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금강경의 사구게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등도 마찬가지로 사구게를 살펴봄으로 해서 그 경전에 나타난 사상의 핵심을 공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 경전에 나타난 사구게를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수행상담에 질문해 주신 분께 답변차 쓰는 글입니다. 먼저 금강경 사구게 먼저입니다.
먼저 사구게(四句偈)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금강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지요.
[금강경]에 보면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해석해 보면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受持爲他人說) 그 복덕은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殊勝)하니라."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사구게를 수지하고 타인에서 설명해 주는 공덕에 대하여, 이 공덕은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합니다. 네 글귀로 되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짧은 한 문구 만이라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명해 주라는 말인데 꼭 사구게로 정형화된 틀 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경전에 등장하는 그 어떤 짧은 법문이라도 소중하게 받아지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의 사구게를 살펴보지요. 금강경에는 사구게가 곳곳에 많이 등장하지만 우선 핵심이 되는 네 가지 사구게를 옮겨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凡所有相 皆時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른 상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첫 사구게부터 살펴보면 범소유상,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라고 하면 두두만물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하지요.
바로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 일체 현상계가 상이 아님을 즉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즉견여래한다, 즉 여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탕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인연따라 모든 것을 나툽니다.
나무와 나무를 비빔으로써 불을 얻었다면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분명이 이렇게 불이란 상을 가지고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 범소유상은 다 이처럼 인연따라 잠시 나투고,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뿐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촉할 수 있는 모든 상(相)은 다만 인연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 고정된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범소유상이, 한낮 인연따라 허망하게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바로 보아 정견(正見)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에도, 그 어떤 경계에도, 그 어떤 현상계에도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가며 그 어떤 경계나 현상계가 다가오더라도 다만 인연따라 허망한 경계가 일고 사라질 뿐임을 알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여여하며 성성적적하게 깨어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여부동하여 오고 감이 없는 여래를 볼 것이란 말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바로 깨치면 그대로 부처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 사구게는 말하고 있습니다.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보통 우리가 마음을 일으킬 때는 육근, 안이비설신의, 즉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마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머무른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집착하고 밉다고 집착하여 대상에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덮씌우고는 그 좋고 싫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고정되게 좋고 싫은 대상 하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집착, 방하착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것 또한 대상으로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합니다. 눈귀코혀몸뜻 육근으로 촉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다음 사구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어때요?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이란 다 허망하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생하고 멸할 뿐인 겁니다. 모두가 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이며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잘 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이처럼 금강경의 사구게는 연기, 공, 무집착, 무아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십니까?
그렇게 허무한 것이니까 세상 살 필요도 없고, 다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고, 서러워하고, 욕심부리며 살던 바로 그 괴로움의 대상인 이 현상 세계가 모두 공하여 허망하고 꿈같고, 환영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도 말고, 걸리지 말고 여여하게 시원스럽게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현상세계는 다 허망하여 물거품 같은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이 놈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놈은 누구냐?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 공하고 허망하다는데 그럼 허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 나를 이끌고 가는, 이 허망한 현상계를 이끌고 가는 본래자리, 진면목, 자성불, 불성, 주인공, 한마음 이라 불리는 바로 이 본래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볼 것이란 말은, 이 현상세계 모든 상들을 허망하고 꿈과 같으며 환영과 같고 헛개비와 같다고 바로 관하라는 말이고, 그렇게 현상계의 생멸법을 바로 관했을 때 여래를 본다, 즉 부처가 되고 깨닫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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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르침의 실천법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이지요. 세상 다 허무한 것이니까 다 필요없고, 마음을 일으킬 것도 없다가 아니라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고 살라는 말입니다. 마음 일으키지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집착하지 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요?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허무한 것이고 공한 것이니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허무하고 공하다는 현상계를 잘 관할 수 있어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실천은 힘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때요?
잘 관(觀)하며 살 수 있어야 세상이 다 공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바로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실천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를 보며(見性) 부처(成佛)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함경 사구게- 신심위종자(信心爲種子) 고행위시우(苦行爲時雨) 지혜위리액(智慧爲犁졍) 참괴위심원(慙愧爲心轅) 믿는 마음은 씨앗이 되고 고행은 때 맞춘 비 되고 지혜는 보습과 멍에 되고 참괴는 마음의 진문(陣門)이 되느니라.
이 사구게에서 제시하는 중요한 네가지 덕목은 바로 신심과 고행과 지혜와 참회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불교적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덕목입니다
먼저 부처님 말씀을 의심없이 믿는 신심의 씨앗을 뿌려 수행(고행)을 통해 속세의 번뇌를 끊는 실천행의 물주고 지혜를 갈고 닦아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며 항상 참회정진하여 불도를 이루어야 한다는 불자로서의 기본 네가지 자세에 대한
법화경[法華經] 사구게(四句偈 )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者行道已 來世得作佛 모든 법은 본래부터 오면서 항상 스스로 적멸의 모습이니 수행자가 이런 도道를 수행하면 오는 세상에 성불하리라.
♧ 열반경[涅槃經] 사구게(四句偈)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은 변變한다 곧 생하고 멸하는 법칙이다. 이 생멸이 생멸 아님을 깨달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이리.
♧ 화엄경[華嚴經] 사구게(四句偈)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실종생 무법이불조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낸다.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약인지심행 보조제세간 시인즉견불 요불진실성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어떤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모든 세간을 만들어내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진실성을 아는 것이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삼세 일체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법계의 성품을 보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박기련_사회복지법인 내원 사무처장
불교 교리공부를 하다보면 가장 자주 접하는 용어가 있다. 연기, 무아, 중도, 공이라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랫동안 불교를 공부했다는 사람조차도 이 용어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답을 한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緣起)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연기적 삶이란 무엇인가? 또한 무아(無我)란 무엇이며, 무아(無我), 중도(中道)적 삶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이며, 불교 교리의 핵심인 연기, 무아, 중도, 공(空)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선, 한 가지 정리부터 해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따라서 애매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하며, 쉽다. 아니 쉬워야 한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깨닫기 이전에도 그랬고, 깨달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항상 접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부처님이 고민했던 문제제기, 그 자체가 우리가 항상 일상생활에서 쉽게, 자주 접하는 삶의 문제들이었다. 살고, 죽고, 늙고, 병드는 문제, 사람들이 생활하며 항상 부딪히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그 고민을 해결했다.
부처님은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길에서 사는 그들의 소박한 질문에 답했다. 바르게 답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 언어였으며,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 말씀을 간략하게 간추린 것이 바로 연기, 무아, 공이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 용어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연기, 무아, 공, 중도는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용어로만 다가오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만 생각해보자.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보는 형국을 만들지 말고, 부처님이 가리키신 그 달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라.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관찰해보자.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 배부른 현상이 유지될까? 기껏 세 시간이 지나면 배부르다는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또 귀엽게만 느꼈던 딸의 얼굴은 평생 그 귀여움을 간직할까? 그렇지 않다. 깔끔하게 치워놓았던 방은 하루가 지나면 어지러워져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즉, 고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 ‘무아’나 ‘무상’이라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즉, 무아를 내(我)가 없다(無)라는 의미로 해석해서, 나(我)라는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는데(有), 지금 현재도 숨을 쉬고,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나라는 존재를 없다고 부처님은 가르쳤는가라고 생각하면 무아라는 용어는 영원히 모순점이며 이해하기 어렵다. 그 뜻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나를 비롯해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으며 바로 이런 현상을 우리는 ‘무아’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규정하자. 그러면 무아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아니, 세상의 이치가 바로 그렇다.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는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무상(無常)이라고도 한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아’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되씹어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정말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찰하고 살펴보면 된다. 관찰해보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서 세상은 무아다.
공(空)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흔히 공은 ‘비어 있다’는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하면 공(空)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불교에서의 공(空)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무아라는 용어를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의식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인식하는 그 순간과 미래의 그 존재는 같지 않다. 즉 다르다. 그래서 현재의 관점에서 존재하는 그것은 현재적 의미만 있을 뿐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이고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바로 무아다. 무상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씨줄과 날줄이 되어, 때론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론 결과가 되기도 해서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삶이다. 왜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삶인가. 나에게는 자유를 주고, 남에게도 자유를 주는 삶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만 존재할 수도 없고, 남만 존재할 수도 없다. 나와 남이 함께 존재한다.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나와 남이 따로 없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잠자기 전과 후에 꼭 ‘하루’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점검해보라. 자기 전에는 오늘 내가 한 일을 생각해보라.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냄새 맡은 것, 혀로 한 말 등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을 살펴보라. 깨어나서는 오늘 할 일을 그려봐라. 오랫동안 할 필요는 없다. 3분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그러나 가급적 앉아서 해야 한다. 누워서 하지 말아야 한다. 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대로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면서 생각해보자. 깊고 따뜻한 눈으로 자기를 관찰해 보라.
다른 하나는 밥 먹기 전에 꼭 합장한 후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라. 이 밥을 먹게 된 갖가지 연유와 고마움을 잠깐이라도 가져보라.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줄어들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서로에게 원인과 조건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정진이 관음보살정진이다. 관음보살 정진을 하면서 관세음보살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어떤 가피를 달라고 구하지 말자. 욕심이며, 어리석음이다. 그러지 말고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겠다고 서원을 세워보자. 관음보살의 원력을 내가 실천해 보겠다고 발원해 보자. 그럼 당신은 관세음보살이 된다.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게 된다.
이것이 쉽지 않으면 자기 전과 후에 꼭 자기의 모습을 점검하고 관찰해 보라.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라. 그것이 성냄과 화냄,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화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그것이 불교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착하게 살며 자신을 관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자의 삶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 모든 악(惡)을 짓지 않고, 선(善)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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