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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공주,청양 답사 자료
* 일 시 : 2018.06.27 (넷째 수요일) 06:30 ~ 19: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06:30) - 국립공주박물관 – 공주 태화산 마곡사 -
- 점 심 ( 태 화 식 당 ) -
-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 칠갑산 장곡사 – 마산박물관(19:30) >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보물제18호)
* 해 설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인 솔 : 상임이사 : 김 인 국 010-3863-7570
2018-6 공주,청양 답사 자료 마산문화유산답사회
== 충청남도[忠 淸 南 道]
행정구분(8시 7군)
계룡시, 공주시, 금산군, 논산시, 당진시, 보령시, 부여군, 서산시,
서천군, 아산시, 예산군, 천안시, 청양군, 태안군, 홍성군
한반도의 중부지방 남서부에 있는 도.
== 공주시[公 州 市]
행정구분
1읍 9면 6동
인구(명)
114,870(2014년)
금강이 중앙부를 관통하여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하천 양안에 약간의 평야를 이루고 있 다. 내륙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인 구
3만 2485명(2015년 현재)
행정구역
1읍 9면 183행정리(115법정리)
== 청양군 [靑 陽 郡]
차령산맥의 여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칠갑산(七 甲 山, 561m)을 중심으로 남동부 정산 방면과 북서부 청양 방면으로 나누어진다. 금강(錦 江)이 군의 남동부를 흐른다.
*** 국립공주박물관[Gongju National Museum, 國 立 公 州 博 物 館]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웅진동 360)
무령왕릉 및 충청남도 일원 출토유물 등의 백제 문화재를 중심으로
약 9만4,59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대지면적 6만 9,514㎡(2만 1,065평), 건축면적 5,034㎡(1,525평)이다.1934년 공주고적보존회(公 州 古 蹟 保 存 會)가 설립되고,
1940년 옛 관아 건물인 선화당에 공주읍박물관이 개관되어 공주 사적현창회가 관리하였다.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고,
1972년 12월 30일 새 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1973년 5월 1일 새로 발굴된 무령왕릉 출토유물 2,561점을 중심으로 전시했다.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으며,
2004년 공주시에 신축, 개관했다. (두산백과)
*** 공주 태화산 마곡사 - 제6교구 본사
소재지 :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 1172년 보조국사(普 照 國 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이 재건하였으며, 다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고, 순각(淳覺)이 보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려 ‘영산전(靈山殿)’이라고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마곡사 흥성루 [麻 谷 寺 興 聖 樓]
조선 말기의 목조 건축물로 언제 처음 건립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건축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곡사 흥성루의 규모는 일반 사찰의 진입 누각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마곡사 영산전 앞에 큰 누각이 있다는 것은 마곡사 영산전 앞마당에서 사찰의 대규모 행사가 이루어졌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대규모 사찰 행사 때 마곡사 흥성루는 강당 기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곡사 전각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크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매화당 - 태화선원
= 마곡사 영산전(公州 麻谷寺 靈山殿)
조선시대의 불전이다.
보물 제800호 (1984년 11월 30일)
이 건물은 마곡사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51년(효종 2년)에 각순 대사가 다시 세웠다.
내부에 7 분의 여래불상과 1,000분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어 일명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간결한 맞배지붕이 건물을 채색한 단청과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 건물이다.
현액은 조선 세조가 이곳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전한다.
-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베흘림 기둥으로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 내부에는 7구의 불상과 그 주위를 둘러싼 1000여 구의 작은 불상들이 앉아 있다. 보통 영산전은 설법하는 석가불과 10대 제자상 정도만 안치되는 데 비해, 이 전각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석가불을 포함한 과거 7불과 설법을 듣는 수많은 군중들의 '영산회상' 광경을 재현하고 있다.
=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및 복장유물(公州 麻谷寺 靈山殿木造七佛坐像 및 腹藏遺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2016.03.10.)
시대 : 조선시대
수량 : 19점 (불상 7구, 복장유물 12점)
현판-세조/세조어필 (마곡사 사적입안)
마곡사(麻谷寺) 영산전(靈山殿) 내 봉안되어 잇는 목조칠불좌상(木 造七佛坐像)은 모두 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칠불좌상은 단응 (端應)의 주도로 제작되었으나 상의 크기와 신체 비례, 상호 표현, 수인, 착의법 등에 있어 각 불상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13년 마곡사에서는 총무원 불교중앙박물관의 주도하에 칠불좌상의 복장 을 개봉하였고 각 불상에서는 후령통과 발원문을 비롯해 경전 잔편 및 다라 니 등 77건이 확인되었다 .
마곡사 영산전 불상은 칠불로 구성된 예경대상으로 희귀한 사례이자 17세기 후반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단응 (端應)의 불상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칠불상에서는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과 연화질(緣化秩) 등 총 4매의 기록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조성발원문에는 발원내용과 각 불상 조성에 참여 한 시주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강희20년 신유 즉 1681년에 2월에 시작하여 6월에 마쳐 마곡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성발원문에는 제1불에서부터 제7불로 표시하였다.
= 마곡사 국사당 (麻谷寺國師堂)
문화재자료 제63호 (1984.05.17.)
시대 : 조선시대
국사당은 절을 세운 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승려들에게 국사(國師)라는 최고의 승려가 되기까지 많은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사전·조사당·국사전이라고도 한다.
= 마곡사 명부전 (麻谷寺冥府殿)
문화재자료 제64호 (1984.05.17.)
시대 : 일제강점기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시왕은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명의 지옥 심판관이다.
= 마곡사 해탈문 (麻谷寺解脫門)
문화재자료 제66호 (1984.05.17.)
시대: 조선시대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중앙 통로 양쪽 편에 금강역사상과 문수동자상 등을 모시고 있다.
= 마곡사 천왕문 (麻谷寺天王門)
문화재자료 제62호 (1984.05.17.)
시대 : 일제강점기천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웠으며, 건물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1910년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절 입구에서 두번째 있는 문인 천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지붕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안쪽에는 동서남북 4지역을 지키는 사천왕상과 그림이 있다.
= 마곡사 오층석탑[公 州 麻 谷 寺 五 層 石 塔]
보물 제799호 (1984년 11월 30일)
시대 : 고려
일명 다보탑(多 寶 塔). 높이 8.4m
고려 후기의 석탑 기단부 는 이중으로 지대석(地 臺 石)과 하대 저석(低 石)·중석(中 石)·갑석(甲 石)을 높 게 .쌓고 상대 중석에는 탱주(撑 柱: 받침기둥)와 우주(隅 柱: 모서리기둥)를 형식적으로 새겨넣었다
상대 갑석 위의 옥신(屋 身)굄은 2단으로, 1단은 별석(別 石)으로 매우 큰 편이다. 옥개석(屋 蓋 石)과 탑신(塔 身)은 1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1층 탑신 남면에 문비(門 扉)를 조각하고 2층 탑신 4면에 사방불(四 方 佛)을 배치하였다.
옥개의 전각(轉 角)은 반전(反 轉)이 심한 편이고 5층 옥개석에는 2개의 풍탁이 남아 있다. 상륜부(相 輪 部)에는 풍마동(風 磨 銅)이라는 청동제로 된 상륜을 장식하였는데, 현재 이러한 상륜은 다른 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은 손상을 입어 1974년에 조금 앞으로 옮기면서 손상된 부분을 화강암으로 개수하였기 때문에 이질감을 준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낮아 안정감은 없으나 당당하며, 조성시기는 풍마동의 형식이 원나라의 라마식(喇 嘛 式) 보탑(寶 塔)과 비슷한 점에서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곡사 응진전 (麻谷寺應眞殿)
문화재자료 제65호 (1984.05.17.)
시대 ; 조선시대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짜올렸다.안쪽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 백범당 / 향나무
=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公州 麻谷寺 尋劍堂 및 庫房)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1991년 12월 3일 ).
시대 : 조선시대 현판-정조때 청백리 승하 조윤형(1725~1799).
심검당은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 마곡사 동종[麻 谷 寺 銅 鍾]
시대
조선/조선 후기
제작시기·일시
1654년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높이 1.07m, 입지름 75㎝
문화재자료 제71호 (1976년 1월 8일)
종신부(鐘 身 部)에 새겨진 종명(鐘 銘)에 의하면 충청남도 대흥 안곡사(安 谷 寺)에서 주성(鑄 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상부의 종뉴(鐘 鈕)는 두 마리의 용을 세워 장식하였고, 종신 어깨의 네 곳에 유곽(乳 廓)을 배치하고 유곽 사이와 종신부 중앙 4개소에 원형 두광(頭 光)을 가진 보살상을 양각(陽 刻)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乳 頭)가 표현되어 있다.
상대(上 帶)에는 두 줄의 방형대를 만들고 그 안에 범자(梵 字)를 적은 원권(圓 圈)을 배치하였으며, 하대(下 帶)에는 연꽃과 보상화문(寶 相 花 文)을 교차시킨 당초문대(唐 草 文 帶)를 배치하였다. 제작연대와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종으로서 주목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곡사 대광보전[公 州 麻 谷 寺 大 光 寶 殿]
보물 제802호 (1984.11.30.)
시대
고대/삼/백제
건립
1785년재건
규모
측면3칸 정면5칸,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단층 다포계(多 包 系) 팔작지붕.
현판-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1712-1791)
대광보전은 뒤편에 위치한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중심 불전이다.
1782년 발생한 대화재로 불타버렸지만 1785년 재건되었다. 재건 내용은 내부에 걸려 있는 「충청우도공주판지서령태화산마곡사대광보전중창기(忠 淸 右 道 公 州 判 地 西 嶺 泰 華 山 麻 谷 寺 大 光 寶 殿 重 創 記)」를 통해 알 수 있다.
- 높이 약 1m의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多 包 式) 팔작지붕 건물이다. 막돌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는데 정면의 각 칸 간격은 모두 같고 측면 가운데 칸의 간격과도 같다. 그 결과 공간포도 정면의 5칸과 측면 가운데 칸은 2구씩, 측면 전후퇴칸은 1구씩 배열했다.
- 건물의 좌향과 달리 불단을 서쪽으로 배치하여 불상이 동향을 하고 있는 점과 공포에 주장첨차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마곡사 대광보전은 건립 연대가 명확한 건물로서,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서 주장첨차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판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건물 중 이른 예로서 의의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곡사 영산회상도 (公州 麻谷寺 靈山會上圖)
지정(등록)일
시도유형문호재 제191호 2007.10.30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麻谷寺)의 대광보전 후불탱화로 걸려있는 불화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한 모임을 도상으로 옮긴 불화(佛畵)이다.화기에 따르면, 마곡사 영산회상도는 정조 12년(1788) 동홍 등 15명의 화승이 함께 조성하였다. 대형의 화면에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인 설법회를 짜임새 있게 그렸으며 비교적 탁한 색감과 도식적인 음영표현 등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마곡사 대웅보전[公 州 麻 谷 寺 大 雄 寶 殿]
시대
고대/삼국/백제
건립시기·연도
1651년 (중건)
규모(면적)
하층 :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 : 정면 3칸, 측면 3칸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801호 (1984년 11월 30일)
조선 후기의 중층 불전.
마곡사 대웅보전은 내부에 걸려있는 「강희구년경술육월초일일공산지화산마곡사이층대장전단청기(康 熙 九 年 庚 戌 六 月 初 一 日 公 山 地 華 山 麻 谷 寺 二 層 大 藏 殿 丹 靑 記)」에 의하면 건립 당시 대장전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1785년의 기록인 「충청우도공주판지서령태화산마곡사대광보전중창기(忠 淸 右 道 公 州 判 地 西 嶺 泰 華 山 麻 谷 寺 大 光 寶 殿 重 創 記)」를 통해 대장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창호는 하층에서 정면의 가운데 3칸에는 3분합 띠살문, 양쪽 퇴칸에는 쌍여닫이 정자(井 字) 살문을 달았으며, 위층에는 정면에 빛이 통하도록 빗살창을 달고 나머지 3면은 판벽(板 壁)으로 막았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 중층 건물이면서 하층 모서리칸을 모두 장방형으로 구성한 점과 고주를 생략하고 기둥을 배열한 결과 상하층의 평면과 기둥열이 다른 점이 특징적이다.
-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대장전으로 지어졌다가 대웅전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고, 내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17세기 전통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公 州 麻 谷 寺 大 雄 寶 殿 木 造 三 世 佛 像]
시대 / 성격
조선/조선후기의 불상
크기
(높이,길이,두께, 너비)
석가여래상 높이 191㎝,
아미타여래상 높이 178.5㎝, 약사여래상 높이 176㎝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2001.09.20.)
마곡사 대웅보전에 봉안된 목조삼세불상은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좌우 존상들에 비해 약 15㎝ 가량 크게 조각하여 주존불상임을 강조하였다. 이 삼세불상은 짧은 신체 비례와 당당한 조형감, 방형의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 옷주름 폭이 넓으면서 끝단이 둥글게 처리된 옷 표현 등이 특징이다..
마곡사 목조삼세불상은 복장유물이나 기록이 없어 조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공간적 개념의 삼세불 도상, 방형의 얼굴, 신체 비례, 착의법과 세부 옷 표현 등에서 전형적인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조선 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도상과 형식적 특징을 지닌 마곡사 목조삼세불상은 위엄 있는 얼굴 모습과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조형성이 돋보이는 17세기 중엽경의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조각사 연구에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1
보물 제269호 (1963.01.21.)
수량 ; 1첩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시대 : 조선시대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이다.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一)은 검푸른 종이에 금·은가루를 사용하여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 우아한 무늬가 표현된 표지에는 금색으로 제목이 쓰여 있으며, 권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본문은 은색글씨로 바르고 근엄하게 쓰여져 있다.
=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2, 4, 5, 6(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二, 四, 五, 六)
수량/면적
4권 4첩
지정(등록)일
보물 제 270 호 (1963.09.02.)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시 대
조선시대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2, 4, 5, 6(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二, 四, 五, 六)은 구마라집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을 저본으로 1422년(세종4)에 비구 덕명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발원하여 감지에 은니로 쓴 7첩 중 4첩에 해당된다.
= 마곡사 동제은입사향로 (麻谷寺銅製銀入絲香爐)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 (1973.12.24.)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향을 피우는데 사용한 도구이다.높이 20.2㎝, 입 지름 19.5㎝인 이 향로는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 입부분은 넓은 테가 있고, 테에는 8개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몸통 가운데에는 4곳에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써 넣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덩굴무늬로 채웠다. 몸통 맨 아래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잎을 새겼다. 나팔모양의 받침대에는 윗부분에 구름과 엎어놓은 연꽃잎을 두었고,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몸통과 받침대는 따로따로 만들어 연결 시킨 것으로, 연결 부위에는 작은 반원 모양의 받침장식이 있다. 몸통 전체에는 무늬를 먼저 새기고, 무늬마다 은을 입혀 넣는 은입사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고려시대 향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불교 금속 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마곡사 세조대왕연 (世祖大王輦)
시도민속문화재 제14호(1986.11.19.)
시대 : 조선시대
연(輦)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타는 가마를 일컫는 것으로, 이 가마는 조선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온 것이다. 4명이 들 수 있도록 한 긴 멜대 위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사각형의 몸체를 올리고 지붕을 덮은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파손된 부분도 있고 채색도 희미한데,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하다.
=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麻 谷 寺석 迦 牟 尼 佛 掛 佛 幀]
보물 제1260호,(1997.08.08.)
삼베에 채색, 1079×716㎝,
조선 후기의 불화. 두광 안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 쓰여 있어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으며, 각 상마다 명칭이 밝혀져 있다. 칠불이 장식된 보관을 쓴 보살형 석가모니상을 중심으로 수많은 권속들이 둘러싼 형식으로, 부처님 단독으로 그려진 것보다 시기가 앞선다.
1687년(숙종 13)에 능학(能 學), 계호(戒 湖), 최순(崔 順), 처묵(處 默), 인행(印 行), 정인(精 印)의 6명의 화사(畵 師)가 그렸다. 연꽃을 든 보살신(菩 薩 身)에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 百 億 化 身 釋 迦 牟 尼 佛)’의 존명은 주존불이 법신 비로자나삼신불의 화신 석가모니불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장곡사(長 谷 寺) 미륵불괘불탱(1673년 작)처럼 각 존상마다 명칭이 밝혀져 있어 도상학적인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괘불탱은 화신 석가모니불 중심의 삼신불형식으로, 이와같이 연꽃을 든 보살형 불상은 화신 석가모니불, 보신 노사나불, 미륵불로 등장하기 때문에 존명이 없다면 이들의 구별은 쉽지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靑 陽 西 亭 里 九 層 石 塔]
보물 제18호 (1963년 1월 21일)
고려시대석탑, 높이 6m,. 이중으로 된 기단 위에 9층으로 탑신을 쌓았다.
상륜부는 상실되었다.
석탑은 2층의 받침돌 위에 9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층 받침돌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4장의 돌을 조립하여 구성하였다.
이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석탑으로,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운 수작(秀 作)이다. 다만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평박(平 薄)한 느낌을 주며, 9층이라는 층수로 인해 제법 높아 보여 안정감이 없어진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각 세부의 양식이나 수법, 받침돌 안상의 모습으로 보아, 건립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에 건립된 거대한 석탑 가운데, 9층의 층수를 갖춘 희귀한 석탑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청양 칠갑산 장곡사
장곡사(長 谷 寺)는 850년 보조국사 체징(體 澄, 804∼880)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상대웅전의 철조여래좌상의 석조대좌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어 창건 연대를 뒷받침한다. 1777년 두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이후에도 수차례 중수가 있었다.아담하고 수려한 칠갑산 기슭 포근한 경사지에 자리잡은 작은 사찰이지만, 상하 두 개의 대웅전을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가람이다. 상대웅전(上 大 雄 殿), 하대웅전(下 大 雄 殿) 뿐 아니라 철조약사여래좌상 석조대좌(鐵 造 藥 師 如 來 坐 像 石 造 臺 座), 미륵불괘불탱(彌 勒 佛 掛 佛 幀),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대좌(鐵 造 毘 盧 舍 那 佛 坐 像 石 造 臺 座), 금동약사여래좌상(金 銅 藥 師 如 來 坐 像) 등 여섯 점의 국보급 문화재를 가진 유서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이 절은 두 개의 분리된 가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가람은 하대웅전을 중심으로 누각강당인 운학루와 설선당, 명부전이 하나의 마당을 감싸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산중 가람의 구성이다. 하대웅전 옆 계단으로 50m쯤 올라가면 다시 상대웅전이라 불리는 법당과 응진전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두 개 이상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가람들은 상당수 있지만, 장곡사와 같이 두 개의 중심 법당을 모두 대웅전이라 부르는 사찰은 이 곳뿐이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인데, 하대웅전에는 약사불이,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어서 두 법당의 명칭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후대에 일반적인 불전의 대명사로 대웅전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명칭은 아닐 것이다.
= 운학루 (雲鶴樓)
= 장곡사 법고
이 북은 오랜 옛날 장곡사에 있던 한 승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중생을 계도하는 뜻에서 코끼리가죽으로 만들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원래는 호국과 중생을 계도하기 위한 독경을 할 때 사용하던 북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문화원형백과 산사의 소리),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 장곡사 목어
몸체는 길고 날렵한 모양이며 온전한 물고기 형태를 가지고 있다. 꽉 다문 입에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적인 비늘 외에 특이한 장식 없이 늘씬하며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띤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산사의 소리),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건립시기·연도
850년(신라 문성왕 12)
문화재지정번호/지정일
시도유형문화재 제151호 / 1997년 12월 23일
= 장곡사 설선당 [長 谷 寺 說 禪 堂]
17세기 초, 선방으로 지어졌으나 이후 부엌과 승방을 덧붙여 ㄱ자 형태의 요사가 되었다.
장곡사는 850년(신라 문왕 12성) 창건된 절로, 고려 때 밀교적 영향을 받아 번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축소되었다. 이 시기에는 상대웅전·하대웅전을 비롯한 중심부의 전각만 겨우 중수되었다.
설선당은 원래 선방으로 지어졌다가 부엌칸 쪽 2칸은 더 달아내어 요사로서도 아울러 쓰게 하였다. 건립 연대는 하대웅전 건립 시기와 비슷한 17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후일 증축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바뀌기는 했지만, 증축 부분을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조선 후기 요사채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곡사 하 대웅전(靑陽 長谷寺 下 大雄殿)
조선 시대의 불교 건축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1호 지정.
신라 후기 보조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 크게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지형을 따라 위아래에 2개의 대웅전이 있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상·하 대웅전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었는데, 하대웅전은 상대웅전보다 훨씬 낮은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 안쪽에는 상대웅전이 전돌을 깐 것과 달리 마루를 깔았고 불단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
보물 제337호 (1963.01.21.)
시대 : 고려시대
전반적으로 불상의 신체는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으며 넓은 무릎으로 인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1959년 불상 밑바닥을 열고 조사하다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연도를 적은 발원문이 발견되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불상임이 확인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靑 陽 長 谷 寺 上 大 雄 殿]
보물 제162호 (1963년 1월 21일)
상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재건되고 조선 후기에 개건되었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전(塼)을 깔았고, 그 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8판(八 瓣) 연화무늬를 새긴 전이 섞여 있다. (두산백과)
=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靑陽 長谷寺 鐵造藥師如來坐像 및 石造臺座)
국보 제58호 (1962. 12. 20 ) 시대 : 통일신라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 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철불 좌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변란이 일어날 때마다 땀을 흘리는 영험한 불상으로도 소문이 자자하다.
=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靑陽 長谷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및 石造臺座)
보물 제174호 (1963.01.21.)
고려시대 불상으로 크기는 전체 높이 2.26m, 불상 높이 61cm 청양 장곡사의 상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 전체적으로 평범한 얼굴, 빈약한 체형, 허술한 오른쪽 어깨의 처리 등에서 9세기 중엽 비로자나불 양식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과 거의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보인다.
=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長谷寺彌勒佛掛佛幀)
국보 제300호 (1997.09.22.) 시대 : 조선시대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는
미륵불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장곡사에 있는 이 그림은 가로 5.99m, 세로 8.69m로 미륵불을 화면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 여러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미륵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머리에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유난히 긴 팔과 커다란 상체를 가지고 있다. - 이 그림은 조선 현종 14년(1673)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화가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미래불인 미륵을 본존으로 삼고 있지만 그림의 내용은 현세불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것으로 등장인물들과 배치구도가 독특한 작품이며 경전의 내용과도 다른 점이 있어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많은 작품이다.
memo
칠갑산 주병선
콩밭메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 가는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가슴 속을 태웠소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