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4장
가인과 그의 후손, 깊어지는 타락
(찬송 550장)
2024-1-4, 목
맥락과 의미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언약을 파기하여 에덴 동산과 생명나무로부터 추방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보존되어 계속 일을 합니다.
4장은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려고 했던 죄가 어떻게 확산되고 강화되는지,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에게 찾아올 죽음이 인간 역사를 지배하는 첫 번째 신호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타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과 삶을 지키려 하는 인간의 무례한 문화도 보게 됩니다.
가인의 자손을 통한 죄의 번성이 무르익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대화하시고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려고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십니다. 한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한 무리들(셋의 후예)을 보존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과 구원을 계속 베풀어 주십니다.
1. 가인과 아벨(1-16절)
2. 가인의 후손들(17-24절)
3. 셋의 후손들(25-26절)
1. 가인과 아벨(1-16절)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낳는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됩니다.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낳게 됩니다(1-2절). 아담의 두 아들, 첫 아들 가인, 둘째 아들 아벨, 가인은 농사짓는 자고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자연히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4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표시로 그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경우에는 제물도 받지 않으시고 또 가인 자신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로 보아서 제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예배 태도가 선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온전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시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사 자체보다는 가인에게 관심이 더 많으셨습니다. “왜 네가 낯을 들지 못하고 낙담하느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왜 화내느냐? 왜 이렇게 비교의식 때문에 질투하고 화를 내느냐?” 책망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도록 합시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의 유혹을 다스리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가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창3:9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 숨은 아담을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죄를 물으시면서 찾아오셨지만 또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무화과 나무잎 대신에 양가죽 옷을 입혀주시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4:9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의 뜻은 “너는 너의 동생을 지키는 자인데,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 장애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실직자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우리의 대답은 이럴지 모릅니다. “내가 장애인을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실직자를 지키는 자 입니까?”
가인은 자기 동생의 피를 감추기 위해서 들에서 피를 흘리게 하고 흙으로 덮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땅이 아벨의 소중한 피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죽은 아벨 대신에 땅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가 스며든 땅이 가인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농사에 더 힘이 들게 되고 가인은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11-12절).
13절에서 가인은 형벌이 너무 중하다고 호소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지면은 땅의 얼굴입니다.)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것이 인류의 상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보호하시는 표를 주셨습니다(15절). 눈에 보이는 표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7배를 죽이리라” 7배는 정당하게 보응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자도 보호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15절). 이것은 물고 물리는 복수와 폭력의 사슬을 끊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여호와의 앞(동산 근처의 땅)을 떠나 다른 땅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인과 동행할 것입니다. 가인이 놋 땅에서 자녀를 낳고 성을 쌓은 것은 그런 은혜의 한 증거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리하지 않으십니까?
2. 가인의 후손들(17-24절)
가인의 계보가 그의 7대손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통해서 문명(가축치기, 음악, 청동기 및 철기문화, 21,22절)이 발달했습니다. “기구”는 농기구도 되지만 무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문명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창조적 능력이 발휘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동기와 방법은 그 결과들을 왜곡시킵니다.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과학 기술, 음악, 경제는 기술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면 악합니다.
가인에게 있었던 죄가 더 깊어지고 후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그의 후손 라멕이 부르는 노래에 잘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조그마한 상처만 입혀도 살인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가인을 죽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7배의 벌을 약속하셨다면 (15절), 라멕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스스로 77배로 복수하겠다고 합니다(24절). 정당한 대응을 넘어서 잔인하게 보복하겠다고 합니다. 7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도 왜곡되었습니다.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두고 살았습니다.
26절에 “그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때 여호와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써 모든 것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바로 아벨의 계열을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갔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받읍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형제 자매의 공동체로부터 피하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는 우리의 소명을 다합시다. 하나님께 우리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힘 달라고 기도합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도망한다면, 우리는 땅으로부터도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참으로 하나님을 바로 믿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불신자들 중에서도 겉으로는 많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양심의 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 문화를 발전시켜야 되겠습니다. 음악을 만들고 정말 경건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살릴 수 있는 그런 음악,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음악, 그리고 기술도 사람을 죽이는 그런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이룰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들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갈 때, 예배하며 살아갈 때 이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3. 셋의 후손들(25-26절)
가인이 죄인의 계열을 대표한다면 아벨은 의인(마23:35참조)의 계열을 대표합니다.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셋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십니다. 셋과 그 아들 에노스 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셋의 계열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삶은 가인 계열의 자기중심적인 삶과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자신들의 안전과 미래를 의존하는 공동체(교회)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셋의 계보가 5장에 계속됩니다.
믿고 복종할 일
가인처럼 은혜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더 악한 길로 치닫는 악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고 그 반열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시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시기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맙시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순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와 복을 축하합시다.
아담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쁨으로 일하던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경작할 수 있는 토지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후 얻은 토지에서는 아담은 가시와 엉겅퀴와 싸우면서 노동해야 했습니다. 아담이 얻은 것은 양식을 내는 토지였으나, 가인은 어떠한 양식도 내지 않는 땅으로 추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면 생명의 안식이 주어지는 교회 공동체의 터전을 상실하고 맙니다. 가인이 아담의 가정에서 떠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찿아서 살아가게 됩니다(창4:16-17에서 놋땅에 거하여 그리고 성을 쌓음). 하지만 문제는 아담의 가정에 남아 있던 있는 은혜와도 결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은혜와 안식이 없는 삶입니다. 더 넓은 땅에서 더 많은 소출을 가지고 견고한 성에서 잘 살아 갈지는 몰라도 그 마음과 영혼이 황폐한 배반의 삶입니다.
시편 1:5에서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교회를 벗어나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넘어서 교회의 권징에도 반발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교만함을 잘 드러냅니다.
세상에서 방황함의 특징은 실제로 거주할 땅이 없거나 먹을 것이 없는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와 안식을 거절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도 돌이키면 아벨이나 셋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죄악된 삶으로 악화시켜 후손에게 전수하여 라멕이 한 것과 같은 세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해하는 것이고 자멸하는 길입니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에덴, 토지(아다마), 땅(에레츠)
창세기는 에덴, 토지, 땅을 구분된 개념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중에서 물이 없는 곳을 “땅(에레츠)”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을 “토지(아다마)”라고 합니다. “토지(아다마)”는 사람(아담)의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리고 토지 가운데 행복의 땅을 “에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아담)을 에덴으로부터 추방하여 “토지(아다마)”를 경작하게 하셨습니다(3:23).
그 토지에 살던 가인은 토지에 아벨의 피를 흘렸습니다. 10-12절에 나오는 “땅”은 모두 “토지(아다마)”입니다. 토지에 흘린 아벨의 피가 토지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토지가 가인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서 가인에게는 소산을 내지 않습니다. 가인은 토지로부터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