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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계 2:6).
성경에서 교단의 횡포, 교권주의의 횡행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는 구절이 계 2장의 '니콜라파'에 대한 두 구절인데 이 부분은 기존 교단 교회들에서는 거의 묵살되고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교단이 니콜라파의 본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로마 카톨릭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본래대로 해석하지 않고 전혀 상관이 없는 니콜라오라는 사람을 니콜라파의 원흉으로 갖다 붙인다.
그 말이 온 무리를 기쁘게 하니라.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스테판과 빌립, 프로코로, 니카놀, 티몬, 파메나와 유대교로 개종한 안티옥 사람 니콜라오를 뽑아서(행 6:5).
이것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의 이름들이 나오는 구절인데 저 유명한 스테판 집사를 필두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 집사도 보이며 마지막으로 안티옥 사람 니콜라오가 거명된다. 니콜라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이 구절 자체만 가지고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교회 전통이나 전승을 개입시키는 것은 무의미한데 그것은 성경보다 신뢰할 수 없는 부정확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테판과 빌립 집사와 같은 선상에서 거론된 인물들이라면 마땅히 신실한 성도였으리라는 추측은 된다. 개신교 목사들이 주장하듯이 초대 교회의 니콜라오 집사가 이단을 만들어서 니콜라파를 형성했고 그때문에 A.D. 1세기 말에 쓰여진 계시록 당대에도 그 이단 종파의 악명이 여전히 요란했다고 하면 왜 사도행전은 물론이려니와 신약 서신서들 어디에도 니콜라오가 만든 이단에 대한 소식이 전혀 없는가? 내 생각에는 하늘나라에 있을 그 니콜라오 집사는 무척이나 분개하고 억울해하지 않을까 한다. 개신교와 카톨릭 교권주의자들이 자기들의 혐의를 벗기 위해 애먼 니콜라오에게 이단 꼬깔모자를 씌웠으니 말이다.
자, 그러므로 그런 잡소리와 헛소리는 한켠에 치워 두고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역사적 니콜라파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 사상의 시작이 어떠했든간에 오늘날도 우리는 엄연한 니콜라파들을 제도 교회들 곳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어원에 따라 분석하자면 니콜라파는 헬라어에서 두 단어의 조합인데 니카오와 라오스의 결합된 말이다. 그것은 백성을 정복한다, 지배한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이것이 함축한 뜻은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지배하는 계급이 되는 것, 곧 성직자가 특권 계급이 되어서 평신도를 지배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런 사조는 로마 카톨릭의 시작부터 함께 했는데 교황과 추기경들을 필두로 한 상위 성직 계급, 신부들과 부사제 같은 하위 성직자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별볼일 없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태의 계급 집단이 로마 카톨릭이다. 그들은 이런 피라미드 구조의 계급 기독교가 원래의 성경적인 기독교를 대체한 내력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며 초기 교회사가 그들의 거짓 기독교를 합리화시킬 근거를 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해 버린다. 여러분이 각종 케이블 방송이나 역사 채널에서 A.D. 1-3세기 사이의 기독교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면 불과 A.D.1~2세기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로마 카톨릭 형식의 망또를 두르고 머리를 둥글게 깎은 채로 동그란 성채를 가지고 경배하는 모양을 볼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재해석한 수준도 아니라 완전한 허구를 역사로 위조한 것이다. 그런 너절한 카톨릭 짓거리들은 친로마적 기독교를 위조해 낸 콘스탄틴 황제 때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들은 훨씬 시기를 앞당겨 그런 카톨릭 기독교가 처음부터 정통 기독교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카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그리하면 내가 해마다 은 열 세켈과 옷 한 벌과 네 양식을 주리라.” 하니 그 레위인이 들어가더라(판 17:10).
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잠잠하라. 네 손을 네 입에 대고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 제사장이 되느니 이스라엘 한 지파와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하자(판 18:19).
여기 판 17-18장에 일종의 원시 카톨릭 종교 행태가 등장하는데 그 기원은 배교한 단 지파의 이단 종파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종교 지도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방식은 원조가 니므롯, 세미라미스가 창시한 바빌론 신비 종교에서 온 것인데 그들이 종교 지도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카톨릭 교도들이 카톨릭 사제를 "신을 만들어내는 신"(성체성사)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취지이다. 그들의 제사장은 단순한 종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신을 제조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 가증한 종교 행위는 결국 신으로 숭앙받는 제사장을 온통 신격화해서 사람으로서 받을 수 없는 경배 행위가 인간에게 드려지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방 종교의 대제사장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받기에 이른다. 바빌론 신비 종교를 전수받은 근동의 모든 종교 집단들은 이런 종교 방식을 다 계승했으며 특히 로마 카톨릭은 교황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두어서 그가 이 지상에서 하나님으로 경배받도록 만들었다.
또 땅에 있는 사람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라(마 23:9).
그래서 주 예수께서도 땅에 있는 사람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이르셨는데 이것은 일상적인 부자 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교인들이 자기들의 제사장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행을 지적하신 것이다. 단 지파의 이단 교리는 주님 초림 당시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고 실질적으로 당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은 주님께서 경고하신 그 인간 신격화의 관행을 묵인할 뿐 아니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지도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관행이 낳는 부작용은 그 교인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완전히 앗아간다는 것이 가장 크다. 원래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의거해서 어떤 보이는 우상, 형상도 하나님을 대체하기 위한 경배 목적으로 만들면 안 되었다. 비록 그들이 솔로몬 시대 이후 완전히 배교로 떨어져서 그 금기를 깨고 숱한 우상 숭배를 했지만 결국 바빌론 포로 생활을 거친 후에 그 못된 행실을 고치기는 했었다. 그래서 노골적인 이교적 우상 숭배는 뿌리가 거의 뽑혔고, 주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너무나 정통적이고 순수한 신앙인이라 자부한 나머지 2급 시민으로 여겨지는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의 혼합주의 신앙에 대해 침을 뱉고 경멸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유대인들 사이에서 우상 숭배가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인가? 그들은 사람이 만든 우상들은 더 섬기지 않았지만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 자체를 신격화해서 은밀히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니콜라파적 전통과 결부된 제도 교회(장로교)에서 출발했기에 성경이 미워하는 "니콜라파의 교리" 곧 목사 숭배 사상이 만연해 있는 편이다. 목사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분이요, 계급이 되어서 신약 성경이 모든 목사들을 존경하고 수용하라고 한 적이 없으며 잘 가르치고 성경대로 하는 목사만 인정해 주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기준이 무시되고 있다. 일단 대형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라고 하면, 더구나 그가 영미권의 유수 신학교를 졸업한 유학파라고 하면 그가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지, 어떤 마귀의 거짓 교리를 배워서 누룩을 퍼뜨리는 무후천년주의자이건, 은사주의건 간에 일단 존경을 받는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를 그저 두려워해야 되는 줄로 알아서 거짓 교리 가르치는 목사도 '주의 종, 주의 종'이라 부르면서 숙이려 한다. 이것이 바로 니콜라파의 악습인 것이며 한국의 원래 지배적 종교였던 불교와 유교 안에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다. 사실 더 넓게 보자면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 안에 니콜라파 사상은 다 들어가 있다. 다만 로마 카톨릭이 가장 뻔뻔하고 현저하게 그 교권주의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고 개신교를 포함한 여타 종교들은 조금씩 암암리에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하고 신중하며, 예의 바르고 대접하기에 힘쓰며, 가르치기를 잘하고(딤전 3:2).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장로교회의 장로들이 아니라 목사들을 말한다. 목사가 곧 장로와 같은 직분이기 때문에 목사들은 자기가 가진 그 직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치는 실력과 신실함과 크리스찬 인격을 형성해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따르도록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들 가운데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사람들"보다는 교회 건축을 위해 헌신되어 있고 비성경적 교단의 눈치와 견제를 받으면서 바른 성경과 바른 진리를 굽혀서 거짓으로 가르치는 목사들이 더 다수가 아닐까 한다. 그런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직이 인정되지 않는 무자격자들인데 교단에 의해 안수를 받고 소정의 신학 과정을 통과한 이유 때문에 목사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니콜라파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숨쉬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하고 그들을 소위 교단이라는 조직 아래 끌어다 놓고 굴복시켜서 자기들에게 순종하게 만들려 한다.
이는 거짓 형제들이 몰래 들어온 까닭이라.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비밀리에 들어와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함이더라(갈 2:4).
그들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자기들의 교권주의적 야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데 카톨릭도 처음부터 교황과 사제들에게 무소불위의 권세를 주지는 않았다가 차츰 신격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었던 초대 교회 안에 비밀리에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고 기존 종교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다음 회유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광야로 나갔던 출애굽 당시의 혼혈 백성과 같은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녀들에게 주시는 자유가 그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뼛속 깊이 마귀에게 종노릇 하던 시절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않고 간직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안에서의 자유를 미워하고 마귀의 종 노릇 하며 종교인 생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의 노예가 되면 그 그리스도인은 매우 비참해지는데 그 니콜라파 사기꾼들은 사람들을 혹사시키면서 종교 행위에 매진하게 만들 뿐 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
거듭난 후에 성도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모든 헌신, 종교 행위들은 순전히 내면의 거룩한 욕구에 따른 자발적 행위여야 한다. 경배드리는 것조차 의무나 형식적인 것이어선 안 되고 진정성이 뒷받침되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니콜라파는 성도의 삶에서 자발적인 행위들, 자원하는 마음과 신앙 표현들을 모두 삭제시켜 버린다. 그들은 성도의 자유로운 기도 대신 "기도문"을 갖고 나와서 암송하도록 시킨다. 이를테면 주기도문이라는 형태로 뜻도 모르고 특정 기도를 반복하게 훈련시키는 것 따위가 그렇다. 또 사도신경 암송은 어떠한가? 그 니콜라파들이 무슨 이유를 대면서 합리화시키더라도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런 식으로 암송하고 훈련해서 기도문을 암송하고 신조를 되뇌이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을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영적 양식은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파의 종교는 얼마나 비참하고 지치고 고통스러운 종교 생활의 연속이 되어서 그 기독교인의 삶을 옥죄이게 만드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가장 흔히 접하는, 자주 보고 듣는 기독교는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 아닌 니콜라파의 종교 행위이다. 많은 세상 죄인들은 기독교를 믿게 되면 육신의 욕구는 그때부터 다 포기하고 수도승이나 수녀처럼 살아야 그것이 기독교인의 정석인 줄로 안다. 그러다 보니 구원을 받고 지옥에 안 가는 것이 시급하다는 권유를 받아도 "나는 테레사 수녀처럼, 이태석 신부처럼 살 자신이 없어"라는 명분으로 복음을 내쳐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토마스 아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와 같은 개념의 기독교, 즉 수련과 달관과 사막 성자들의 금욕 생활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야말로 니콜라파를 양산해 낸 거짓 기독교이고 반성경적 위선임에도 카톨릭이 기독교로 오인되는 현 세상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가짜들이 진짜로 받아들여진다.
니콜라파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방해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께서는 그 이단 사상을 미워하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사람들에게 천국을 닫아 버려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마 23:13).
니콜라파의 문제는 자기들 스스로도 지옥을 향하고 있는 마귀의 자식들이면서 남들에게 건방진 충고나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발밑에 어떤 불길이 기다리는지 모르는 영적 머저리들이기에 자기만 지옥에 갈 뿐 아니라 추종자들까지 끌고 불 속으로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종교 체제에 소속된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성이 니콜라파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가 된다. 하나님께 미움을 받으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제도 기독교인이 될 것인지, 하나님께 사랑받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분리주의자, 독선주의"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신앙 생활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체면을 따지고 사회와 조화되기를 원하는 마음 약한 교인들은 그들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도 교회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 교회와 교단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여 그 집단을 선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별이라는 것은 그게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원리다. 개인이 집단을 교정할 수는 없으며 특별히 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진 개인이 노력해서 비성경적인 회중 전체를 고칠 수가 없다. 마틴 루터는 카톨릭을 개혁할 수 없었기에 거기서 분리해 나와야 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시느니라.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고 하시더라(눅 16:15).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측면과 비성경적 교단 교회에서 분리해 나오는 것과는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로 불러 쓰시는지에 따라서 유흥가로 가서 거리 설교할 수도 있고 마약중독자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도가 개와 돼지들, 이를테면 거듭나지 않은 카톨릭 무리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연합 예배로 경배드릴 권리는 없다. 그런 짓들은 오늘날 에큐메니칼, 기독교 화해와 일치, 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흔히 자행되고 있고, 이를테면 신부, 중, 목사가 함께 열린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뻐 받으시는 경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면상에 흙 묻은 발로 발길질을 하는 행위이지 경배 행위가 아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계 2:6).
이것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이 그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구절이다. 에베소 교회에서 발생한 일들, 유행했던 풍조는 다른 교회들에도 마찬가지로 퍼져 있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교회 시대 2천년의 전반에 걸쳐서 니콜라파는 모든 기독교 종파들 안에 활동하고 있었다.
"이기는 자"는 갑작스레 등장한 말씀인데 이것은 이긴 자, 이기는 자에 대한 차이점과 그 교리적 의미를 이해해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것을 이제 중점 다루어 볼 것인데 사실 계시록 교리의 상당 부분이 "이기는 자"와 연관되어 있고 이것은 태풍의 핵과 같은 중요 교리이다. 이 부분을 왜곡한 결과 신천지를 비롯 수많은 유사 기독교 종파들이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자기들 집단에 대한 맹종을 추종자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기는 자"는 계 2-3장에서 여섯 번, 계 21장에서 한 번 등장하는 표현인데 롬 8:37, 요일 5:5에서도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신서의 그 두 구절은 계시록의 "이기는 자"와는 개념이 좀 다른 이기는 자들로서 구별이 된다. 즉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라 할때 그 말씀은 서신서와 분리된 계시록적인 별도의 교리를 내포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전체 구절을 살펴보면서 세밀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자들보다 더 나으니라(롬 8:37).
위 본문에서 "이기는 자들"은 영어 킹제임스에서는 conqueror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정복자들"이라 말할 수도 있는 단어이다. 정복자들은 광개토 대왕이나 샤를마뉴 대제, 알렉산더 대왕처럼 부지런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영토 확장에 평생을 쓰는 군주들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들 그리스도인이 알렉산더 같이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군주, 또는 징기스칸과 같이 세계 정복을 거의 이룬 왕, 또는 나폴레옹 같이 유럽을 통합한 황제, 그런 자들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롬 8:37의 "이기는 자들"은 계 2:6의 "이기는 자"와 맥락이 완전히 틀린 대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요일 5:4-5에서 말씀하는 "이기는 자"는 계 2:6과 보다 직접적 연관성을 가진 용례라 보이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자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구원과 관련된 "이김"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겨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은 없는 것이다"라는 Lordship salvation 이단 교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오인될 수도 있어서 내가 지적을 한다.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고전 3:3).
고전 3:3에 언급된 그러한 크리스찬들은 확실히 세상에 패하는 자들로서 요일 5:4-5의 교리와 상충되는 존재들로 여겨진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의 고등 방정식을 풀 실력이 안 되기 때문에 육신적 크리스찬들은 원래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라고 하던지 선택받지 않은 자들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육신적으로 살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그는 마귀와 세상, 육신에 패배당하여 종살이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나 자기들 자신은 타락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정복을 당하면 그는 정복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이라(벧후 2:19).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읽는 사람은 이런 데서 자신의 진가와 실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는 교리적으로 대환란의 특정한 시대적 말씀들을 다수 담고 있는 서신서이고 그래서 바울 서신서와 다른 시대적 경륜을 반영한 내용이 많다. 행위구원론자들을 주로 실족시키는 책은 히브리서, 야고보서이지만 그보다는 적을지라도 일부 사람들은 요한일서를 읽다가 행위 구원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육신적 크리스찬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한" 요한일서의 구절들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요한일서의 "이기는 자"는 이 시대의 크리스찬이 지향해야 되는 이상적 성도의 모습이지만 거듭난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멋진 삶을 살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것이 "진행형"으로서 이기는 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 자체가 "끝까지 견딤으로써 구원을 이루라"는 대환란 교리와 접목되는 지점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10:22).
끝까지 견딘다는 말은 한끝 바꾸면 이기는 자와 같은 뜻이 되는데 둘 다 구원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닌 일정 과정을 통과하면서 시험을 받아야 완성된다는 과정으로서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시대인 지금 크리스찬들이 혼의 구원을 받는 그 거듭남과는 다른 시대의 교리이며 대환란 때 사람들이 구원 받는 방식이 이런 것이다.
계시록의 나머지 구절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어차피 볼 내용들이기 때문에 그때 설명하기로 하겠는데 어쨌건 내가 강조하는 부분은 "이기는 자"는 진행형이고 진행형이란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이루는 소위 알미니안식 구원을 말한다. 알미니안은 교회 시대인 지금의 구원론에서 보자면 거짓 교리요 이단 사상이지만 대환란 시대에 들어가면 그때는 구원의 보장이 없고 배교하면 상실할 수 있는 진행형 구원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시더라(요 16:33).
그리스도인이 현 세상에서 믿음을 통해 얻는 모든 승리의 원천은 갈보리 십자가에 있는데 예수께서 승리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거듭난 사람은 육신과 세상과 싸울 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십자가의 승리를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구절의 귀결 부분으로 가서 6절을 마저 해석해 보겠는데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한 교리인 생명 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계 22:14).
생명 나무는 누군가에게 육체적인 영생을 주는 존재인데 그 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낙원으로 가서 생명 나무 열매를 취하여 먹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서 거듭나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생명 나무는 상관이 있는 게 아니다.
주님께서 2천 년 동안 육체를 벗어나서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새 몸을 주실 때, 즉 공중 재림과 환란전 휴거가 있는 그 때에 생명 나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부활의 선두 주자가 되신 방식이 어떤 나무 열매를 먹는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고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생명 나무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일곱 교회가 어떤 교리적 대상인지에 대해 계속 탐구하고 있는데 이전 글에서 나는 일곱 교회는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의 우리들에 대한 예표가 아닌 7년 환란 때의 환란 교회들이요, 그들의 지역 교회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렇게 해석을 하는 분명한 이유가 본 구절에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우리의 교리로 삼아서 생명 나무에 참여하는 식으로 구원론을 만들게 되면 결국 그것은 십자가 외에 하늘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만이 유일하게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이요 그 어떤 나무 열매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대환란 때의 사람들에게는 왜 생명 나무라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해지는 것인가, 그들에게 결핍된 것이 뭔가 있어서 그렇지 않겠는가? 환란 시대에도 지금처럼 거저 구원받고 거저 몸의 부활을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생명 나무가 필요할 일이 없을테니 말이다.
그때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흰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기에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으며 그의 성전에서 그를 밤낮 섬기고,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라.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못할 것이라(계 7:13~16).
"굶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아니하고 열기가 내리쬐지 못한다"는 말씀에 유의하여 보시기 바란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 내용인데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며 영원한 복락을 주신다는 일반적 축복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설령 열기를 쬘지라도 죽거나 상하지 않는 불멸불사의 육체, 즉 예수님과 같은 능력의 몸을 장차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할 부활의 몸은 쇳덩이를 녹이는 용광로에 들어가도 타거나 녹아내리지 않는 거의 금강불괴급의 초인적 몸이다. 그 예를 구약에서 찾아 보도록 하자.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보라, 내가 보니, 네 사람이 풀려서 불 가운데서 걸어다니고 있는데, 그들이 다치지도 않았으며, 그 넷째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단 3:25).
여기서 느부캇넷살이 본 넷째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의 아들'(구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천사적 현현)이었는데 주의 천사로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사람과 같은 모양이면서 불에 타지 않는 능력을 그 용광로 불 속에서 시현해 주신 것이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놀라운 능력의 부활체를 선보이셨는데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할 수 있고 셋째 하늘과 지상을 순식간에 오고갈 수 있으며 먹거나 마실 필요 없으며 잠을 잘 필요도 없는 불멸의 몸이면서 원하기만 한다면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실 수도 있는 그런 몸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우리가 가질 불멸의 몸 덕분에 장차 온 세상을 태워버릴 천년왕국 끝의 우주적 수소폭발(깊음의 물이 분해되면서 우주를 용해시켜 버린다)로부터도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10).
이런 날이 올텐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적 불사름의 날인 그 날 어떤 은신처나 방공호에 숨어 엎드려 있을 필요가 없다. 우주의 구성 요소들을 태워버리는 맹렬한 우주적 핵폭발도 그리스도인의 부활체에 대해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혜택을 입은 처지이지만 아까 계 7:13-16에 언급된 바 저 사람들, 즉 환란 시대에 구원을 얻을 그들은 우리와 몸의 체질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여타 아담의 자손들과 동일하게 상하거나 죽을 수 있는 흙의 몸을 갖고 부활한 채 천년왕국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백보좌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벧후 3:10의 사태를 피해서 먼저 어디론가 옮겨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 가장 안전한 지점은 다른 곳이 아닌 셋째 하늘 낙원, 하늘나라가 될텐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천년왕국 끝에 신실한 이방인들, 왕들과 제사장들인 환란 성도들을 휴거시키실 것이라 나는 보고 있다.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계 20:7-9).
물론 계 20:7-9 사이에 어떤 휴거 장면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내가 그것을 유추한 것은 계 7:13-16에 근거한 것이다. 환란 때 목베임을 당할 그 환란 성도들은 몸이 부활하여 왕과 제사장들로서 천년왕국에서 민족들을 다스리며 살겠지만 그 천년 끝에 있을 재앙, 사탄의 큰 반란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완전한 육체적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이 지나서 과정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낙원에 숨겨져 있는 생명 나무에 참여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계 22:14).
결국 천년왕국을 통과하여 배교에 참여하지 않은 결과, 성공적으로 영원 시대에 안착한 열두 민족들이나 7년 환란 시대에 순교하여 천년왕국 때 부활, 통치에 참여한 그 환란 성도들이나 우리와 대등한 불멸불사의 몸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사의 몸을 주는 직접적 수단이 "생명 나무"라는 것을 계 22:2, 14은 증명한다.
생명 나무에 대해서는 이후에 마주치는 다른 관련 구절들을 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여기까지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스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처음과 마지막이요, 죽었으나 살아 계신 분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계 2:8).
스머나는 몰약이란 뜻의 단어인데 이 시대가 수많은 순교들로 점철된 시대이기 때문에 몰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A.D.100~300년경까지 교회는 10차례의 로마 제국 대박해들을 통과해야 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물질적으로 가장 빈궁했으며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환란 때에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형상 숭배를 거부한 자들이 산과 들로 쫓겨다니며 거지꼴이 되는 것과 유사하게 그리스도인들은 10차례 박해 당시 토굴에 숨고 산과 들을 헤매어 다니며 믿음을 유지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잔혹한 조롱과 채찍질의 시련도 받았고, 더욱이 결박당하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돌로 맞고, 톱으로 켜지고, 시험을 당하고, 칼로 살해되었으며, 양의 가죽과 염소의 가죽을 쓴 채 유리하며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당했느니라. (세상은 그들이 살 만한 데가 못 되었으므로) 그들은 광야와 산속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이 시대에 순교했던 수많은 무명의 크리스찬들 중에 극히 일부는 바른 교회사, 즉 피터 럭크만의 신약 교회사나 폭스의 순교사에 이름과 순교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교회 시대 가운데서 가장 불쌍하게 핍박을 받은 성도들의 시대로 여겨지는 로마 박해 시절은 사실은 면류관 수상자들과 천년왕국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 속출해 등장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 헐리우드에서 주는 아카데미 상이나 대중음악의 에미 상 같은 상들은 세상 사람들의 쾌락과 여흥을 고조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어릿광대들에게 주는 것이지만 스머나 시대의 크리스찬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사망의 향기를, 그리스도께는 생명의 향기를 내면서 한 알의 썩는 밀알로서 사명을 다한 진정한 성도들이었다.
내가 너의 행위와 환란과 궁핍을 아노라.(오히려 네가 부요한 자로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계 2:9).
우리는 교회시대의 로마 박해, 그 스머나 교회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대환란 그 자체인 앞으로 등장할 스머나 교회가 통과할 박해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고 이 구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로마 제국 시절의 박해는 가혹하고 무자비했을지라도 온 세상에 걸쳐서 자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망치거나 숨거나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들로부터 조력도 얻을 수 있었지만 대환란 때에는 빈 구멍이 거의 사라지고 형장의 이슬만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기독교 박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카톨릭의 광신적 박해 아래 살았던 침례교도들은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이제 광명이 오고 좋은 세상이 오는 줄 알고 기뻐했지만 알고보니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종교개혁자들은 자기들의 모교회인 카톨릭이 자행한 이단 사냥의 잔혹한 방식을 거의 답습해서 써먹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찾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유럽에 진저리를 치고 멀리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갔고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하여 청교도가 미국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지만 미국의 주축 기독교는 청교도가 아닌 침례교가 되었다.
한때 궁핍했었고 산과 들과 호수를 유리하면서 카톨릭 및 개신교 군대의 칼날을 피해 다니던 그 불쌍한 유럽 침례교도의 후손들이 미국에 가서 나라를 형성하니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번영을 구가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원시 기독교 조상인 고대 로마 스머나 시대의 참 크리스찬들의 고생과 고난을 기억한다면 믿음의 초심을 잃지 않았겠지만 이미 미국 기독교는 라오디케아의 미지근함 속에 침잠해서 성장력과 활동성을 잠식당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가장 물질적으로 번성한 라오디케아에 대해서는 가난하고 헐벗었다 지적하시지만 스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부요한 자"라 칭하신다. 즉 여기서 말씀하는 부요라는 것은 "궁핍"이라는 단어의 그 문자적 가난과 대척을 이루는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천년왕국에서 누리게 될 가득한 영광을 내다보시면서 그들의 면류관들에 대해 부요하다고 칭찬하신 것이다.
"자칭 유대인"은 그렇다면 누구인지에 대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구절을 참고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단 종파들, 즉 앞서 이야기한 니콜라파라던지 자칭 유대인,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 발라암의 교리, 이런 것들은 그 각각이 이단 사상이기도 하지만 서로 통하는 제휴 관계에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은 회색 지대라는 게 존재하면서, 또는 악한 마귀, 선한 마귀가 공존하면서 백마법, 흑마법도 작동하는 제3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현 세상은 명확히 영적인 두 진영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마귀의 편, 혹은 하나님의 편, 그것밖에는 없다. 이슬람교는 카톨릭이 만들었고 카톨릭은 바빌론 신비 종교에서 나왔다. 그래서 카톨릭과 이슬람은 둘 다 성자 숭배, 천사 숭배를 하고 있고 심지어 여신 숭배, 곧 하늘 여왕인 마리아 숭배도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종교 모두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미신적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들의 사제들과 이맘들은 평신도들 위에서 지배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아버지 행세를 하고 있다.
그래서 "자칭 유대인"의 등장 배경은 앞서 언급된 바 "니콜라파"와 엄연한 상관 관계를 갖는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물론 그러했던 것이다.
카톨릭의 역사, 그 시스템은 이 두 교리가 어떻게 기독교 안에 유입되어 누룩을 꽃 피웠는지 잘 보여준다. 처음 니콜라파 사상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신실하고 성경적 지식이 밝은 초기 교회 크리스찬들에게 녹록하게 받아들여졌을리는 만무하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바울이 증거했듯이 철저히 거짓 형제들로 규명해서 스스로 구약식 제사장 행세하는 가짜 교인들을 회중 가운데서 쫓아내 버렸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듯이 썩은 니콜라 사상을 가진 자들이 교회 안에 늘어나고 그들의 동조자들이 교계의 유력자들이 되면서 드디어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이르자 교계의 상황이 이전과 판이하게 뒤집어져 버렸다. 니콜라파가 전반적으로 교회들을 주무르고 있었고 그들은 이제 황제로부터 새로운 "제국 기독교의 창건"을 위임받아 기존의 기독교 형태를 엎어 버리고 새로운 바빌론 기독교를 만들려 시도한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교부 오리겐의 썩어빠진 변개된 역본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변개된 성경과 함께 수도승, 수녀, 성상, 성화, 묵주, 연옥, 고해성사, 성체성사 같은 카톨릭의 토 나오는 거짓 교리들을 수용해서 전 제국으로 누룩을 확산시켰다.
기본적으로 카톨릭의 시스템은 구약 유대교를 열악하게 카피하여 짝퉁 제사장 종교를 형성한 체제이다. 그들의 종교 시스템 안에서 교황과 사제들은 구약 대제사장, 제사장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들은 구약식 성전 개념 또한 건물 교회에 그대로 도입해서 성 베드로 성당을 솔로몬 성전처럼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자들이 곧 "자칭 유대인"인데 그들의 신학은 유대인들이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이제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유대인의 자리를 대체한다는 소위 "대체 신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가 그대로 물려받아서 "무천년주의"라는 이름으로 거짓 종말론에 적용해서 써먹고 있기도 하다.
물론 카톨릭이나 개신교 지도층이 자신들을 "자칭 유대인"이라고 문자 그대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들은 유대인이 끝났고 교회가 그것을 대체했다고 말하지 자기들 스스로가 열두 지파의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이단 종파들 가운데 진짜로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믿어 버린 자들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몰몬교 창시자 죠셉 스미스가 그런 정신병자 중에 한 명인데 몰몬교도들은 자기들이 아메리카에 이주한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믿는 집단 착란증에 걸려 있다. 영국에는 "영국 이스라엘"이라는 또 다른 종교적 정신병에 걸린 환우들이 있는데 그들도 역시 증명될 수 없는 아더왕과 성배에 얽힌 전설적인 이유를 들어 자기들이 유대인 후손으로서 다윗 왕권을 가졌다는 헛소리를 한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신천지라는 집단이 자칭 유대인으로서 망상을 떠들고 있다. "유대인은 끝장났다"라는 또 다른 비성경적 확신을 가진 개신교나 카톨릭에 의해 신천지 등이 이단 종파로 지목은 되고 있으나 사실은 개신교, 카톨릭, 신천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 등 유대인에 대해 엉터리 개념을 갖고 있는 그 자들 전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초록이 동색으로서 똑 같은 자칭 유대인 교리에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이다.
즉, 개신교는 자기들이 유대인의 지위를 빼앗아 버린 다음 시치미 뚝 떼는 자들이고 그들은 그 뻔뻔한 수법을 카톨릭 신부들과 교황에게서 배워 온 것이다. 여타 자잘한 군소 이단들, 유사 기독교들, 곧 신천지 같은 집단들은 개신교에게서 자칭 유대인 행실을 배워서 더 대놓고, 노골적으로 잘 써먹고 있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유대인'이라 할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자손으로서 혈통적 유대인을 말한다. 둘째는 혈통적 유대인은 아니고 혼혈 유대인이거나 심지어 완전한 이방인이지만 그 사람이 유대인의 종교, 곧 여호와 신앙과 율법을 받아들이고 개종했다면 그를 유대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개종자'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유대인들은 신앙 중심으로 모여진 공동체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혈통적 유대인과 개종자 유대인을 지금은 엄격히 차별하지 않는다. 과거 초림 때에는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 집단에 대해 배타적으로 굴긴 했었으나 1900년 동안 유대인 집단 전체가 이방에 흩어져 디아스포라 상태를 겪으면서 이제 누가 혼혈이고 혼혈이 아닌지 따지기도 민망한 상태가 되었기에 지금은 사마리아인 차별하듯이 개종자들에 대해 차별하는 것은 없어진 것이다.
성경에서 유대교 개종자의 유력한 사례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유명 인사는 다름 아닌 룻기의 주인공 룻이다. 그녀는 모압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와 혼인하였다가 사별한 처지로 남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온다.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룻기의 문맥상 그 당시에도 모압 여인이 유대인의 고장에 사는 것에 대해 차별과 멸시의 눈길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시대에나 주류 집단이 소수자들에 대해 차별하는 것은 나타난다. 어쨌건 유대인들은 이제 혈통도 혈통이지만 그것보다 동일한 신앙 중심으로 뭉친 다민족 공동체 비슷한 형태로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해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들 가운데는 백인도 황인도 심지어 흑인 유대인도 있지만 그들은 구약 성경을 믿는다는 공통 분모로 인해 한 민족이라는 인식 하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카톨릭은 "자칭 유대인"의 대표 주자인데 그 자들이 학계를 통해 유포한 유대인 관련 악성 루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카자르 유대인설'이라는 루머인데 그 골자만 지적하자면 현존하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혈통적으로 아랍인이거나 슬라브인이고 진짜 유대인은 몇 퍼센트도 되지 않는 극소수라는 이야기이다. 그 가설을 믿는 자들은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도 유대인이 아닌 카자르 유대인, 즉 가짜 유대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라고 폄하한다. 그 이야기의 논조에 따르자면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은 성경 예언의 성취가 아니고 이스라엘은 성경의 유대인들과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의 나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터무니없는 비방이요 헛소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20세기 초부터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사용하신 초자연적 역사들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건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이고 본토 귀환한 유대인들이 주변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중 하나였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 조그만 귀퉁이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워 강대한 아랍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가? 유대인들이 탈무드라는 지혜의 책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은 탈무드가 성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2천 년 동안 전세계에서 쓰레기 같은 족속, 저주받은 백성으로 배척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하는 막가파 행보를 해 왔다. 그래서 그 막가파 인생의 지혜가 결국 탈무드인 것인데 탈무드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종교적 파시즘 교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버려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유대교를 통한 세계 정복 같은 쓰레기 같은 생각에 빠져 1900년 넘게 살아 온 것이다.
유대인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분은 그들을 일찌기 이집트에서 불러내셔서 민족을 이루신 하나님밖에는 없다.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그 나라의 육적 회복 이상으로 중요한데 하나님의 자존심과 그 분의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버림받았고 끝났다고 믿는 자들은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방구석 신학자들이고 그들은 유대인의 처절한 역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착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회당"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형태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등장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종교적 구심점이 부재한 상태에서 포로되어 간 그 유대인들은 임시방편의 종교 모임이 필요했다. 그래서 거기서 회당이라는 시스템이 출발되었고 성전이 재건된 이후에도 일종 종교 관행이 되어서 계속 회당 중심적 신앙이 이어졌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은 우리들 크리스찬이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교회당의 개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우선, 같은 점은 무엇인가 하면 회당에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제단과 제물 드리는 관련 시설이 없다. 회당에서는 설교, 경배, 찬양 같은 예배가 치뤄지고 그것은 교회당이 갖는 기능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는데 회당은 구약 성전을 일시 대체하기 위한 방편 형태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회당에 참여하지 않고 회당은 그런 사람들을 거부해 왔다. 신약 시대 동안 줄곧 그러했고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의 회당은 메시야닉 쥬들의 모임으로 발전하여 거의 교회화 되는 일부 회당들이 있을지라도 대다수는 반기독교적 회당이다.
그러면 "사탄의 회당"은 대체 어떤 식의 회당을 일컫는 말인가? 사탄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이지만 사탄의 회당은 무슨 종교나 종교 단체를 지칭하는 말인가? 우리가 교회사적 해석을 통해서 이런 저런 유사 기독교 집단에 대해 이것을 적용해 볼 수 있겠고 특히 로마 카톨릭에 대해 적용하고 싶어지는 말이 사탄의 회당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답이니까 한번 의심하고 다른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마음속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함께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땅에 있는 하나님의 회당들을 모두 불살랐나이다(시 74:8).
우선 사탄의 회당과 상극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회당"에 대한 구절부터 볼 필요가 있겠는데 성경에서 최초로 시나고그라는 회당이 등장하는 구절은 신약이 아닌 구약의 시편이다. 시편이 기록된 당시에는 회당이라는 게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여기서 말씀한 하나님의 회당들은 예언적인 언급이라 봐야 한다.
지금 유대인들이 종교 행위를 위해 모이는 회당은 그저 유대교 회당이고 하나님께서 그 경배를 받으시는 영과 진리의 경배 처소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요 4:24).
영(성령)과 진리(성경)를 제쳐 둔채 유대인의 종교 관습을 실행하는 현재의 회당들은 시 74:8에서 말씀한 바 하나님의 회당들이라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시 74편 전체는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나서 그 땅에서 행하는 각종 행패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는 부분이다. 그 와중에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회당들을 74:8에서 파괴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질적인 유대인 회당들을 말하지 이방인들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위에서 말했듯이 회당은 교회와 일견 유사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쩌다 교회라 불리는 구절도 있는 것이다(행 7:38).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방인들이 모이는 신약 교회를 회당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회당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의 모임이지 이방인 교회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사탄의 회당"이라 할 경우에도 이 회당은 뭔가 영적으로 잘못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지 타락한 이방 교회, 이를테면 카톨릭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과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회당들이라 불릴 만한 바른 신앙심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찾는 때가 언제 오게 될까, 바로 환란이 시작되면서 그런 영적 회복의 조짐들이 보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교회 시대 동안 성전이 없이 쭉 지내 왔었지만 신약 교회가 환란전 휴거를 통해 하늘로 사라지면 그들은 그동안 못 짓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 건립의 계기를 거기서 잡게 되는 것이다. 성전을 짓는 데 어느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제대로 정식으로 건축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더라(단 9:27).
위 구절을 통해 추측할 수 있기로는 7년 환란의 전3년 기간 동안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재건된 성전에서 이미 희생제와 예물을 드리고 있는 상황이고 그러다 7년의 중간이 도래했을 때 금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 또한 그 동안 이 구절을 그리 독해하고 있었지만 성전 재건 문제가 생각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라서 그 추측이 한번 되짚어 볼 필요성이 있는 허점이 있다고 느낀다. 성전은 하루 아침에 세워 올려지는 것이 아니며 서둘지라도 2-3년은 족히 걸리는 대역사가 될 것이다. 일반 교회당 건물 짓는 것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지, 유서깊은 자리에 성전을 짓는 것인데, 또 현재 그 자리에 이슬람의 성지,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 기존 건물을 해체, 제거하는 작업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나는 교회가 휴거된 후 성전이 곧 지어지기 시작할 것인데 전3년 반 동안 공사가 계속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전이 얼추 기본 구조가 갖춰지고 제단이 마련되면 그때는 일단 제사를 드리기 시작할 것인데 이를테면 헤롯이 증축한 헤롯 성전은 주님 공사역 당시에 완공 상태가 아니었고 계속 보강, 증축이 되는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는 정상적인 제사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와 거의 유사하게 대환란 성전도 지어지는 과정에서 제사도 병행될 것이며 그것은 초림 때와 재림 직전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나온 나의 결론이다.
왜 환란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는데도 전3년 반의 그 유대인들은 먼저 제사를 드리려고 할까, 그들은 뭔가가 조급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비록 7년 간의 평화 조약을 맺어서 이스라엘이 안보를 보장받은 상태이긴 하지만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니까, 그때 주변 세계가 요동하고 불안하고 전쟁도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기 위해 일단 제사부터 드리고 보는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급한 것이 있기 때문에 원래 정석대로라면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첫 제사가 드려진 것만치 순리대로 가야 하지만 서둘러서 제사를 드린다고 본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기를 “주께서 번제와 희생제를 주의 음성에 복종하는 것만큼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복종하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나이다(삼상 15:2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그 천사가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계 11:1).
대환란 때 지어질 그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푸시며 회복시켜 주는 근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은 희생을 치르고 쟁취해 내어 결국 모슬렘 성전을 헐어낸 다음 옛 성전을 다시 짓겠지만 그것이 완공되어 솔로몬 성전 완공 때처럼 일천번제도 드리고 아주 대단한 행사를 치르려고 이스라엘 국가가 거국적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찰나에 적그리스도가 쳐들어와서 깽판을 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전3년 반 동안 영적으로 각성되어 있는 신실한 메시야닉 유대인들(그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겠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일종의 메시야닉 유대인이라 할 수 있겠다)은 자기들 민족이 열심히 짓는 그 예루살렘 성전에 임박한 파멸이 떨어질 것임을 인지할 것이며 그들은 성전 경배를 드리지 않고 자기들이 기존에 했던 방식대로 회당에 모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드릴 것이다. 즉, 시 74:8에서 파괴되는 하나님의 회당들은 현재의 정통 유대교 회당이 아닌 전3년 반의 메시야닉 회당들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전도 여행을 다닐 때 각 성읍에서 가장 먼저 공략 지점으로 설정하고 들어가 복음을 전파한 장소는 유대인 회당들이었다. 유대인 회당에서 전파하면 유대인만 듣는 게 아니라 헬라인들까지도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유대인, 이방인 따로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일타쌍피로 해결되는 장점이 있어서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즐겨 했다.
7년 환란의 전3년 반 때 바울을 꼭 닮은 14만4천의 유대인 남자 동정들이 순회 설교자가 되어 소아시아 일대를 돌면서 복음을 전할 것이다. 물론 그 때의 복음은 지금같은 은혜 복음이 아닌 왕국 복음인데 그것을 전할 때 회당 중심으로 전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7년 환란 전3년 반 기간 중 이스라엘과 소아시아 전역에 "하나님의 회당들"이 증가하여 큰 교세를 이루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사탄의 회당들은 전3년 반 환란 때 등장할 하나님의 회당들에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 세력인데 사탄의 회당을 예표하는 회당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리버티노의 회당이다.
그때에 리버티노의 회당이라고 불리는 회당에 속한 어떤 사람들과 쿠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스테판과 더불어 변론하더라(행 6:9).
리버티노는 종살이에서 해방된 자, 해방 노예, 그런 뜻이 있는데 이 회당에 실제로 해방 노예들이 모인 것인지 그냥 붙인 이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회당 소속 멤버들이 이후에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해방 노예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이 리버티노라고 하는 그 이름을 지은 취지는 기독교계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을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아 보인다.
리버티노라는 말은 결국 영어의 리버티의 어원이기도 하고 자유주의자들도 리버티에서 나온 리버럴이라는 말을 자기에게 쓰고 있으니 즉, 행 6:9의 리버티노들은 초대 교회 시대의 자유주의 분파들이었던 셈이다. 유물론자와 자유주의자는 맥이 약간 다른데 사두개인들이 유물론에 가깝다면 리버티노들은 사두개인들만큼 유물론적이면서 거기에 헤롯당이나 열심당(셀롯)의 급진파적 정치 성향이 더해진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중남미의 해방신학자들처럼 불쌍한 민중을 가난과 억압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카톨릭 사제의 신분으로 기관총을 들고 나서서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격 분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스테판 집사는 가장 악질적인 해방신학자들, 빨갱이 사상을 가진 마르크스, 레닌 같은 혁명분자 유대인들에게 정통으로 걸려서 애초에 내려질 수 있는 판결이 사형밖에 없는 "인민 재판대"에 올라간 것이다.
사탄의 회당인 리버티노 회당 멤버들은 그때 스테판을 돌로 쳐 죽이는 데 주동 역할을 했고 이후에 바울이 된 사울은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스테판을 처형하는 데 동조하고 있었다. 스테판의 순교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던지 주님께서는 그 괘씸한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적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1900년 넘게 회복을 막아 버리신 것이다. 리버티노의 회당은 이스라엘 파멸의 단초가 된 사탄의 회당이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7년 환란의 전반기에 사탄의 회당들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온다는 뜻은 맑시즘 사상을 가진 무신론 계통 유대인들이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 장악하고 휘저을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자들이 성전을 짓는 것을 추진하는 이유는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전이 세워져 있어야 이스라엘 나라가 구약 시대처럼 찬란하게 잘 나가고 세상을 호령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철저히 지정학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는 얘기다.
그 자들이 전3년 반에 이스라엘과 소아시아 전역에 대두될 새로운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회당들, 그 성도들에 대해 증오에 찬 발작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며 스테판을 잔인하게 죽였듯이, 사울을 앞세워서 그들을 이스라엘 영외의 시리아라던지 근방까지 추적해서 일망타진하려 했듯이 동일하게 박해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유대인 14만4천은 사탄의 회당에게 배척당하여 결국 땅끝까지 가서 이방인들에게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 회심시키게 될 것이며 그 사역은 7년의 중간을 기점으로 세계적 신앙 부흥의 열매로 맺어질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의 사소해 보이는 단어들을 간단히 넘기지 않고 한 번 더 되새기면서 보면,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깊은 의미를 반추하여 보면서 읽으면 숨겨진 의미들을 더 찾아낼 수 있다. 다음 시간에 스머나 교회의 나머지 구절들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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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말씀 하나 하나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지...또 쉽게 풀어 주셔서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럭크만 박사님의 계시록 주석서를 3번 읽었지만 다시 강해를 보니 새롭고 눈이 밝아지네요..
수고 많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해를 통해 올바로 진리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ourdailybread님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