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렬사(彰烈祠)의 추향사(追享史) 연구
서정규(徐晶圭)
1. 개요
2. 창건 당시의 창렬사
3. 창렬사의 증축과 추향(追享)
4.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의 정위차설재(定位次設齋)
5. 창렬사(彰烈祠)와 충민사(忠愍祠)
6. 유복립(柳複立)과 이의정(李義精)의 추향
7. 주몽룡등 8인의 추향
8. 방금(邦禁)과 추향의 갈등
9. 제언(提言)
1. 개요
진주성 동북쪽 언덕에는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5호(1983.7.20.지정)인 창렬사가 있으며, 이 창렬사에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39인이 배향(配享)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순절한 장령과 사민이, 혹은 6만이라 하고, 혹은 7만이라 하는데 고작 39인만이 배향되어 있으니, 태생적으로 미흡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창렬사에 배향된 인물들은 처음부터 39인이 아니라, 수차에 걸쳐 추향(追享) 된 것이다(표 1.).
창렬사의 창건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년대별로 누가 언제 추향 되었는지를 알아 보고 창렬사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짚어 본 후, 당면한 추향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2. 창건 당시의 창렬사
진주성이 함몰 된지 2년 후인 선조 28년(1595년), 안동부사 정사호(鄭賜湖)는 진주성 내에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지인들)을 위해 창렬사를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후 선조 40년(1607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배향된 인물이 혹자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장윤등 4인이라고도 하고 또 혹자는 그 같은 주장은 고증되지 못한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주목사 서예원이나 판관 성수경등 주역들이 누락되었고, 김천일 등과 함께 포증 된 이종인과 김준민 조차 누락되었으니, ‘창렬사는 애당초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한 것이 아니라, ‘정사호의 지인 4인’을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창렬사에 배향된 인물들을 보고 이때부터 김천일등 호남의병이 이 전투의 주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등 진주본주 군사들은 잊히기 시작했다.
년도 |
내용 |
배향(인) |
추향인물 |
위상 |
건물 |
1595년 |
정사호 창건 |
4 |
김천일등4인 |
제2차전 |
1개동 |
1686년 |
촉석정충단비 |
29 |
김시민등 25인 |
제1,2차전통합 |
2개동증축 |
1724 |
최진한 |
28 |
김시민 제거, |
제2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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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
|
29 |
이의정 1인 |
|
|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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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유복립 1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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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
고종 |
31 |
김시민 복위 |
제1,2차전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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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문화부지시 |
39 |
주몽룡등 8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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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창렬사의 증축과 1차 추향(追享)
숙종 12년(1686), 어영대장(御營大將) 서문중(徐文重)이 영남지방을 순시하며 진주를 지나다가 이곳에서 순절한 분들의 억울한 즉음을 생각하고 이곳에 창렬사를 세우고 그 근처에 촉석정충단비를 세우게 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이민서(李敏徐)가 촉석정충단비명을 지었는데, 이 비명에는 이 전투의 왜곡된 역사(선조수정실록)가 기록되어 있고, 창렬사에 배향된 인물들의 위차가 기록되어 있다..(표. 2)
촉석정충단비명에는, ‘그 뒤로 조정의 포상이 쌓이고, 죽은 뒤에 내리는 벼슬직[증직(贈職)]을 아주 잘 갖추어 창렬사(彰烈祠) 를 세우고 또 정충단(旌忠壇)을 성의 언덕 가까이에 세워서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려는 것이다(累朝褒贈甚備 置彰烈祠 又設旌忠壇碑近之麓 祠以春秋).’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창렬사를 세우고’의 원문인 置彰烈祠의 뜻을 단순히 세웠다고 번역하면 창렬사는 1595년에 정사호가 세웠는데 이때에 또 세웠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당(祠堂)은 하나의 건물로 되어있는데 반하여, 이 창렬사는 중앙의 정사와 동, 서 양사의 독립된 3개 건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초에는 지금의 정사(正祠) 뿐이였으나 이때에 동, 서 양사를 추가로 신축하고 25인을 이곳에 추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뒤로 조정의 포상이 쌓이고, 죽은 뒤에 내리는 벼슬직[증직(贈職)]을 아주 잘 갖추어 창렬사(彰烈祠) 를 세우고 또 정충단(旌忠壇)을 성의 언덕 가까이에 세워서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려는 것이다.
영의정 벼슬을 내린 김시민공, 좌찬성벼슬을 내린 황진님과 김천일님. 우찬성벼슬을 내린 최경회님 들은 북쪽에 모시어 남쪽을 향하도록 하였고, 의병장 고종후, 이잠, 김해부사 이종인, 우후(虞侯) 함영달(咸穎達), 사천현감 장윤, 첨정(僉正) 윤사복(尹思復), 학생 이인민(李仁民) 대장(代將) 손승선(孫承善), 주부(主簿) 정유경(鄭惟敬), 수문장 김태백(金太白), 선무랑(宣務郞) 양제(梁濟), 학생 박안도(朴安道)는 서쪽 열에 모셨고, 승지 벼슬을 내린 양산주(梁山疇),창의(倡義) 벼슬을 내린 김상건(金象乾), 의병장 강희열(姜熙悅),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진해현감 조경형鷙(曺慶亨), 판관 최기필(崔琦弼), 주부 벼슬을 내린 유함(愈唅), 생원 이욱(李郁), 수문장 장윤현(張胤賢), 의병장 강희복(姜熙復), 판관 박승남(朴承男), 학생 하계선(河繼先)과 최언량(崔彦亮)은 동쪽 열(列)에 모시었다.‘
위의 비명(碑銘)에 기록된 위차(位次)는 다음과 같다.(표 2.)
位置 |
西 祠 |
正 祠 |
東 祠 |
1 |
義兵將 高從厚 |
贈領議政 金時敏 |
贈承旨 梁山璹 |
2 |
義兵將 李 潛 |
贈左贊成 黃進 |
贈參議 金象乾 |
3 |
金海府使 李宗仁 |
贈左贊成 金千鎰 |
義兵將 姜熙悅 |
5 |
虞侯 咸穎達 |
贈右參贊 崔慶會 |
巨濟縣令 金俊民 |
4 |
四川縣監 張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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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海縣監 曺慶亨 |
6 |
僉正 尹思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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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官 崔琦弼 |
7 |
學生 李仁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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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主簿 愈唅 |
8 |
代將 孫承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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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員 李郁 |
9 |
主簿 鄭惟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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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門將 張胤賢 |
10 |
守門將 金太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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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將 姜熙復 |
11 |
宣務郞 梁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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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官 朴承男 |
12 |
學生 朴安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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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生 河繼先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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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生 崔彦亮 |
당초에 정사호가 창렬사를 창건할 때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 장윤 등 4인이 배향되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표와 같이 총 29인이 배향되었으니 25인이 추향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제1차진주성전투의 주역인 증영의정 김시민이 정사의 상위에 배향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는 제2차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제1차전에서 순절한 분들도 함께 배향하는 창렬사로 그 위상이 변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배향된 인물 중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진주서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김시민, 황진, 김천일, 최경회, 양산숙, 김상건, 강희열, 김준민, 강희복, 고종후, 이잠, 이종인, 장윤 , 1차전에 참전했다가 제2차전에서 전사한 군관 윤사복등 14인이고 나머지 나머지 15인은 위의 사료에는 없는 인물이므로 창렬사를 중건한 서문중과 이민서의 지인이거나 또는 신고된 인물들로 보아야 한다.
반면에, 위의 사료등장하는 인물로서 누락된 인물은
이시언의 장계에 등장하는 태안군수 윤구수, 결성현감, 김웅건, 당진현감 송제, 남포현감 박몽열, 보령현감 이의정 등 5인 과 김늑의 치계에 등장하는 현웅군대장 정충훈, 영광의병장 심우신, 웅의대장 정원한, 채의대장 정운호등 4인, 제1차전에 참가 승리하고 제2차전에서 전사한 인물인 판관 성수경, 전만호 최덕량, 권관 이계정, 군관 이납, 군관 윤사복, 함창현감(진주주부) 강덕룡 등 6명중 군관 윤사복을 제외한 5명 등 14인이 배향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진주서사에 진주성으로 입성하였다는 인물인 최경회의 부하 문홍헌, 고종후의 부한인 오자빈, 내금 김인홍, 등 3인이 더 있으니 배향되지 못한 인물은 총 17인이나 된다.
진주성에 들어가 보니, 여러 장수 막하의 병사 중 쓸 만한 자가 없었다. 싸움을 그만두고 가고 싶은 자를 가게 하니, 수십 명이나 떠나갔다. 오직 천일의 막하에 아들 상건과 좌랑 양산숙, 경회의 막하에 진사 문홍헌, 종후의 막하에 오자빈 내금 김인혼․ 참봉 고경원 등 대여섯 사람만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초에 정사호가 ‘임진왜란제2차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창렬사를 지었다 하였는데, 제1차진주성전투의 인물인 목사 김시민, 첨정 윤사복 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이 추향 되었다면, 창렬사의 성격이 제1차 및 2차진주성전투를 합하여,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으로 그 위상이 변경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사호가 창건한 창렬사는 ‘제2차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정사호의 몇몇 지인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이라고 하였으나, 이때(촉석정충단비를 세운 숙종2년, 1686년)에는 제1차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증영의정 김시민과 선조실록등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13인과 그중에서도 공직이 없는 학생이 4인이나 포함된 것을 보면, 아마도 호남인들이 아닌 진주본주 인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렬사는 제2차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서인계의 몇 몇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아니라, 제1차전에서 순절한 분들 및 서인계의 인물들뿐 아니라 진주본주인 들 까지를 통합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변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배향된 인물 중에 목사 서예원과 제1차전에 참가 했다가 제2차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 판관 성수경(成守慶), 만호 최덕량(崔德良), 권관(權官) 이계종(李繼宗), 함창현감 강덕룡(姜德龍)(진주주부) 등 진주본주군 5인이 누락되었고, 선조실록, 수정실록, 진주서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14인이 누락되었으며, 고작 29인에 불과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사업을 주도한 어영대장 서문중을 비롯한 인물들의 당파적 호(好), 불호(不好)와 개인적 친소(親疎)관계에 의하여 선발 배향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전투가 있은 지 이미 100년(정확히 93년)이나 지났고, 이 전투에서 가족과 친척, 친지들이 대부분 순절하였으며, 실제 친척, 친지들이 생존해 있었다 하드라도, 현실적으로 이 사업이 추진되고 있음을 알지 모했을 수 있고, 안다하여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못한 때문에, 많은 인물이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