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선 중 일본에서 선주(船主)나 대리점(代理店) 등 카운터파트(counterpart) 일인(日人)들이, “아직 젊은데 어째 일본어를 잘 하느냐”는 소릴 자주 들었다. 어쩌면 저들의 식민지 시절에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우월감에서 물어본다는 언짢은 느낌도 받았다.
그러면 나는 왜(倭)말로 “나는 쇼와(昭和) 15년(1940년) 출생이라 종전(終戰) 시에는 소학교에 입학도 못했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해방’은 ‘종전’으로, 서기(西紀)보다 자기네의 연호(年號)인 ‘쇼와’ 등이 더 빨리 이해된다. 그러면 어째서?
나는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시에서 태어나 그 다음 해에 귀국했다고 한다. 아버님이 언제 일본으로 건너가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실 때 두 형님과 누님 한 분을 데리고 가셨다. 그래서 그런지 생년월일도 꼭 태어난 그날이다. 출생신고를 일본에서 한 것 같은데 우리들처럼 뒤죽박죽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가 태어나기 전 부모님과 형제 자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아버님께서 일본에서 중고서적(中古書籍)과 폐지(廢紙) 사업을 제법 크게 하셨다는데 형님의 얘기에 의하면 당시 삼륜차(三輪車)를 가지셨다니까 요즘으로 치면 중‧대형 트럭쯤 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귀국하실 때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고서적(中古書籍) 중 말끔한 것들을 여러 권 가지고 나오신 것이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집에 몇 권이 남아 있었다. 지질(紙質)도 장정(裝幀)도 좋았다. 특히 의학(醫學)서적은 내가 봐도 노르스럼한 종이에 세로로 깨끗이 인쇄된 데다, 거의 한자(漢字)로 되어 있고, 한자들 사이사이의 일본 글자 몇 개만 알면 쉽게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는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범학교 졸업 전후 즉 1958~9년 경이다. 다행히 한자(漢字)는 배웠으니까 반타작은 된 셈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우선 교재가 없었다. 당시로선 일본어를 공부한다는 것자체가 사회적으로도 참으로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 겨우 구한 것이 박성원 씨가 지은, 가로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은 ‘일본어사전’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한자를 읽는 방법이었다. 같은 문화권인지라 한자를 보면 우리와 같은 단어들이라 뜻은 알겠는데 읽지를 못했다. 한자(漢字) 한 글자를 두고 읽은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었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일본에서 명함을 받았는데 이름이 평(平)자가 네 개인 ‘平平平平’이었다. 같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뚱하며 모르겠다고 했다. 다행히 본인이 한 자 한 자에 토를 달아 두었다. “(平)히라 (平)다이라 (平)헤에 (平)베”였다. 즉 ‘平’자 하나를 읽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일정한 법칙도 없는 듯 했다. 한자(漢字) 한 자를 읽는데 사전을 여러 골백 번을 뒤졌다. 짜증이 바가지로 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놓질 않고 틈날 때마다 이어졌다. 어디 쓸 것인지? 뭘 할 것인지는, 정하지도 정할 수도 없었다. 그냥 오기(傲氣)가 났었고 하나하나 해결되었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거기에다 부담이 없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늘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교직(敎職)을 그만둘 때까지 10여 년 동안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승선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만든 선박들의 기기(器機)나 항해(航海) 계기(計器)들의 사용법이 일본어로 되어 있어 보기가 한결 쉬워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서 선박이나 계기(計器)들 대부분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수박 겉핥기 하듯 한 것이었는데도 이슬비에 옷 젖듯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내 스스로도 놀랐다.
돌이켜 보면 이상한 인연이었다. 그냥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한 일본어가 그 이후의 내 인생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인데, 그야말로 ‘운명적 만남’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가끔 휴가 중에는 가까운 학원에서 딸애 또래의 강사에게 한두 달 배운 적도 있었다.
특히 실무(實務)에서 일본인 담당자들과 만났을 때 일의 처리 과정에서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여간 다행히 아니라고 더 좋아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 옳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손짓들이 오가며 대충 감만 잡고 넘어가고는 나중에 혼자서 끙끙 앓았다.
일반적으로 평균하면 일본 사람이 한국인 보다도 영어에서 한참 아랫길이었다. 일어 외에도 외국어를 해야겠구나 하는 힌트는 이렇게 얻은 것이었다. 우선은 글이 아니라 말이었다. 우리가 중‧고시절에 배운 영어(英語)는 주로 문법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험칠 때 말고는 아무짝에도 필요 없었던 것인데 거기에 진을 다 빼게 했다.
영어에 대한 기억으로는, 사범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정상진 영어 선생님이 여름방학 숙제로 무슨 책이든지 좋으니 영어에 관한 책을 대학노트에 사그리 베껴오라고 하셨다. 그때 내가 택한 것이 ‘소야규(小野圭) 영문법’이었다. ‘小野圭’는 일본 영문학자인 小野圭次郎(오노케이지로)란 사람으로 일본에서도 ‘수험(受驗)영어의 귀신’으로 불린 사람이다. 이 책을 뭔 말이고 뜻인지도 모르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대학노트 한 권을 채워 담임 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방법이 후에 영문해석에 큰 도움이 됨을 배웠다. 지금도 모르는 외국어는 먼저 써보는 버릇이 있다.
사범학교 졸업반 담임 정상진 영어 선생님
처음 일본을 드나들면서 서점에 들러보니 책 천지였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릴 때 시골에서 아침저녁 개울물로 키운 야채들을, 그들은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의 책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아동도서부터 시작하여 청소년 소설 등을 사서 읽었다. 자기네들도 한자의 음독(音讀)이 어려워 이런 책에는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일일이 토를 달아 두었기 때문이다. ‘해저오만마일(海底五万マイル)’, ‘전쟁(戰爭)과 평화(平和)’ 같은 것들은 지금도 서가에 남아 있다. 엄청 수월했다. 어떤 분이 만화책을 보라고 해서 봤더니 만화(漫畫)는 더 어려웠다. 그야말로 일본문화를 모르고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본 초등 및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책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승전국(勝戰國)인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미국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사고(思考)방식으로 국가에서 일본어 사전을 통째로 미국에 넘겨주었다고 했다. 미국이 먼저 일본을 바로 이해해야 일본이 미국을 배우고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참으로 현명한 처사였다는 생각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옛 병서(兵書)들이 진실이다.
'故鄕(고향)' 옆에 '코기요우', '衰弱(쇠약)'은 '수이쟈쿠' 라고 토를 달았다.
후에 일본에서 직접 구입하여 읽은 책들
지금은 일본의 저명한 작가들이 쓴 소설 원문에도 토를 단 것들을 구해 읽는다. 그래도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공부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민족이 다르고 문화나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덕분에 아프리카 라고스 외항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일본국적 냉동‧냉장선이 입항하면 먼저 내가 승선하고 있던 히로시마마루(宏島丸)을 찾아 도움을 청하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닻을 놓고 바로 항만국 상황실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일본선적 선장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일본에 귀항했을 때 일부러 찾아와 인사를 하는 선장도 있었다. 내가 더 감격한 일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익힌 것이 하선(下船)이후 관광회사 운영이나 사회활동으로 국제로타리클럽이나 와이즈맨클럽에 입회했을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부산‧제주 지역의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일본 연수를 갔을 때도 통역은 물론 공동 사회(司會)까지 맡기도 했고, 자매클럽에서 스피치(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이 내용은 졸저(拙著) ‘흔적(痕迹)’에서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무적으로는 큰 불편 없게 쓰였었지만, 감정(感情)을 나타내는 데는 아직 ‘새 발의 피’였다. 예쁜 아가씨나 아짐씨를 꼬시는 데는 어설프게 아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더 답답했다. 말이 안 나와 그냥 “아~아” 하다가 만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요상한 일이었다. 말이 막힐 때는 그냥 손 한 번 잡아 주거나 어깨를 살포시 안아 주는 것이 효과가 훨씬 컸었다. 하기사 나도 그랬다. 애인을 만들고, 마누라를 꼬실 때도 ‘사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않고 성공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요렇게 삼삼한 마담을....... .
자주 들렀던 스페인어 사용권 여러 곳에서는 서반아(西班牙)어의 필요성에 따라 한때 상당한 수준까지 공부를 했는데 그 후 자주 쓰지 않으니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말도 생각도 물건도 안 쓰면 녹 쓸고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어와 영어 중국어는 거의 매일 운동 삼아 시민공원에 나갈 때면 골전도이어폰을 끼고 알건 모르건 듣는다. 여러 번 들으면 뜻은 몰라도 그 말이 귀에 익어져 우선 낯설지가 않다. 그런 다음 책을 들면 한결 수월해진다. 더 좋은 방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인데 이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쉽지가 않았다. 공원이나 버스, 지하철 안에서 그러다가 멀쩡한 사람이 반쯤 살짝 돈 사람으로 오해받은 것이 가장 좋은 예(例)였다.
첫댓글 오잉??
더 기다려야 하남? 어쩐지 end가 아닌것 같아서리...
타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음은 나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의 발자취엔 관심폭등.^^
'일어'란 단어에 바람새의 추억 한 줌.
해방 후 2년 쯤에 한국으로 왔으니 언어가 되지 않아
'숫가락'(ㅎ)표현 하나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월반한 셈이지요. 그 때 그 시절엔.ㅍ
어린 나이라 한국어에 빨리 익숙해졌지만 집에선 일어로, 학교에선 한국어로.
고등학교에 이길자(늑점이님도 아시겠네요.)가 입학하여 한국어가 서툴러서 하교 후엔
저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답니다. 엄마랑 나랑 대화가 되니까.ㅋ
늑점이님의 열정에 감동입니다.
지금까지 외국어랑 친하고 계시니......
귀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도 깜놀입니다.
전 지구를 떠날 준비로 80세에 거의 나눔했습니다.
해방 후 2년이면 1947년이네요. 월반 안 했으면 후배가 될 뻔 했네요. ㅎㅎ
길자 씨, 요시코 짱이네요. 얘긴들었어도 졸업 이후에도 얘기해본 적은 없지요. 힘들었겠다.
시대가 그런 때였으니 할 수 없었지요.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입이 닳는 것도 아니고 그렇슴다. 건강하소. 부산넘
눈자야, 눈자야 불러서
"어떻게 애들을 가르칠꼬?"걱정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