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어둑새벽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
뜬금없이 쌀 생각이 났다
쌀알은 왜 작은가
농사 손이 여든 여덟 번 가야
쌀이 되는 건 그렇다 하지만
자두나 복숭아만 해서
몇 개만 먹어도 요기가 되는 열매가 아니고
수박이나 호박만 하면
한 덩이로 여럿이 쉽게 나눠먹을 텐데
어쩌다 흘릴 때는 줍기조차 힘든,
곡신은 왜 곡식을 작은 알갱이로 만들었을까
더운 밥 지어서 더도 덜도 말고
먹을 만큼 딱 가늠하기 좋게
먹다가 남겨서 버리는 일 없어라 고
자디잘게 쌀을 주셨나
찔레꽃 이리에 비가 오면
개 턱에도 밥알이 붙는다 하였으니
그 식구까지 잊지 말라는 쌀의 말씀이겠지
쌀 한 대접으로 죽을 끓이면 마음이 열 그릇
밥이 얼싸안은 게 주먹밥
그러고 보니 쌀은
한 톨도 샛별처럼 빛나지 않던가
경고문
지나친 그리움은 금물입니다
그리움 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그리움이 눈 똥은 주인이 치우시기 바랍니다
그리움에게 먹이를 던져주지 마시오
그리움에게 3m 이상 접근금지
그리움은 수심이 매우 깊으니 들어가서 헤엄치지 마시오
구명복은 좌석 밑에 없습니다
그리움을 우회하시오
코스모스
코스모스가 살아온 방식은
한결같이 흔들렸다는 거다
이 바람결에 쏠리고 저 노을 쪽으로 기울며
제 반경을 끊임없이 넘어가던 그 범람이
코스모스의 모습 아니던가
가만히 서 있을 땐 속으로 흔들리는 꽃
줄기가 그토록 가늘고 긴 것은
춤을 추라고 생겨난 것이다
몸이 가늘고 길수록 춤은 위태하니
위태해야 더욱 춤인 것을
어머니께서 나를 지으실 때
꽃대 무너진 아득한 어둠 속에서
그 꽃잎 한 움큼 뜯어 삼켰던 것일까
내 몸의 성분은 수많은 코스모스의 퇴적물 같다
눈을 감아도 흔들리고
국밥집 앞에서 개업식 공연하는
각설이 타령만 들어도 춤추고 싶다
한복입고 환영식에 나온 평양아가씨들 같은
코스모스는 뜨겁게 흔들리다 죽은 것들의 환생이다
흔들리며 사는 것들의 뒤통수에서 수군거리지 말자
가을 국도(國道)의 평화는 온통
코스모스가 이루어 놓은 것이니
비꽃
폭우는 허공에서 땅 쪽으로 격렬히 꽃피우는 방식이다 나는 비의 뿌리와 이파리를 본 적이 없다 일체가 투명한 줄기들, 야위어 야위어 쏟아진다 빗줄기는 현악기를 닮았으나 타악기 기질을 가진 수생식물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비에겐 나비가 아니라 허공을 버리는 순간이 필요한 것 하얀 꽃무릇이 있다고 치자 그게 군락지 채로 뒤집어져 세차게 나부끼는 장르가 폭우다 두두두두두두 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 끊임없이 현이 끊어지는 소리, 불꽃이 메마른 나뭇가지를 뜨겁게 태우는 소리가 거기서 들린다 낙하의 끝에서 단 한 순간 피고 지는 비꽃 낮게 낮게 낱낱이 소멸하는 비의 꽃잎들,
그 꽃 한 아름 꺾어 화병에 꽂으려는 습관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청자상감매죽유문장진주명매병
그날 밤 소쩍새 소리에 처음 눈을 떴습니다 검은 허공이 실핏줄로 금이 가 있었습니다 사깃가마 속 사흘밤낮 회돌이치는 불바람이 나를 만들었지요 흙이던 때를 잊고 또 잊어라 했습니다 별을 토하듯 우는 소쩍새도 그렇게 득음 하였을까요 나는 홀로 남겨지고, 돌아보니 저만치 자기(瓷器) 파편 산산이 푸른 안개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모서리에 기러기 매듭 끈이 달린 국화칠색단 남분홍 보자기가 나를 데려갔습니다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아래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거문고 소리 깊은 집이었습니다 달빛 애애한 밤 오동 잎사귀 워석버석 뒤척이면 나는 남몰래 겹머리사위체 춤을 추곤 했지요 대숲에 댑바람 눈설레 치고 지고 내 몸에 아로새겨진 버드나무에도 당초호접무늬 봄이 수 백 번 오갔습니다
여기는 커다란 하나의 무덤 그 속에 작은 유리무덤들, 이제 나는 침침한 불빛에 갇혀 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 들어와 나를 쳐다봅니다 밖에는 복사꽃 붉은 비처럼 어지러이 떨어지는지** 전해주는 이 아무도 없고 그 사이로 천 년의 강물 흘러갑니다 때로는 내가 흙이던 날의 기억 아슴아슴 젖어옵니다 누가 이곳에 대신 있어준다면 나는 잠시 꿈엔 듯 다녀오고 싶건만 아, 그 소쩍새는 아직 울고 있을까요
*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 어느 책에서 빌림
** 매병에 새겨진 시문 장진주(將進酒) 가운데, 도화난락여홍우(桃花亂落如紅雨)
만추(晩秋)
목관악기로 불어넣은
깊고 긴 숨은
악기 속 어느 마을에 닿아
키 큰 나무숲을 흔드는가
소프라노의 금빛 드레스가
노을에 야위어가는 오후,
소리는 소리를 닮지 않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점점 빛나는 소리가 되었다
저무는 서쪽 얼굴에
윤슬이 그렁그렁하다
저 빛은 죽은 사람들이 잠시 다녀가는
젖은 발자국
숲 너머 긴 강물이
당신의 연주를 안고 흘러간다
목관악기가 붉게 부서진다
마포종점
그곳이 어디쯤인지 짐작되지만 나는 그 곳에 가 본적이 없다 남자가 내게 물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마포종점이라고 했다 내게 마포종점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오래 전 가요무대에 그 노래가 나왔을 때 화면엔 일기예보 자막이 스멀스멀 지나가고 있었다 고드름처럼 두꺼운 영하의 온도 숫자와 폭설주의보가 계속 반복되었다 아픈 시 같았다 어디선가 마포가 새하얗게 절규하며 얼어붙는 밤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내게 물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마포종점을 부른 은방울자매라고 대답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그는 곧바로 떠나갔다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종점에 서서 갈길 없는 밤 전차가 되었다 몇 년 전 자매 중에 한사람이 세상과 이별했다 부처 같은 나의 큰 이모를 닮은 그녀, 포구의 강물이 여전히 내가 가 본적 없는 영등포와 여의도와 당인리 발전소에까지 쓸쓸히 젖어들었겠다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마포 나루에 서 있는 흑백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 마포종점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고 싶지 않다 그것에 대해 내게 말하지 말라 다만, 노래에 관한 얘기라면 나는 마포종점을 빼놓을 수 없다 마포종점도 불멸의 클래식이므로 나는 그 힘으로 견딜만하다 서글프지 않으니 나의 마포는
물봉선
운문사 개울가에 물봉선이 곱다
홍초, 잔대, 여뀌, 미꾸리낚시
고마리, 흰고마리도 맑게 피었다
들꽃 이름을 알면
늙었다는 뜻이라고 누가 말 했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들꽃 이름도 안다
미숫가루를 좋아하는 꽃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목욕바구니 안 들고 오는 꽃
마트에서 물건 담아주는 까만 비닐봉다리를 괜히 모으는 꽃
공중 화장실에서 오줌 누고 나와 보니 남자화장실이었던 꽃
천연염색 옷 가게를 기웃거리는 꽃
백발 남자를 아시동생처럼 사랑하는 꽃
구름이 열여덟 때 나를 낳았으므로
어쩌다 내가 먼저 늙어죽으면
구름은 누가 묻어주나 생각하는 꽃
물봉선도 그랬다고 한다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못 본 듯이 마주쳤다
큰 이모 같은 물봉선화요,
하안거 끝나거든
내 집에 한 번 다녀가소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허공에 해일처럼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새 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움큼씩을 휙휙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 덩이 같았다. 그러나 그 덩이는 식물성이라기보다 유리질로 비쳤다. 응집할 때마다 와장창창 부딪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주검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렬 편대로 비행할 때는 수 백 마리 날갯짓이 허공의 살과 뼈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럴 때면 까마귀 떼가 까무룩 보이지 않았다. 허공의 비늘만 일제히 일어섰다가 차례로 쓰러졌다.
허공에도 숨을 곳이 있을까? 아니면 까마귀들은 구름 속에 들었거나 산을 넘었을까? 그 순간 외각을 찢으며 다시 나타난 새 떼, 이번엔 검은 물줄기를 뿜어 올리듯 높이 솟구치더니 초서 갈필의 붓끝으로 내리 꽂는다. 오! 저게 다 문장이라면 똑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 검은 색만으로도 변려체를 구사할 수 있겠구나.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까마귀 떼 군무는 어두워 오는 허공을 맺고 풀며 지칠 줄을 모르는데, 팔순 노파는 저 보름까메기들이 날아오민 보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 라며 어벙저벙 방으로 들어갔다.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를 때는 허공이 비단이며 까마귀 떼가 가위이고 까마귀 떼가 종횡으로 나풋나풋할 때는 추월적막 흑공단 같으니, 이 비단타령은 어느 게 비단이고 어느 게 가위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어둑시근 다 저물어서 이제 검은 새 떼는 소지(燒紙)한 재를 흩뿌린 듯 가물가물했으므로, 시나브로 또 어느 게 까마귀고 어느 게 어둠인지 나는 망막했다.
섬마을엔 별들이 톳여(礖)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細髮浪綾 黑浪綾) -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발이 아주 가늘고 얇은 비단, 검은 비단을 말함. 추월적막 흑공단도 비단이며 판소리 <비단타령>에서 차용. * 톳여(礖) - 바다 수면 위에 드러난 바위의 윗부분.
하늘 전화
내일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려는데
누가 내일 풍랑주의보 예보 내렸다고 한다
어젯밤에는 모처럼 선물 같은 별이 무성하고
지금은 바람도 없는데 주의보라니
나는 성산항에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에 주의보인가요? 하고 물었다
여직원이 네, 현재는 주의보 예보예요, 한다
우도 신입생인 나는, 예보가 내리면
배가 못 뜰 가능성이 많은지
한 번 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앳된 목소리의 여직원이
다시 차분하게 알려준다
“그건 하늘만 알아요.”
비바람 부는 날
우도에서 배 타고 나가려면 가끔은
하늘에 전화를 걸어봐야 한다
<사윤수 시인 약력>
1964년 경북 청도 출생
201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파온>
첫댓글 물봉선,,,시인 같은...
좋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축하 축하요^^
업로드 하시느라 수고 하셨겠지요.
감사합니다.^^
시
감상 잘 하였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알뜰살뜰 13시를 챙기시는 형범 오빠, 감사합니다!
"큰 이모 같은 물봉선화요,
하안거 끝나거든
다락헌에 한 번 다녀가소"
이 주의 시인 선정됨을 심축합니다.^^
하빈 거사님. 동안거 전에 가리다.
좋은시 잘 읽고 갑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