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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6 | 독립문... 글구... 서울 성곽 마져 돌기 | 2010-04-14 오전 9:01:54 |
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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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치과병원에서 이빨 치료를 끝내고 금화터널을 걸어 넘어서 독립문(獨立門)으로 향한다. 성곽을 돌려면 독립문 근처의 전철 3호선 무악재역에서 인왕산으로 올라 가야 하기도 하고, 내친김에 한 번도 못가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도 들려볼 겸 해서다.
*독립문은...서재필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1896년(건양 1)에 조선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자리에 세운 문으로 1963년 사적 32호로 지정 됬으며 높이는 14.28m이고 너비는 11.48m이다. 당시에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등의 사업계획이 독립신문에 발표되자 왕태자(王太子)의 헌금 1,000원(元)을 비롯한 3,825원의 돈이 모여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갖고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했다.
독립문과 새로 개축한 독립관을 둘러 보고, 바로 옆의 현저동 101번지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으로 향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시대인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후 1912년 9월 3일 서대문 감옥,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 형무소라고 불리우며 우리나라의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지사를 감금, 고문했으며 때로는 즉결처분도 하던 악명 높은 곳이었단다. 해방 후 서울 형무소, 서울 교도소, 서울 구치소 등으로 불리우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시로 구치소를 옮긴 후 1988년 2월 20일 옥사를 헐면서 옥사 15동 중 세 동(10 -12동)과 사형장을 보존하며 사적 324호로 지정하였다. 1992년에는 독립문 일대와 구치소 자리에 독립공원을 개원했고 1998년 11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했단다.
그러나 이곳은 어릴 적의 우리에게는 서대문형무소라는 이름 보다는 그곳의 번지인 '101'이라는 숫자의 모양을 빗대 현저동 101번지 가봤어? 라며 은유적(?) 표현으로 많이 불리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역사관을 구경하고 나오면서 아픈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은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니, 모든 생물은 역경이 있어야 더욱 더 튼실해지고 아름다워 진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이가 나빠져 세브란스 치과에 들리지를 않았다면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들려 볼 생각은 추호도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서울구치소는 그냥 죄 지은 사람을 가두는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했을 뿐이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당한 고문과 아픔은 전혀 몰랐을 터이니 말이다.
무악재역 근처의 한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12시 20분에 I-PARK 현대아파트 옆길을 따라 인왕산으로 오른다. 얼마 가지 않아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성곽이 나타나고 12시 40분에 사회과학도서관(자료연구원?)에 다다른다. 이곳은 예전에 성정 여자 중.고등학교(聖貞 女子 中.高等學校)가 있던 자리로 이곳 바로 밑의 사직동(社稷洞)에서 태어난 나는, 1950년대 말인 중학교 때에는 일요일마다 이 학교 교실로 슬며시 들어가 종종 책상을 뒤지곤 하던 악동(?)이었다.
어느날, 한 책상 속에서 나온 <벌레 먹은 장미> 고(故) 방인근 선생이 말년에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쓰기 시작한 선정소설(煽情小說)의 하나이다. 어쩔 수 없이 불룩해 지는 사타구니를 애써(?) 누르며 이 소설을 동무와 돌려 읽다가 동무 형 한테 그만 책을 뺏겼다. 그러나 결국은 동무 형도 그책을 같이 읽었다는 사실. ㅋㅋㅋ
고개를 들어 아랫쪽을 보니 수도교회가 아직도 있다. 이 교회야 말로 만화책 수준의 내 독서 수준을 소설책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준 곳이다. 국민(초등)학교 5학년 크리스마스 때. 떡과 사탕부스러기를 얻어 먹으러 들린 교회 도서실(?)에서 처음 접한 학원사 간(刊)의 세계명작문학전집. 거기서 톰쑈여의 모험, 소공자, 소공녀, 걸리버 여행기 등을 읽으며 처음으로 소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었다.
상념에서 벋어나 잠시 내려가니 상록수 어린이집에서 성곽은 끊기며 빌라 단지가 계속된다. 여기서 잠시 길을 잘못 들었으나 이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오솔길>이라는 길 표지판이 있는 보경사 쪽으로 들어 섰는데 동네가 낯익다. 어라!!!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의 윗동네인데 50년대 당시의 집도 몇채 그대로 남아있는 옛모습 그대로의 동네다.
숲 속에 난 길만 숲길이고 오솔길이 아니다. 도심의 빌딩 숲 속에서 예전의 정취를 간직하며 오롯이 나있는 이 <오솔길> 이 길도 숲길이고 오솔길이다. 길 찾기는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다시 어릴 적의 상념에 젖으며 미로의 오솔길을 이리저리 헤메인다.
그 길을 다시 돌아 나와 세영빌라의 옆길로 성곽길을 찾아 간다. 석촌빌라 옆 공원. 홍난파의 노래비가 있는 그곳에서 다시 성곽의 흔적을 발견하는데 성곽 위에는 서울복지재단이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우뚝하다. 공원을 벗어나 길로 내려오니 홍난파 생가터라는 안내판이 서있는데, 눈 무딘 나는 생가를 보지를 못하고 그냥 통과했다. 그래서 그 공원에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 나의 눈 무딤이여!!!
기상청 별관(나는 그냥 관상대로 부르고 싶은) 정문에서 성곽은 다시 사라지고 곧 바로 나타나는 강북삼성병원. 지금은 병원의 한 병동이 된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 후 머물던 <경교장> 건물은 그냥 일별하고 서대문 자리터의 큰길로 내려선다.
*서대문(西大門)의 정식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으로 태조 5년(1396)에 다른 문들과 더불어 축조됐으나 태종 13년(1413)에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 하여 숙정문과 함께 폐쇄 됐으나 세종 4년(1422)에 지금의 자리에다가 다시 성문을 만들고 예전의 이름인 돈의문이라고 부르게 했다. 그후, 서대문안을 새로 만든 문안이라고 <새문안>이라고 부르게 됐으며 신문로(新門路) 새문안교회 등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경성도시개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헐리고 전차길이 놓여졌다.
이곳 어딘가에 돈의문터 안내표지가 있다던데, 눈 무딘 나는 찾지를 못하고 그냥 길을 건너 정동길로 들어선다. 성 프란치스코회관(수도원) 이화여고, 예원학원,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 등등의 옛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건물이 즐비한 정동길에는 카메라를 멘 사람들도 제법 많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눈에 띈다. 대법원이 있었던 서울시청 별관을 지나 덕수궁 앞 큰길가로 나오니 성곽 찾기가 난감하다. 그냥 큰길을 따라 남대문으로 걸으며, 이 구간은 다음에 시간을내어 다시 한 번 찾아 보기로 한다.
13시 50분 남대문 도착. 2008년 2월의 참사(?)로 새로 복원 중인 남대문(숭례문)을 보니 또다시 열불이 난다.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은 풍수지리학상 화산인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로로 쓰여졌다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이 현판을 썼다고 하나 이설(異說)이 많다.
남대문시장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육교를 건너니 다시 성곽이 시작된다. 그러나 힐튼호텔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니 성곽이 다시 끊기며 앞쪽으로는 성곽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소월길을 따라 백범광장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오니 성곽 공사로 막아 놓은 계단 난간에 성곽길 돌면서 가끔 본 '아도행(다음 카페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표지가 붙어있기에 난간을 잡고 무조건 광장으로 올라와 보니 공사가 한창인 백범광장은 사방이 펜스로 막혀있다. 어쩔 수 없이 담치기를 하여 밖으로 나온다. 늙은이(?)가 이래도 돼는겨??? ㅋㅋㅋ
담치기 하느라고 얼이 빠져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소월길을 따라 용산도서관 앞까지 왔다. 에궁!!! 이길은 성곽길과 연결 될 수가 없지. 얼른 도서관 건너편의 계단으로 올라서니 중구 푸른 도시 사업소 건물이 있으며 그 뒤로 성곽길이 남산 꼭대기로 뻗어있다.
14시 30분. 남산 정상에 있는 팔각정 도착. 모든 봉수(烽燧) 봉화(烽火)의 최종 집결지인 남산 봉수(봉화)대에서 잠시 시내를 조망한다. 왼쪽으로는 오늘 걷기 시작한 인왕산의 선바위 부근 부터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 보이며, 정면의 북악산 부터 오른쪽의 낙산을 비롯해 일전에 걸은 성곽길이 한 눈에 조망되나 시야는 별로이다.
*봉수는 연기를 올려서 적의 침입을 알리고, 봉화는 불을 피워서 알리는 곳인데 대(臺)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
14시 40분. 성곽을 옆에 두고 길을 따라 남산 순환로를 내려오는데 길 옆에 '등산로 아님'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그간의 산(山) 경험상 이 표지의 뜻은 등산로는 있으나 이 길로는 다니지 말라는 뜻임을 익히 알지만, 성의 밖쪽으로 걸어야 성곽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기에 모르는 척 위법(?)을 하며 그 길로 들어서니 굵직굵직한 소나무가 제법 울창한 길은 많은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뚜렷하다. 길을 따르는 것 보다는 공기도 좋기에 코를 벌름거리며 신나게 걷다가 성곽위를 보니 근래에 복원 공사를 하면서 만들은 성곽 제일 윗쪽 부분(명칭은 모름 ㅠㅠ)이 영 어울리지도 않고 마음에도 안든다. ㅉㅉㅉ
14시 50분. 철조망이 쭉 처져 있고 통신탑 같은 것이 서있는 곳 도착. 철조망을 끼고 잠시 걸으니, 이곳은 군 보안시설로 사진을 찍어도 국가보안법 몇조에 의거...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입간판이 서있다. 소시민에다가 새가슴인 나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두근 뛰지만 사람 다닌 흔적도 있기에 가능한 성곽을 놓지지 않을 욕심에 철조망을 끼고 그냥 걷는다. 가슴은 연상 콩닥콩닥. 에라~~ 이 새가슴아~~
낙엽이 많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약 15분간 걸으니 앞에 목조로 만든 전망대가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성곽 위에 세워져 있으며 성의 안팍을 연결하는 통로 구실도 한다.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는 하겠지만 조금은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옆으로 계속 이어진 성곽길을 따라 나무 계단길을 내려간다(계단 길이가 250m란다) 성곽은 순환도로에서 잠시 끊기는데 길 건너에 성곽이 보이기에 길을 건너 그 길을 따른다. 그러나 100m도 못가서 성곽길은 다시 끊기며 낭떨어지이다.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의 고개 마루턱이다. 어쩔 수 없이 국립극장(해오름 극장이라나)쪽으로 남산 순환로를 따라 내려와 길 건너편을 보니 예전의 타워 호텔은 헐리고 다른 이름의 호텔이 서있다. 그곳이 성곽길의 연결점이지만 소시민인 나는 호텔로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장충공원쪽으로 내려오다가 자유총연맹 건물로 들어가 성곽길을 찾는다. 자유총연맹 뒷길로 올라서니 새로 만든 성곽이 시작되는데 호텔 쪽으로는 성곽의 흔적도 없다.
장충체육관에서 동호대교로 연결된 길(동호대로?)까지 계속 된 성곽 길가로는 60년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동네가 계속된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이 드라마 겨울연가의 시골동네 모습의 배경이 된 곳이란다.
15시 55분. 동호대로(?)를 건너 신당동 천주교회가 있는 길을 잠시 걷다가 시구문길 표지를 따라 골목길로 접어드니 신축한 성곽길이 다시 보인다. 그길을 잠시 따르니 곧 광희문(光熙門)
*서울의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은 태조 3년(1396) 도성을 쌓을 때 다른 성문과 함께 축성됐으며 세종 4년(1442) 개축됐다. 1719년 문루를 세워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유실되었다가 1975년 도성 복원 공사 때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도 다시 세웠다. 시구문(屍軀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며 서소문(西小門)인 소의문(昭義門)과 더불어 성안의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다.
길 건너의 동대문 운동장을 헐고 조성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東大門歷史文化公園) 부터 동대문 까지는 가본 길이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3시간 50분간의 서울 성곽 돌기를 여기서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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