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신문 제164호(통권 559호) 포덕162(2021)년 1월 14일
원평 구미란 전투 희생자 추모 및 둘레길 새 단장
지난 12월 21일(음11. 25)은
동학농민혁명 원평 구미란전투 희생자
추모의 날이지만, 코로나로 시국이 위중하여
구미란 무덤을 참배하는 것으로
추모행사를 대신하였다.
운평 구미란전투 농민군무덤 둘레길이
새롭게 단장되고
원평집강소 부지 확장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미란 동학농민군 묘역은
원평 집강소에서 멀지 않지만,
마을 안길을 따라
가파른 길을 걸어 야산에 올라야 했는데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구미란 무덤 둘레길은
계단이 놓이고 길이 다듬어졌으니
구미란 잔등에 모셔진 무덤을 찾지 못해 헤매는 길손이
더는 없을 듯합니다.”는 소감을 밝혔다.
구미란 전투는,
동학군이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뒤
논산 소토산, 전주를 거쳐 후퇴하면서 재기를 꾀할 때
김제 원평 구미란에서 벌어진 전투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원평까지 함께 했지만
3만 명에 달하던 군대는 500명에 지나지 않았고
다시 호남 지역의 동학군들이 모여들어
1만 명으로 늘었다고 하지만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원평의 동학군은 1월 25일(양12.21) 새벽
일본군과 관군의 기습에 무너진다.
관군기록을 37명의 전사했다고 하지만
실제 수많은 동학군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태인으로 후퇴했고,
의암성사는
전봉준 부대와 헤어져 임실에서 해월신사를 만나
충청도 쪽으로 북상하게 된다.
한편, 원평집강소는
백정 동록개의
평등한 세상을 향한 헌신으로 세워진 것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직접민주주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원평집강소는
동록개가 김덕명장군에게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기증한 건물이다.
집강소 건물 천장에는
1994년 발견된 상령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상량문에는 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이라고 적혀 있어
1882년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집강소로 사용된 이후 금산면사무소, 불법연구회 교당,
개인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을 문화재청이 원평집강소의 가치를 인정해
201년에 매입하고,
2015년 12월 4칸의 초가로 복원했다.
집강소 주변엔 원평장터와
원평공용버스터미널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원평장터는 1989년 주민들이 세운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우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