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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丁酉再亂) 순절묘역(殉節墓域)과 왜덕산(倭德山)
정유재란(丁酉再亂) 순절묘역(殉節墓域)과 왜덕산(倭德山)은 진도군 고군면에 있는 ‘떼무덤’들인데
이들이 각각 다른 곳에 있고 의미도 상반된 묘역인데도 진도가 고향인 많은 향우들이 각각 상반된
유래를 가진 각기 다른 두 곳을 같은 곳으로 오해하고들 있기에 이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고군면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는 [정유재란 순절묘역]에 대해서
공식 기록물이라 할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의 내용을 보자면
◉진도 정유재란 순절묘역
한자 : 珍島 丁酉再亂 殉節墓域
영어 의미역 : Jindo Memorial Monument of the Jeongyu Wars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 유적/능묘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 김정호
[상세정보]
성격 : 분묘
건립시기/연도 1597년
면적 : 50,553㎡
소재지 : 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평산마을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
문화재 지정일 : 2001년 9월 27일
[정의]
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 순절한 진도 군민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
[개설]
정유재란은 진도 울돌목을 중심으로 수군전이 치러진 전쟁이었다. 1597년 9월 15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바로 신안 당사도로 후퇴했기 때문에 진도는 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진도 관군은 군수인 송응일-*송덕일의 오역으로 보임-(宋德馹)이 이끌었고, 명량대첩 때 전사한 진도 사람 중 관군으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조응량 등 8명이다.
[건립경위]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는 이 묘역은 벽파진이나 명량진에서 15리 거리이며, 진도 설군 당시인 1440년대는 토반인 창녕조씨와 김해김씨들에게 하사된 땅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인 1597년경부터 이 묘역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이 묘역의 면적은 50,553㎡이고, 232기의 무덤이 있다. 이 묘역의 많은 봉분 중 창녕 조씨나 김해 김씨 등 진도 토반 씨족 인물들 16기 이외에는 주인 없는 무덤들이다.
진도 군내 사족인 조응량(曺應亮)[선무원종공신], 그의 아들 조명신(曺命新)[선무원종공신], 박헌(朴軒)[병조참판 증직], 김성진(金聲振)[선무원종공신, 남원전투 순직], 김홍립(金弘立) 등의 무덤도 있지만, 나머지는 이름 없이 종군했던 현지 향민들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현황]
진도군은 1995년부터 이곳 묘역을 다듬고 봉분을 손질해 보호하고 있다. 전라남도는 2001년 9월 27일 이 묘역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했다.
이상의 내용이 올려져 있는데 ‘당시 진도 관군은 군수인 송응일(宋德馹)이 이끌었고’라 쓰여 있으나
이는 한문 덕(德)자를 응(㣹)자로 잘못 본 오류인 듯싶은데, 진도군지(2007년)를 보면
98대 진도군수 송덕일(宋德馹)은 1605년 11월부터 1607년 1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나오고,
정작 정유재란 당시에는 92대 이희여(李希呂, 1596년 1월 ~ 1597년 6月)와,
93대 선의문(宣義問, 1597년 7월 ~ 1600년 2월)의 재임 기간으로 나오므로
둘 중에 어느 것이든 틀린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앞서 1591년(선조 24년) 2월에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로 임명되었으니
부임을 했다하면 87대 진도군수가 되었겠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바로 이배(移拜)되어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전라좌수군절제사로 승진 임명되어 비록 정식 부임은 없었다.
하지만 정(情)과 연(緣)을 중시하는 진도 군민들은 그를 대하는 마음이 전임 군수로서의
남다른 마음이었을 것이기에,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있었던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13척의 배로 133(333)척의 적선을 무찌른 명량대첩(鳴梁大捷) 때 왜군과의 싸움에서도
진도 군민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은 여러 사료에서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그러하기에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그럴듯한 말씀을 남기셨지만, 정작 커다란 승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인 진도 백성들 앞에 다시 남겨진 것은 왜군 잔병들과의 힘겨운 전투와 희생뿐이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후 우수영이나 벽파진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다음 날 진도를 빠져나가
17일에 어외도(於外島, 신안)에서 이틀 머문 후 19일 법성포를 거쳐 21일 고군산도(옥구군)로 가서
그해 겨울을 나게되어 빚어진 결과로, 진도인의 후손인 한 사람으로써 드는 마음이란
찰로 짠하고 안타깝고 써운한 감정을 떨칠 수 없으니….
이렇듯 이순신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진도에 상륙한 왜군들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준 주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던 것이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도륙되었는지는 기록상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 당시 희생된 분들을 모신 곳이 이 [정유재란 순절묘역]으로 현재 이곳에 묻힌 분들은 확인된
봉분만 232기인데, 여기에 명량대첩 당시 전사한 진도 출신 장수에 봉분도 있제만
그 중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사람은 1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그 이름조차 알 수 없이 희생된 그야말로 무명의 진도 백성들 무덤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반된 입장의 ‘떼무덤’으로 같은 고군면 내산리에 있는 산보다는 언덕과 같이
야트막한 왜덕산(倭德山)이 있는데 이는 ‘왜인(倭人)들에게 덕(德)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역시 <디지털진도문화대전>의 내용을 보자면
◉왜덕산
한자 : 倭德山
영어음역 : Waedeoksan Mountain
분야 : 지리/자연 지리
유형 : 지명/자연 지명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 김정호
[상세정보]
성격 : 산
높이 : 150m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에 있는 산.
[명칭유래]
‘일본 수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라는 의미에서 왜덕산(倭德山)이라 불리고 있다. 명량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해 수장된 일본 수군(水軍)의 시체 100여 구가 내동리 마을까지 떠내려 오자 주민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덕산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자연환경]
왜덕산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완경사면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왜덕산 너머는 남해와 접해 있다.
[위치와 교통]
진도군 고군면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왜덕산 아래로는 내동리와 마산리가 있다. 내동리에서 이어진 소형 차로가 왜덕산 너머 801번 지방도로까지 연결되어 있다.
[현황]
2006년 8월 15일 왜덕산에 묻힌 일본 수군의 후손들 20여 명이 고군면 내동리를 방문하여 왜덕산을 참배하고 내동리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왜덕산의 수군 장수 묘 앞에는 장수의 영정이 놓여져 있다. 묘지는 개간 과정에서 일부 유실되고 현재는 50여 기가 남아 있다.
이상이 <디지털진도문화대전>에 나오는 공식 기록인데 명량대첩 후에 바닷물에 떠밀려서 흘러온
일본 수군들의 시신을 묻어준 산(왜덕산) 이라는 주장이 나온 증거로는 진도 안의 전주 이씨,
연안 최씨, 경주 이씨의 족보들에 근거한다.
예로부터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와덕밭(瓦德田), 와덕산이라고도 부르며 밤에는 그 앞을 지나가기를
심히 꺼렸었다고 한다. 이 마을 이기수 씨(당시 80세, 2010년 卒)씨는 “어렸을 때(6-7세 때) 어른들이
이곳을 개간하면서 뼈가 많이 나왔는데 옛날 어른들이 '이 뼈는 일본사람 것'이라고 들었으며,
집안 족보에 '증조묘의 묘가 <倭德山 子坐>에 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서 높지도 않은 언덕을
왜 산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나중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이곳 내동마을 바닷가에는 일락(日落)구미라는 지명이 있는데 김정호 전 진도문화원장은
“이곳은 지형상으로 해가 떠오르는 지역인데 ‘해가 떨어지는 곳’이 이해가 안 갔는데
다시 해석하니 ‘일본(日本軍)이 떨어진(落)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과거 일본 에히메현(愛媛県) 출신으로 정유재란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는
본래 일본 규슈(九州) 북부의 세토내해(瀬戸内海)를 거점으로 한 해적의 무리들로,
이들 무라카미(村上) 수군(水軍)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형인 토쿠이 미치유키(得居通幸)와 같이 1592년 3월에 부산으로 출전했고, 그해 6월 율포해전에서
형은 전사를 한다. 그리고 명량대첩 때 37세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도 명량해전에서 전사를
하게 되어 시신의 행방을 모르게 되는데, 그와 함께 명량해협에서 싸웠던 에히메현 출신 무장 6명은
모두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수만 석의 포상을 받고 잘 살았다고 전한다.
왜덕산의 존재가 이들 후손에게 알려진 계기는 2006년 5월 3일 일본 히로시마수도대학(廣島修道大學)
히구마 다께요시(日隈健壬, ひぐまたけよし) 교수가 전 농민신문사 사장 현의송 씨와 함께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 씨의 안내로 왜덕산을 방문해서 일본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에히메현(愛媛県) 이마바라시(今治市)에는 구루시마보존현창회(来島保存顯彰會)에 3
00명의 회원이 있어 그들과 후손들의 방문이 해마다 이어지고 있으며, 2007년에는
내산리 이기수 씨 부부가 구루시마보존현창회의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이 개인 땅이고 문중 땅이라는 이유로 관광안내문을 철거해달라는 행정소송과 함께
벌초도 못 하게 접근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등 땅 소유권자에 적극적인 반대가 있고,
일부에서는 일본 수군들의 시체가 묻혔다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는 소견도 있어서
“만약에 뼈를 DNA 검사라도 해서 일본인들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떡할 것이냐?”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본 수군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くるしま みちふさ)의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역사적 사실성의 부족과 DNA 검사 문제가 언급되었을 때
구루시마보존현창회(来島保存顯彰會) 무라세(村瀬, むらせ) 사무국장은 “시신의 DNA 검사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414년전(당시 2010년 기준) 진도 울둘목(鳴梁)의 바다에서
구루시마 할아버지가 죽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니 그 혼백(유골)은 이곳 진도에 있지 않겠느냐?”
반문하면서 “다시 초청하지 않더라도 왜덕산을 또 찾아 꼭 다시 참배할 것”이라 분명히 말했다고
당시에 통역을 맡았던 진도군청 관광과 용구혜자(瀧口惠子, 본명=たきぐち けいこ) 씨는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해마다 찾아와서 같은 뜻을 전하면서 또 “왜덕산에 세울 탑의 모형까지 세 가지
모습으로 도안해서 진도 군청에서 택하는 모습으로 탑을 세워 기리겠다”는 뜻도 전해왔다고 증언한다.
작년에는 이낙연 전남도지사가 와서 보고 “왜덕산은 개발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했다는 소식도
있었으니 이른 시일 안에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광 진도에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더군다나 과거 침략과 수탈과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진정한 반성을 할 줄 모르는 어제오늘 일본의
행태에 비춰 침략자들인 적군의 시체까지도 거두어 준 우리 선조들에 선한 행동은 역사적인
교훈으로도 선린지간을 위한 디딤돌로도 쓰일 수 있는 소중한 것이기에 이곳 왜덕산의 의미와
존재 가치는 가히 높다고 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성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역사서에 단 한 줄의 기록인 대장금이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한류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었는데, 지리적으로 부근 바다를 떠돌던 시체들은
물길 따라 이곳 물골로 흘러들어오게 되므로 정황상 명량대첩 당시 많은 시체들은 당연히
이곳으로도 떠밀려 왔을 것은 자명하며, 세 문중 족보의 기록과 마을 사람들의 증언도 뒷받침되고,
더군다나 일본수군 후손들이 인정을 하는데도 굳이 극구 반대를 하는 것은 고향의 일을 바라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실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땅 주인들이야 법적으로 보상을 해 주면 될 일인데 역사적 사실의 증명이 미흡하다며 하는 반대라면,
앞서 대장금 이야기처럼 더 꾸미고 더 만들어서도 될 수 있는 일을 앞서 말했듯이 역사적 사실과
정황들이 분명히 뒷받침하는데도 그를 간과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 여긴다.
반대로 생각해서 오랜 세월 동안 개간을 하는 중에 많은 봉분이 훼손되었고 근래에 용수로 배수로
공사 때도 많은 유골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여기에 묻혀있는 100여 구가 넘던 그 많은
시신들이 정유재란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다고 본다면 이에 대해 부정할만한 ‘떼무덤’에 대한
반증은 무엇인지를 그들이 명확하게 아니라는 증명을해주어야 할 것이라 여긴다.
원래는 오해와 혼동들이 있는 각각 다른 두 ‘떼무덤’의 상반된 유래와 소재에 대해 간략하게
전하려 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중언부언 길어졌으나, 우리 진도 선조들에 고귀한 희생으로
만들어진 고군면 도평리의 [정유재란(丁酉再亂) 순절묘역(殉節墓域)]과, 우리 선조들의
선한 자비의 마음이 이뤄낸 고군면 내동리의 [왜덕산(倭德山)]이 주는 교훈들을
우리 진도의 후손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라 믿으며 이만 졸필을 맺는다.
<진도 송현 출신, 진도초등 59회 조병현>
필자의 정유재란 명량대첩과 관련된 지난 글 들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과 의문점의 진실
http://cafe.daum.net/jindo100/O6Rt/93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진도군수???
http://cafe.daum.net/jindo100/O6Rt/119
명량해전 해전지는 양도-학동리 해협이 맞나?
http://cafe.daum.net/jindo100/O6Rt/121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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