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를 부탁해
<VOGUE> 2012년 08월호
세계랭킹 1위를 굳건하게 지키는 선수도 결정적 순간 흔들리는 정신력 앞에선 답이 없다. 그래서 국가대표 선수들에겐 심리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다. 운동 기술 같은 물리적 조건을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주고 보듬어 줄 심리적 케어 말이다.
태릉선수촌에 사는 선수들의 하루는 이렇게 굴러간다. 아침 6시 기상, 가볍게 아침 운동을 한다. 아침 7시에서 7시30분경 식사를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다. 9시면 본격적인 아침 훈련 시작이다. 정오에 점심을 먹고, 대부분 피로 해소를 위해 낮잠을 잔 후, 3시쯤부터 오후 훈련을 한다. 땀을 뺐으니 다시 밥 먹을 때다. 저녁식사 후엔 수험생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듯, 단점을 보충하기 위해 개인 훈련을 한다. 이런 날들의 반복이다. 그러곤 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까지 부지런히 국제대회에 참여한다. 이렇게 쌓인 기록에 따라 올림픽 본 게임에서의 대진표(시드 배정)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 치열하게 살지만, 아침 6시에 눈 뜬 순간부터 모든 게 반복과 엄격한 규칙으로 굴러가는 사람의 일상은 일반 사람과 가동되는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그렇게 엄정한 삶을 산 선수라도, 체육계와 한 나라의 기대를 받으며 비장한 마음으로 올림픽에 나간 선수라도, 결정적 순간 흔들리는 정신력 앞에선 답이 없다. 어떤 선수가 컨디션 난조로 ‘아깝게’ 메달을 놓쳤을 때, 사람들은 냉정하게 말한다. “그것도 다 실력이야.”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나갔던 미국의 사격 선수 메튜 에몬스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말았다. 결승에서 1위를 달리다 마지막 한 발을 옆 선수 과녁에 맞춘 것이다. 분기탱천했을 2008 베이징 올림픽, 그의 금메달이 유력한 상황. 그러나 또 다시 마지막 한 발을 잘못 쏜 그는 4위로 떨어졌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남자 양궁 단체전 결승은 대한민국 대 이태리였다. 야속한 경기는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동점으로 흘렀고, 각 나라의 마지막 3발에 승부가 달려 있었다. 대한민국과 이태리팀 각각의 두 선수는 짠 것처럼 번갈아 10점과 9점에 화살을 꽂았다. 마지막 남은 각국의 선수는 몇 발자국 내딛는 그순간에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태리의 마지막 선수는?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6점에 가까운 7점을 쐈다.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수인 박경모가 9점을 쏘던 순간, 게임 끝.
평소엔 말짱히 잘했는데, 본 게임에서, 혹은 결정적 순간에 말짱하지 못했던 운동 선수는 분통이 터진다. 세계랭킹 1위를 굳건하게 지키는 선수도 그런 가능성을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국가대표 선수들에겐 심리 매니지먼트도 필요하다. 운동 기술과 같은 물리적 조건을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주고 보듬어 줄 심리적 케어 말이다. 선수들이 경기에서 신들리게 시합할 때의 느낌과 심리 상태를 ‘최고 수행(Peak Performance)’이라고 한다. 최고 수행 상태인 선수는 보통 경기 때와 다른 특별한 느낌을 갖는다. 어떤 선수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동작이 슬로 모션처럼 이뤄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격하게 몸을 쓰는데도 신체가 이완된 기분이고, 경기 자체를 즐기게 되며, 모든 게 자동화된 상태로 흘러가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상태. 심리와 관련된 모든 전략은 결국 선수를 최고 수행의 경지로 이끌기 위함이다. “운동 선수들마다 징크스는 다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만 불안한 선수인지, 늘 불안성 자체가 강한 선수인지 차이가 있을 뿐이죠.” 안동대학교 체육학과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가르치는 정성현 교수가 말했다. 즉, 운동 선수에겐 불안한 요소를 없애는 것이 핵심이다. “상담을 통해 불안 요소를 함께 찾아갑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하는 선수도 있죠. 그래서 뇌파를 측정해 검증 절차를 밟기도 합니다. 뇌는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스포츠와 뇌를 연관 짓자면, 라켓 등 뭔가를 들고 하는 모든 운동은 뇌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손끝에 말초신경이 있고, 이 신경은 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손끝 미세한 감각을 무시할 수 없는 종목에서 뇌가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면, 서브부터 흔들릴 수밖에.
정성현 교수는 요즘 선수의 집중력을 강화시키는 음파를 개발하면서 이를 실제로 적용해보고 있다. 수험생 때 ‘엠씨 스퀘어’ 좀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집중력을 위한 음파 얘기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안정성을 향상시키는 알파파와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베타파의 도움으로 학업에 정진하고자 했던 사람들. “최근 대회를 앞둔 선수들에게 검증해 봤는데, 양궁 선수들에게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배드민턴 선수들의 집중력도 약 30% 증가했고요.” 양궁이나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종목은 꼭 최후의 순간까지 비슷비슷하게 가다가 어느 한 쪽이 ‘삐끗’할 때 결판이 난다. 막판의 집중력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것이다. 물론 이 음파, 종목별로 다르게 써야 한다. 역도나 단거리 달리기 선수에게 알파파를 마구 쏘아 마냥 릴랙스되게 만든다면? 그런 종목의 선수들은 경기 직전 최대한 각성 수준을 높여 초능력에 가까운 심리적 파워를 끌어올려야 한다(이럴 땐 영화 <헐크>에도 자주 등장한 감마파가 적절하다). 역도 선수들은 경기에 들어가기 전, 각성을 위해 센 암모니아 냄새를 맡기도 한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의 김병현 박사는 ‘심리 상담관’이란 개념이 불분명한 국내 체육계에서 여러 종목에 걸쳐 체계적 이론을 만들어 온 인물이다. 그는 훈련 경험을 정리한 책 <국가대표 심리학>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려면 우선 집중력이 깨지는 시점을 알아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상담한 한 사격 선수는 ‘내가 좀 잘 쏘고 있구나’ 느끼는 순간 집중력이 흔들렸다는 걸 알았다. 그 전에는 무아지경으로 슈팅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선수는 자신이 언제 집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니 경기 영상이나 주변의 조언을 통해, 집중력이 깨졌거나 자신감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보이는 증후(證候)를 포착해야 한다.
증후는 날카롭게 그 사람을 드러낸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땐 코를 만지는 것처럼 말이다. 배드민턴 협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 분석과 심리 상담을 맡고 있는 김홍기 연구원은 한 선수를 떠올렸다. “경기중 한쪽 방향에서 셔틀콕을 올려 치는 플레이가 잘 안 될 때면, 습관적으로 라켓을 까딱까딱하면서 그 폼을 반복해보는 선수가 있었어요. 그럼 예리한 상대 선수는 그쪽 방향으로만 죽자고 공격합니다. 저놈이 지금 안 되는구나, 알아챈 거죠.” 김홍기 연구원은 이 선수가 뛴 경기 영상을 여러 번 보다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안 풀리는 상황에서 무의식 중에 반복하는 행동’을 제거시켰다. 선수 자신도 몰랐던 행동이니, 알아챘으면 제거도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을 읽는 행위는 카지노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경기 도중의 행동, 경기 사이사이 코트 밖에서 보이는 행동 모두가 어떤 증거다.
세계랭킹 2위씩이나 되는 선수라도 세계랭킹 1위 선수를 만나면 보통 기죽고 들어간다. 모든 선수는 주눅 드는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자신만의 조치를 취한다. 이용대의 혼잣말은 상황에 따라 스무 개 정도 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냥 막연한 자기 다짐이 아니라, 상황마다 세팅된 혼잣말이 있더라고요. 그게 뭔진 말 못 해줍니다. 그게 이용대의 전략이니까요.” 자신이 너무 업 돼 있다고 생각될 땐 흥분을 가라앉히고, 반대의 경우엔 사기를 올리는 말들. “중요한 건 긍정적인 혼잣말이라는 겁니다. 투수가 ‘포볼은 던지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것과 ‘스트라이크를 던져야지’ 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알겠죠? 같은 목표도 부정적인 언어 대신 긍정적인 언어로 생산해야 훨씬 좋습니다.” 이용대는 현재 배드민턴 세계랭킹 1위다(그는 복식 전문이니, ‘이용대 조’가 1위인 셈이다). 이용대는 금메달을 따고도 일반 선수처럼 웬만한 국제대회에 다 나갔다. 사람인 이상, 매번 경기에서 이기진 못했다. 김홍기 연구원은 이용대가 적어낸 ‘혼잣말들’을 보고 좀더 구체적인 타이밍에 적절한 혼잣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규칙화했다. 그리고 맘속으로만 되뇌던 혼잣말을 입 밖으로 읊게 했다.
어떤 타이밍마다 선수가 규칙적으로 실행하는 좋은 행동을 쉽게 ‘루틴’이라고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역도 금메달을 딴 장미란은 심리 상담과 루틴의 도움이 컸다고 언급했다. 루틴 프로그램은 예를 들면 이렇다. ‘점수를 따면, 1번 파이팅을 외친다, 2번 코치가 있는 벤치를 한번 바라본다, 3번 땀을 닦는다, 4번 긍정적인 혼잣말을 한다’. 루틴을 만드는 이유는 선수가 좋은 플레이를 했을 경우, 그 조건과 상황을 계속 상기하면서 안정감과 자신감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 평소 연습 때 이 루틴을 몸에 각인시켜 두면, 긴장된 상황에서도 연습할 때의 느낌을 불러올 수 있다. 대부분의 경기에서 코칭 스태프가 아닌 심리 담당관은 선수와 근접한 코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간혹 어떤 경기에서 정체를 알수 없는 사람이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 지른다면, 그는 ‘루틴 프로그램’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1번!” “2번 빨리 읊어!” 탁구와 배드민턴 등에는 단식 경기와 복식 경기가 있다. 호흡이 관건인 복식 경기를 할 때, 두 선수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다. 김홍기 연구원은 동성끼리 팀이 됐을 때 호흡을 맞추기가 더 쉽지 않다고 했다. 남녀가 한 팀이면 주로 체력에서 우세한 남자 선수가 리드를 하고, 여자 선수가 의지를 하며 사랑하지만, 동성끼리는 더 민감해 하며 대화를 잘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종목과 상관없이 복식 선수들에게서 나타나는 패턴이 있습니다. 잘되는 팀은 코트 안에서 움직일 때 짝꿍처럼 같이움직여요. 잘 안 되는 팀은 붙어 있다 각자의 자리로 갈 때도 하트 모양을 그리면서 찢어져 다닙니다.” 복식 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상대와의 의사 소통이라는 미션까지 수행해야 한다. 이때, 서로 간에 약속된 ‘루틴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이 불안함을 줄이기 위한 몸부림이다. 성공 경험을 많이 갖기 위해 자신보다 못하는 선수와 연습하면 자신감이 쌓여간다. 반대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상대와 다시 맞붙는다면 불안함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때 이미지 트레이닝이 그 악바리 선수를 거들어줄 수 있다. 타이거 우즈가 퍼팅 전 공이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한다거나, 장미란이 훈련 때마다 자신이 실전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했다는 것이 그 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미국전에서 뛰던 황선홍이 눈썹 뼈 쪽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을 처치하고 다시 그라운드로 들어온 그의 ‘룩’은 한마디로 ‘투 머치 붕대’였다. 보통은 붕대 한번 두르고 망을 쓰는데, 아예 붕대를 이마부터 칭칭 감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건 나름 전략이었다. 에이스의 불타는 투혼을 쇼업 해 모두의 마음속으로부터 단합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 이런 것 하나가 나비효과처럼 전체의 심리를 흔든다. 그러니까 중요한 경기 현장에선 선수 개인의 심리, 그 개인과 연관된 모든 이들의 심리 역시 경기 흐름에 이바지한다. 흐름이 ‘우리’ 쪽으로 오면, 승리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정성현 교수는 말했다. “경기에서 심리는 1%의 비중만 차지할 거예요. 그 1%가 메달 색깔을 결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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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타★용대] 배드민턴 이용대 공식 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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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아리아
첫댓글 아주 좋은 글이네요!! 총무님이 올린글중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