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김정화
그날의 제안은 순전히 나의 취기 때문이었어. 지인의 집들이에서 만난 안 선장과 미스터 박과 내가 2차로 생맥주 딱 한 잔만 더 걸치자는 게 발단이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난생 처음으로 중매를 선다고 선제공격을 날렸을까. 카페의 홀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흰색 그랜드피아노가 없었더라면 30년간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을 접고 생활고에 허덕이던 하 여사를 선뜻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어. 맥주 빛 안 선장과 하얀 피아노 같은 하 여사를 서로 맺어주면 환상의 커플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
그 시간 카페 벽걸이 TV에는 한국과 페루의 월드컵 평가전 중계가 시작하려든 참이었어. 하 여사는 남포동 지하상가에서 단 돈 만 원에 건져 올렸다는 커다란 짝퉁 샤넬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타났지. 젊었을 때 제법 사내를 울렸다는 그녀는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피부도 고왔고 몸매도 날렵했어. 성격상 언제 날릴지 모르는 거친 립 드리블이 좀 걸리긴 했지만, 세련된 의상과 제법 정숙해 보이는 몸짓에 다소 안심했지. 안선장이 누군가. 오대양 육대주를 항해하면서 용모가 절미한 뭇 여인들을 완패시켰지만 화갑이 되어도 호적수를 고르지 못할 정도로 콧대가 골대보다 높은 사람이잖아. 그러니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하 여사 정도라면 양 팀의 전력이 비슷해서 용호상박의 인생시합을 하리라고 판단했지. 마침내 두 선수가 그라운드에 나섰지. 하 여사는 내 옆에 다소곳이 앉으며 눈짓으로 재빨리 패를 읽고 공격 휘슬을 보내왔어. 월드컵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상견례를 하듯 주심인 나는 양측을 소개하며 페어플레이를 주문했지.
“말씀 듣던 대로 젠틀하십니다.”
그녀가 먼저 은근슬쩍 안 선장 진영을 향해 땅볼을 날리더군.
“하 여사님이야말로 미인인데다 아주 매력적이십니다.”
안 선장도 멋지게 드리볼을 했어.
해운대 스카이라운지 창가의 푸른색 조명 때문인지 안 선장의 은발이 LED 전광판 빛을 띠었지. 즉석 맞선자리이니만큼 테이블 세팅도 우아한 칵테일 잔으로 교체되었고. 하 여사는 상대편 전술을 파악하느라 눈길이 바빠졌어. 그녀 역시 그동안 비공개 훈련을 제법 했을 터. 과거 전적이야 어쨌든 두 사람 모두 경기 의욕이 넘쳤지.
“하 여사의 두 아드님이 아직 혼사 전이라지요?”
안 선장의 공격이 상대방 진영 깊숙이 날아가 꽂혔어.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온 하 여사의 첫째 아들은 마흔이 다 되도록 변변한 직업 하나 없고, 둘째 놈은 뒤늦게 드럼을 친다며 전문대 실용음악과에 겨우 이름을 올린 처지였지. 하 여사는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늘 수세에 몰리지만 오늘만큼은 쉽게 패널틱 에어리어를 내주겠어?
“아들이란 이름만으로도 철옹성과 같지요. 제 아들까지 책임져 줄 남자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신속한 인터셉트를 날리는 하 여사의 수비력도 만만찮았지.
예상 밖의 공세에 당황한 안 선장은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듯 남은 술을 들이켰지만 연신 허공으로 볼만 날렸지. 그때였어. 지금껏 기회만 엿보고 있던 미스터 박이 재빠르게 중앙 미드필더로 돌진한 거야.
“하 여사님, 재즈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는데, 오늘 한 곡 연주해 주실 거죠?”
나는 갑자기 뜨악해졌어. 십여 년 전, 그녀가 피아노 한 대를 밑천으로 ‘객석’이라는 음악 카페를 열었을 때가 생각난 거야. 술에 취한 세무사 손님이 하 여사를 만만떼떼하게 보고 피아노를 한번 쳐 보라고 호기 있게 소리쳤지. 그때 한 성깔하는 하 여사 왈 “내가 당신 앞에서 치려고 피아노를 배운 줄 아느냐?”라며 냅다 발길질해서 쫒아내었던 기억이 선명했지.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자존심만 누그러뜨리면 코너킥 찬스쯤은 얻을 수 있을 텐데. 일이 잘 성사되어 본선 진출만 해도 안 선장이 중매 턱으로 약속한 양장 한 벌은 따 놓은 당상이련만, 나는 재빨리 하 여사에게 눈짓으로 백패스를 날리며 부추겼지. 다행히 하 여사는 종업원에게 연주 허락을 받고서 무대로 걸어 나갔어. 우리는 마시던 잔을 놓고 숨을 죽였지. 페루전도 후반전의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어. 생각 외로 두 사람의 경기는 명승부전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은근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 하 여사의 연주 실력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최고였지. 그녀가 특유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고는 자세를 고르더니 ‘고엽’을 치기 시작했어. 느린 듯 멈추었다가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손놀림은 마치 호날두의 반복 드리블처럼 환상적이었어. 기품 있는 그녀는 연이어 ‘월광소나타’를 쳤고, ‘콜로라도의 밤’을 연주할 때는 적수 안 선장마저 피아노 옆에 서서 합창을 해 주었어. TV에서는 끝내 골을 터뜨리지 못한 한국 팀을 아쉬워하는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어쨌든 그날은 타임아웃을 알리는 종업원의 휘슬을 듣고서야 일어섰고 하 여사와 안 선장은 재시합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었지. 그렇게 몇 달이 지났어. 안 선장과 하 여사의 결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 안 선장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하 여사를 안달나게 했고 하 여사의 정면 태클이 안 선장을 힘들게 했지. 지루한 연장전을 지켜보며 괴로운 건 오히려 나였어. 시시때때로 둘은 전화를 걸어와 내게 하소연을 해댔었지. 안 선장은 하 여사더러 얼치기 페미니스트라며 흉을 보았고, 하 여사는 안 선장을 촌스러운 꼽꼽쟁이 노인이라고 되받았어. 그러면서도 며칠 잠잠하다 싶으면 안 선장은 하 여사만 한 여자도 없다면서 꿩 구어 먹은 소식을 아쉬워하고, 하 여사는 팝송 실력과 독일어 발음만은 안 선장이 제법이라고 추켜세웠지.
두 사람을 화해시켜볼 요량으로 술값을 자청하여 자리를 만들어 봤으나 양측은 헛발질만 할 뿐 상대방 골네트를 흔들지는 못했어. 기대했던 양장 한 벌은 물 건너가고, 일여 년 동안 두 사람은 승부 없는 탐색전만 펼쳐나갔어.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안 선장은 꽁치선 배를 타고 다시 출국하였고, 하 여사는 서울 어느 교회의 반주자로 선임 받아 부산을 떠나 버렸어.
정말이지 중매는 함부로 할 게 못되더군. 인생이란 승부가 나지 않는 게임이라는 것. 오직 긴 하프타임만 있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