는 것을 발동기로 퍼냈는데 거기에 지은 집이 삼일빌딩이다. 31층이나 되어 당시에는 가장 큰 집이었다. 세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도 그 무렵에 지어졌다. 출퇴근길에 명동을 통과하면 늘씬한 키에 양장을 한 아가씨들이 많아 흥청거리던 명동이었다. 근래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와 화장품 가게로 변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던 명동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가게들은 파리를 날리고, 손님을 유치하기 위하여 문 앞에 선 안내원은 몸을 비비 꼬고 있다.
충무로 사거리에서 충무로 입구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충무로는 50~60년대에 영화와 음반을 만드는 메카였다. 그러니만치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저무는 충무로’라는 유행가가 나왔다. 50년 한복남이 부른 노래다. ‘서러운 일 많아서 서울이더냐/ 신문 파는 소년들 저무는 충무로/들어찬 주점마다 들어찬 술집마다 넘치는 소리/ 성당의 종소리는 장단이던가.’ 그때는 석간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팔러 다니는 소년들이 있었다.
충무로 입구를 건너면 신세계 백화점이다.
그 옆에 우리나라 전통시장 중 가장 큰 남대문시장이 있다. 가게에서 1700여종의 물건을 팔고, 하루 찾는 사람이 40만이라고 한다. 80년대에 등산장비를 사러 자주 갔었다. 남대문시장은 물건 값이 동네 시장보다 싸기 때문이다.
신세계백화점, 즉 남대문 시장 입구에서부터 공책 파는 가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상인들은 길을 쭉 따라 가라고 했다. 몇 사람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와서 공책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60대의 아저씨는 골목을 한참 들어 와 가게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 아저씨가 왜 문방구점 앞까지 가르쳐 주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공책’이라는 말의 향수에 끌려 안내해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노트를 그 전에는 공책이라고 불렀었다.
두꺼운 시커먼 대학 노트 두 권을 사고 값을 물으니 만원이라고 했다. 각권 180매 내외의 술이 두꺼운 공책이었다. 그 두 권의 공책을 다 쓰고 또 사야겠는데 동네 문구점은 새절역 옆에 있어 한참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코로나로 집콕 신세가 되어 바람도 쐴겸 은행일도 볼겸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신세계 근방 우리은행 본점에서 볼일을 보았다. 우리 은행은 상업은행이 바뀐 이름이다.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으로 바뀌고. 아마 전두환정권 때 은행명이 바뀌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때 상업은행 본점은 한국은행 밑 소공동 입구에 12층 건물이었다.
은행 일을 보고 신세계 백화점 뒤 남대문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문방구점이 어디 있느냐고 초입부터 장사꾼에게 물었더니 앞쪽만 가리켰다. 한참 가다 물었더니 200m 쯤 가다 물으라고 했다. 물어 물어 간 곳이 작년에 갔던 그 가게다. 남대문 건너편이었다. 골목을 둘러보아도 다른 문방구점은 없다. 큰 시장에 문방구점이 한 군데밖에 없다는데 놀라움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가게에는 내가 찾는 공책이 있었다. 작년에 샀던 검고 줄이 쳐진 공책인데 작년에는 두 권에 만원을 주었는데 올해는 9200원을 받아 물건 값도 불황 때는 떨어지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교통비까지 합치면 2400원인가를 보태야 하니 결코 싼 것은 아니다.
공책 두 권을 들고 나오면서 내가 찾는 공책이 머지않아 없어질것 같아 걱정이다. 공책이 없어지면 어디다 쓰나. 내가 죽은 후에 내가 82년부터 쓴 ‘수상의 광장’ 공책들은 어찌될 것인가. 그뿐 아니라 그 전에 쓴 공책들은 어찌될 것인가. 내가 보관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공책은 56년도 것이다. 그 후에 일기를 쓰다 말다 하다가 수필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기 대신 수상의 광장난을 만들어 작품마다 번호를 붙이고. 공책마다 권수 표시를 했다. 권수가 많아지면 중복될 수가 있고 어느 책에 뭐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색인집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번호로 1만 3천여 항목이고 권수로는 282권이다.
거기에는 신문이나 책을 보고 내가 몰랐던 것이나, 영감이 떠오른 것은 메모 노트에 적어 넣고 시간 있을 때 조금 부연해서 수상의 광장난에 옮겨 적는다. 글감이 떠오르면 바로 적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곤란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야속하게도 머리를 빠져 나가고 머물러 있어도 영감이 빠져 나가 청소년 때 표현으로 '앙꼬 빠진 찐빵'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메모광이라는 글이 국어교과서에 있었다. 누구의 글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뭐든지 보거나 떠오르면 메모지에 적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네 집에 갔다 밤 늦게 집에 와서 보니 메모장을 안 가지고 왔다. 그래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어렵게 찾아 왔다는 내용을 읽고 감동을 받았는데 나도 그 짝이 났다.
요즈음은 컴퓨터에 입력시켜 자료를 보관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삭제될 때가 있다. 평생 모은 자료가 한 순간에 없어진다면 얼마나 원통할까. 나도 책 한 권 분량을 통째로 날려 보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좀 귀찮지만 몸에 익은 공책에 적어 넣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생전에 공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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