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여성성직 10주년 인터뷰
한국인 첫 여성사제 민병옥(카타리나)
2011년 4월 11일 여성성직 10주년을 맞아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여성성직 1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성찬례’가 드려진다.
2001년 4월 25일 부산주교좌교회에서 민병옥 사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올해로 10년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 성직의 효시는 1988년 이정운 부제가 첫 부제 서품을 받은 것으로 시작되지만, 사제 서품은 부산교구에서 민병옥 사제가 처음이다.
첫 서품자 민병옥 사제가 보는 성공회 여성 성직 10년의 변화는 무엇일지 들어봤다.
특히 민병옥 사제는 서품 10주년이 되는 4월 25일 은퇴한다.
* 서품 10주년과 은퇴를 맞이하는 소감은 어떤가?
10년을 돌아보면 첫 번째 여성 사제라는 상징성에 비해 많은 일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문열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그것 외엔 내 업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지금은 많은 여성 사제들이 배출됐고, 내가 못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은퇴라는 말에 솔직히 현실감이 없다.
다른 사회 조직과 달리 교회에서 은퇴란 직분에서 물러난다는 것뿐이지 교회와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책임감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가볍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말한다. 여성 성직자 배출 이후 10년 어떤 점이 변했다고 보는가?
대한성공회 내부에서 여성사제가 논란의 중심에 서고, 10년 동안 사목원에 여학생을 받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은 여성 성직 지원자가 많이 늘고 있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여성 사제도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늘었다.
10년은 외적 성장만으로도 확실히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제가 공식명칭이긴 하지만 성공회 내부에선 여전히 신부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성 사제들에게만큼은 사제라는 명칭을 써주고 있다.
물론 나는 신부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
교회에서도 외부에서도 민 신부라고 불린다.
*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어떤 점이 변해야 어떤 점이 아쉬운 점인가?
정책과 의사 결정 구조엔 여전히 여성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에서의 여성 교우들의 참여가 미흡한 편이다.
많이 개선되고 개선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좀 더 적극적인 개선과 참여가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 사제의 현장 목회 참여는 대단히 부족하다.
교회에서 여성 성직자를 강사로 혹은 목회자로 청하려는 움직임은 아직 부족하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변했지만, 인사에 있어서 공식적이진 않지만, 목회보다 다른 부분에서 여성 성직자가 활동하기를 바라는 면이 있다고 본다.
* 여성 성직자로 느끼는 만족도(?)는 어떤가?
아마 처음 서품을 받고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뭐든 다 할 수 있고, 뭐든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일터라고 해야 할까?
목회 현장에서 부딪치는 힘겨운 일들이 많았다.
교회를 담당해야 한다는 강박감부터 성공회 내부보다 외부에서 부딪히는 시선들이 당혹스럽고 힘들었다.
개신교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지역에서 여성이 목회한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특히 성공회 성직자의 복장은 시선을 끌 만하고, 호의보다는 날이 선 눈초리가 더 많다.
어떤 분은 로만 칼라에 대해 “목에 깁스한거냐”고 말할 정도다.
물론 성공회에 이해 부족이 더 크겠지만, 전체적으로 여성 성직자에 대해 호의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성공회 내부로 들어오면 여성 교우들과 더 편하게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특히 전례적인 면에서 남성 성직자보다 유리한 면이 있다.
성공회 전례는 여성적인 면이 강하고 이런 여성성은 여성 성직자가 준비할 때 더 미적인 예배를 살릴 수 있다.
*호의적이지 않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딱히 언제부터라고 구분 짖기는 어렵지만, 요즘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표현보다 무관심해졌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요즘 교회의 위기, 위기 말하는데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는 생각보다 크다.
사람들은 종교에 더는 관심이 없고, 경제적 풍요와 유흥에만 관심이 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참 많은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때 내가 성직자라는 걸 모르고 만날 때는 사람들과 별 거리감이 없다.
하지만, 내가 성직자라는 것이 드러나면 관계가 참 이상해진다.
아줌마로 사람들과 만날 때 거리가 한순간 멀어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에 다니라고 할까 봐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 지역에서 목회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너무 많은 일을 하나의 통로로 끄집어낸다는 것이 어렵다.
정말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싶다.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위험한 수술을 앞둔 교우를 위해 기도했던 일.
그 아팠던 아이가 지금은 세례도 받고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지금은 시카고로 돌아가 사는 린다 교우에게 할머니들에게 가르치던 한글 솜씨로 함께 성경 공부하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읽고, 소위 콩글리시로 설교하면서 함께 웃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처음 한 가정만 나오는 교회였지만 시트지를 붙이며 함께 실내장식을 하며, 교회를 일궈가던 일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후배 여성 성직자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더 열정적으로 일했으면 한다.
그리고 자기 계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면 좋겠다.
미래 성직자에겐 신학적 소양만 가지고 선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전공 외에 다른 제2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자기 계발은 자신뿐 아니라 교회 성장에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호칭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한다.
영국에서 어머니회 회원 중에는 아버지도 있다.
어머니를 생물학적 성만이 아니라 모성 성에 더 무게를 두고 정서적 어머니를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신부를 꼭 아버지 아닌 부성으로 봐도 좋지 않나 싶다.
물론 다른 많은 이유 때문에 호칭문제에 민감할 수도 있지만, 분리가 아니라 이제 성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은퇴 이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당분간 쉬면서 그동안의 시간을 정리해 볼까 한다.
그동안 해왔던 봉사활동이 이젠 체력적으로 부담이지만, 평일 하루는 꼭 저에게 적합한 봉사활동을 찾아 계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전도도 열심히 해보려 한다.
은퇴하니 오히려 더 용기가 나고 부담이 덜한 것 같다.
이제 오히려 부담 없이 전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문화생활도 하고 싶다.
음악회도 사진전도 미술전시회도 독립영화관도 가고 싶다.
물론 여행은 빼놓을 수 없다.
명동에도 가고 싶다.
30년 동안 서울은 서울주교좌교회와 성공회대학교가 전부인양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은 예루살렘과 터키 성지순례이다.
주님께서 늘 인도해 주셨으니 앞으로도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다.
<성공회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