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長安寺).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남아 있다는 절.
그 이름답게 오래토록 남아 있기를 원했으나 홍수와 전쟁의 폭격에 끝내 사라지고,
그림과 사진으로만 남았으니 절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노래도 그렇고...
이은상 작사 / 홍난파 曲
▣
장안사(長安寺)는 강원도 금강산의 내금강 지역에 위치한 사찰이다.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로서,
절경으로 유명한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 건너편에 터가 있다.
내금강에 입구 격인 이곳은 옛부터 명승지로 널리 알려졌고,
조선 시대에는 화가 이정의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림에 등장했다.
6세기에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며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혜공왕 8년인 773년에 진표가 중수했고, 고려 광종 때 불탄 것은 고려 성종 때 다시 중건했다.
고려 출신으로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후원으로 고려 말엽인 14세기에 중창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도 여러차례 중건과 중창을 되풀이하다가,
1842년에는 신정왕후의 아버지인 조만영이,
1863년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중심인 호조판서 김병기가 보시하여 증축한 일이 있다.
장안사는 대웅보전과 서성전을 두 축으로 삼아
양 구역에 비슷한 모양으로 건물이 배치되는 독특한 형식으로 지어졌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에 폭격 피해를 입고 수십 채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대한민국 불교계는 금강산의 명찰인 장안사를 복원하여
유점사와 함께 불교 성지 순례지로 조성하기를 원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1711년 36세의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이병연의 초청을 받고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겸재의 이웃사촌이자 절친이던 사천 이병연이 바로 전 해에 금강산 초입의 김화 현감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이때 정선은 백석(白石)이란 아호의 인물과 동행하며 금강산 일대의 경치를 13폭의 그림에 담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을 완성한다.
여기에 실린 <장안사長安寺>는 같은 도첩에 실려 있는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의 왼쪽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장안사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다.
반원을 그리고 있는 무지개다리와 오른쪽 흰색의 바위 봉우리들이 유독 크게 그려졌다.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위치한 이 사찰을
정선은 멀리 단발령에서 바라보다가 산속으로 접어 들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신선한 현장감을 화면에 그대로 담았다.
오른쪽의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은 마치 수정 같은 흰색의 뾰족한 바위산으로 날카롭게 표현하고,
나무가 우거진 장안사 뒤쪽 흙산은 넉넉하고 풍부한 먹과 선으로 그려냈다.
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굽이치는 금강천의 흐름도 놓치지 않고 묘사하려 했다.
화면 아래에 떡 버티고 있는 아치형의 비홍교(飛虹橋)는 지나칠 만큼 크다.
속세를 벗어나 명산으로 입장하는 이른바 통과제의(通過祭儀)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할 의식]의 관문을 강조하고 싶은 작가의 속내일 것이다.
문인들은 내금강에 입성하자마자 만나게되는 아름다운 돌다리에 찬사를 보내며
'만천교(萬川橋)' 또는 '만천대홍교(萬川大虹橋)'라 불렀다.
그러나 무지개다리는 아쉽게도 1720년경 장맛비에 떠내려갔다.
정선이 금강산을 방문한 1711~1712년에는 건재하던 다리가
불과 10년도 안되어 사라지고 볼품없는 돌다리가 이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정선은 장맛비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이 비홍교를 장안사 그림에는 반드시 그려 넣는다.
1734년의 <금강전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1747년에 완성된 ≪해악전신첩≫에 실린 그림은
아예 화제(畵題)로 <장안사비홍교>라 강조해 두었다.
♤
서울에서 금강산을 가자면 의정포와 포천, 영평을 지나 강원도로 접어들어 김화, 금성을 거쳐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다음 철이현을 넘어 내금강 초입인 장안사에 들어서게 된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모든 시냇물을 한데 모아 나오는 금강천이 빠져나오는 지점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강의 상류가 되는 이 맑고 큰 시내를 건너야만 절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다리를 석조 무지개다리 형식으로 웅장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금강산의 장려함에 필적할 만하게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안사 비홍교는 원래 1680년경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이런 기념비적인 다리를 세운 것인지 상세한 기록은 확인된 바 없다.
겸재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지 3년 후 담헌 이하곤이 금강산을 방문한다.
그가 비홍교를 건너면서 그 장관을 기록해 놓은 <동유록> 기사에 따르면
"그 높이가 삼백 척 가량이라서 올라가 내려다보니 겁나서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드높은 다리에 오르면 동북쪽으로 열립한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 등 빼어난 암봉들이
한눈에 들어와 비로소 금강산에 들어온 느낌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김창협이 지은 <동정부(東征賦)>에는 장안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싯귀가 있다.
화천고을 길게 뻗은 오솔길 따라 [준화천지세노혜 遵和川之細路兮]
장안사란 옛 절을 찾아가 보니 [방장안지구찰 訪長安之舊刹]
웅장한 층층 누각 높기도 하고 [울범궁지증구혜 ?梵宮之增構兮]
찬란한 단층 빛에 눈이 황홀해 [단확찬이목탈 丹?燦以目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